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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학과 평화학
토다 키요시 지음, 김원식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토다 키요시 지음, 김원식 옮김, <환경학과 평화학>, 녹색평론사, 2003.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내는 <역사교육> 편집진의 집요한 요구에 못이겨, 얼마 전 나는 나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 응했다. 근데 그걸 보고 전남의 김남철 선생님이 우리 모임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근데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좀 황당했다. 김선생님은 내 인터뷰를 보고 갑자기 먹먹해졌다는 것이다. 내공이 어떻고, 또 무슨 꼴통 등의 표현이 있었는데, 암튼 많이 놀랐다는 것 같다.
나는 오히려 김남철 선생님을 볼 때마다 항상 놀라고, 부럽고, 존경스러워 하는데. 그가 나를 보며 충격이었다니 나는 그게 좀 납득이 안 된다. 아마 나의 사고가 아나키스트의 철학을 담고 있다는 것에서 조금 쇼크였던 모양이다.
요사이 부쩍 더 아나키즘을 생각한다. 도대체 국가란 놈이 무엇인가. 이 생각을 하면 그렇다. 맑스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국가는 유산자들의 위원회일 뿐이다. 그들이 어떻게 하면 적절하게 사회의 부와 권력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먹는가 하는 것을 의논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국민의 동의는 매스컴을 통해 만들어진 조작된 여론과 강제 자발적 동의를 기초로 한 헤게모니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니 그건 진정한 여론도 국민의 의사도 아니다. 다만 기득권 층의 이익을 추수하는 것일 뿐이다.
논의되고 있는 한미자유무역협정도, 군사기지 건설도, 국민을 위한 게 아니다. 국가 안에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나머진 들러리다. 그러니 국가에 무얼 기대하겠는가. 그러니 아나키즘의 정당함은 뚜렷해진다.
'평화', 요즘엔 이 단어가 '사랑'이라는 말처럼 유행가 가사 이상으로 흔해져 버렸다. 진정 무엇이 평화인지도 모르는 채 사용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 평화를 아주 상업적으로 이용해먹는 놈들도 많다. 솔직히 제주도가 평화의 섬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전혀 없다. 장식일 뿐이다. 그래서였나, 나는 한동안 이 좋은 단어를 의도적으로 멀리하기도 했다. 천박해 보여서였다. 그러나 이제 좀 진지하게 다가가고 싶다. 그래서 이 책을 골랐다. 책 제목 그 자체가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은 책이다.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선 '평화'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 개념적으로라도 정리할 수 있었다. 종래 평화의 대립 개념을 전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1968년 인도의 스가타 다스굽타가 <비평화와 악개발>이라는 논문에서 전쟁이 없는 것만 가지고서는 평화라고 할 수 없으며 기아, 빈곤, 질병, 영양실조, 더러움을 특징으로 하는 고난과 궁핍을 비평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뒤 노르웨이의 요한 갈퉁이 1969년에 <폭력, 평화, 평화 연구>라는 논문에서 폭력과 평화를 재정의했다고 한다. "폭력이란 폭력이 눈앞에 있다는 것으로 인해 인간존재가 어떤 영향을 받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신체적, 정신적 실현이 잠재적 실현 이하에 있는 것과 같은 때이다."라고 했다 한다. 다시 말해 "건강, 생명, 행복, 미, 지성 등에서 자기 실현이 방해받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자기 실현을 방해하고 있는 요인 중에서 피할 수 있는 것이 폭력이"라는 것이다.
갈퉁에 의하면 폭력은 '직접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나뉜다. 직접적 폭력이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며, 구조적 폭력은 사회 제도, 관습, 경제적 상태나 법률, 개발 등에 의해 천천히 나타나는 폭력을 말한다. 이건 전쟁이 아닌 상태에서 저질러진다. 환경오염에 의해서, 식량 제재에 의해서 등이다.
그리고 그는 '전쟁 부재로서의 평화'를 '소극적 평화'라고 했고, 그에 반해서 '행복이나 복지나 번영이 보장된다는 의미에서의 평화'를 '적극적 평화'라고 했다. 다시 말해 적극적 평화는 '사회정의의 실현이자 인권의 옹호와 확대이며 고난과 궁핍에서의 해방이다."
그래서 이젠 '전쟁과 평화'가 아니라 '폭력과 평화'라는 표현이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사실 아프리카 어는 국가에서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 이것 역시 분명한 폭력이다. 세계 인구의 20%가 세계자원의 80%를 소비하는 것, 역시 분명한 폭력이다. 물론 그 소비자들에게는 가해 의사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소비는 누군가에게 가해의 행위가 되고 만다. 그게 바로 구조적 폭력이면 적극적 평화의 결여이다.
이렇게 평화에 대한 개념 정의를 얻은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물론 중요한 건 실천이다. 그래서인가 이 책의 저자 토다 키요시나 번역자이신 김원식 선생님은 그 구체적 실천을 말한다. 특히 번역자이신 김원식 선생은 1923년 생이다. 그 연세에 여전히 평화, 환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계신다. 살아있는 스승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평화실현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 가능한 것인가. '민주주의와 군대는 모순된다'라는 말에 답이 있다. 이 말은 오다 마코토의 말이다. 어쨌든 이들은 철저히 군대를 부정한다. 군대 그 자체가 폭력의 가능성일 뿐만 아니라 폭력 그 자체라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해 "미국 군대의 개입은 대기업의 이권 확보를 위해서 감행되었다." 이것은 앞서 국가가 가진자들의 위원회라고 했던 데에서 미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폭력일 뿐이다. 문제는 그것이 베버가 말한 것처럼 국가만이 그 폭력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다. 국가는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해 세계 최대의 살인행위를 과감히 저질렀던 것이다.
사람들이 테러는 비난하지만 전쟁은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전은 대부분 테러이다. 1차 대전에선 군인 사망자가 90%였다지만 베트남전만해도 민간인 사망자가 95%였다. 전략적 폭격 때문이다. 군인만 골라서 공격하는 게 아니라 도시 자체를 파괴해버린다. 그러면 민간인의 피해가 극심해진다. 이건 테러다. 전쟁이 아니다. 때문에 국가는 합법적 테러 기구를 보유한 권력인 것이다. 물론 저자는 군대 말고 또 사형제와 담배 판배를 국가에 의해 저질러지는 테러로 규정하고 있다.
최근 미군이 개입하는 대부분의 전쟁은 미국 산업체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미국 역시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저자 서문에 있는 표현대로라면 "지구사회의 불평등을 유지하기 위해서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다"라는 것이다. 모두가 미국만큼의 소비를 유지할 순 없다. 그러려면 지구가 대 여섯 개가 더 필요할 것이다. 그럼 미국은 자기들만이라도 그런 소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만을 억압하기 위해 군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말이 좋아 국토 방위이지, 사실은 기득권자들의 자기 이권 유지가 군대 설치의 목적일 뿐이다. 우리 남한 군대는? 뻔하다. 언제 한 번 독자적인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철저히 미군에 종속적이다. 아니, 광주 때처럼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 자국민을 살해하는 경우가 있다. 역시 본질은 하나다. 군대는 국민의 군대가 아니라 권력자의 군대일 뿐이다.
군대가 없는 국가. 꿈이 아니다. 코스타리카는 1871년에 사형제를 폐지했고, 1949년에 군대를 폐지했다. 19세기에 사형제 폐지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서구 선진국 중엔 미국과 일본만이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다. 변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21세기엔 전세계적 차원에서 군대 폐지도 꿈꿔볼 만 하다. 군대가 없는 사회.
간디가 "지구는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에는 충분한 크기이지만, 탐욕을 채우기에는 지나치게 작다" 라고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단순하고 윤택한 삶", "즐거운 불편"은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허위의 풍요로움을 버린다면 못이룰 것도 아니다. 그럴 때 군대없는 지구도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