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 근대 망령으로부터의 탈주, 동아시아의 멋진 반란을 위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박노자,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겨레출판, 2007.

박노자의 글. 내가 좋아하는 글이다. 박학다식 앞에서는 주눅들 수밖에 없지만, 그의 날카로운 시선에선 고마움을 느낀다. 사상적으로 분명 나는 그에게서도 영향을 받고 있다. 민족을 넘어, 국가라는 족쇄를 넘어, 평화적 아나키스트임이 분명한 그.
그의 그런 시선 때문인가 동아시아가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특히 근현대사에 대해선 나도 한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전혀 아니다. 관점이 달라지니 전혀 몰랐던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제목부터가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다. 한국사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역사까지 훤히 꿰뚫는다.
특히 티베트의 역사, 달라이 라마와 미국 부시와의 관계 등을 읽을 땐 완전히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다. 티베트는 오리엔탈리즘으로 활용하기에 딱이다. 그의 말 그대로 “이슬람권과 달리 유럽과 경쟁한 역사도, 유럽의 본격적인 식민 지배를 받은 적도 없는 그야말로 ‘경계선 밖의 오지’, ‘우리’에게 저항한 적이 없는 ‘그들’을 영적 스승으로 받아들이기에 별로 거리낄 게 없었다. 근대성에 회의를 느낀 지식인들이 신좌파 등 ‘불온사상’에 빠지는 걸 막으려했던 미국 등지의 주류 보수주의자 입장에서도, 1959년부터 망명하여 대중국 독립투쟁에 나서면서 미 정부의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달라이 라마가 서구 지성계의 ‘스승’이 된다는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미 중앙정보국이 티베트를 활용하며 중국을 견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불교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다시 결심하게 된 건 김명식이다. 그의 말대로 1930년대 최고의 논객인데도 좌파 지식인들마저 무관심하다. 그에 대한 평전도 그리고 전집도 없는 게 현실이다. 다시 생각해도 그건 말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건 해야 한다. 살아 있는 후손의 의무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책무다.
우장춘에 대한 이야기도 신선하게 읽었다. 일본인 어머니. 그래 우리 사회는 지독히도 인종적 차별이 심하다.
그가 건져낸 여성의 역사도 눈여겨 볼만하다. 여성을 다룬다고 다 여성사가 아니다. 관점이 달라야 여성사다.
그의 기본적 관점, 민족, 국가를 넘어 계급으로 사회를 보는 시선, 그렇다. 붉은 악마의 그 열정이 다 사그라지고 나면, 남는 건, 여전히 청년실업이다. 양극화의 극대화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라니.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 ‘우리’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인왕경>에서 이야기하는 ‘호국’이 “승려의 참전이 아니라 왕이 삼보를 받들고 계율을 지킨다면 나라는 불·보살의 가피력으로 저절로 지켜진다는 의미”라는 해석도 신선했다.
글 속에 피가 섞여 있지 않으면 문학의 성립되지 않는다는 니체의 이야길 인용한 것도 심장을 때렸다. 요즘은 대부분 그렇다. 피가 섞이기는커녕 돈을 쫓는 얄팍함만이 풍긴다.
어쨌거나 “각종 규율로 우리의 내외면을 구속하는 한편, ‘소비’라는 달콤한 당근과 ‘대중문화’라는 신종 아편으로 우리를 부단히 유혹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순치되어 주체적 인간의 뿌리인 ‘반란성’을 상실한 동아시아인으로서 우리가 새롭게 지향해야 할 ‘반란자적 모습’을 찾기” 위해서도 그의 뼈아픈 지적을 아로 새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