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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6년 11~12월 - 통권 91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빛나고 맑은 글들이
<녹색평론> 2006년 11-12월호(통권 91호)
“이번에는 어떤 빛나고 맑은 글들이 나를 깨우치고 위로하고 따뜻한 연대의 손으로 어깨를 두드려줄까”
충북 음성의 독자 남용식이라는 농민이 두 달에 한 번 배달되는 <녹색평론>을 받을 때의 설렘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 역시 위의 수사보다 더 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만큼 이 책에서 받는 영감과 위로는 크다. “쓸쓸하다고 할 밖에는 달리 설명하기 힘든 현실에서 그래도 <녹색평론>에서 만나는 이들의 존재는 무너져 내리는 어깨를 추스르도록 힘을 준다.” 나 역시 그렇다. 그렇게 기다리고 또 그렇게 힘을 추스른다. 이번 호 역시 나의 등을 떠밀어줬고 자꾸만 주저앉는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 만큼 버릴 글이 없다. 그러니 책 읽고 몇 자 쓰자는 게 한편으로 부담까지 된다. 버릴 글이 없어서다. 책에 밑줄을 박박 그으며 읽는 내가 예전에 신영복 선생님 책을 읽으며 거의 모든 글에 밑줄을 쳤던 기억이 난다. 지금 역시 그런 심정이다. 그 만큼 주변 환경이 황량해졌고 그래서 내가 이 책에 기대는 게 커졌다는 말일 것이다.
‘책을 내면서’에서 김종철 선생님은 말한다. 전쟁의 논리나 환경파괴의 논리는 같은 뿌리라는 걸. 얼마 전부터 <녹색평론>이 환경 문제를 넘어 현실 정치에 많은 발언을 한다 싶었는데, 그건 바로 그것이 결코 다른 뿌리가 아님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리라. 본래 환경문제 이전에 사회의 부정의에 분개했던 내가 요즘 들어 더욱 이 책에 매력을 느끼는 것도 이 둘의 문제가 같은 것이라는 지적에 공감해서 그럴 것이다.
똑똑한 바보들은 자꾸 현실 논리를 들이밀며 전쟁을 부추긴다. 그러면서 반전 평화 운동을 이상주의적 운동이라고 나무란다. 그러나 김종철 선생님 말대로 전쟁, 경제성장의 논리야 말로 세계를 말아먹을 낭만적 환상이다. 그 탐욕스런 똑똑이들에게 덕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기에 최소한 ‘공생의 논리’만이라도 갖추어줬으면 좋겠다.
철저한 원칙주의자 천규석 선생님의 일갈은 여전히 매섭다. “나는 전쟁을 위해 불필요한 전시작통권을 되돌려 받는 것보다 아예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헌법 혹은 반전헌법을 제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자주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전통수권이 우리에게 속한 권리라면 그것을 되찾아오는 데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것을 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버리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물론 천선생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쪽이 아니다. ‘시장’과 ‘친환경’은 더불어 공존이 불가능한 모순관계임을 말하고 있다. 시장에 맡기면 결국 반환경 농산물이 되고 만다고 한다. 그와 더불어 운동하는 사람들에게도 매서운 일침을 가한다. ‘기구’보다는 ‘사람 사이의 관계 변화’를 중시하라고 하신다. ‘재정지원을 받는 물량운동은 반드시 망한다’라고도 한다. 절절히 공감한다. 그것은 이미 운동이 아니다.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추수하는 것일 뿐이다. 결국 시장과 국가를 동시에 넘어서서 민중 스스로의 자치와 자율로 서는 자립적인 지역공동체를 꿈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 주변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처럼 국가 자본 의존형 운동을 벌이다간 결국 기존의 시장에 흡수되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새겨들을 일이다.
정혜진의 글 중 기억할 만한 통계 하나. 세계 인구 4.6%의 미국 사람이 에너지 소비는 전 세계의 22.2%라고 한다.
개번 매코맥의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의 서문이 실렸다. 동아시아에 정통한 사람이다. 그의 책이 집에 있는데도 아직 읽지 않았다. 물론 이 서문에 실린 내용은 당연한 말이라 새삼스레 꺼낼 건 아니다. 북한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은 미국의 잘못이라는 내용이다. 미국이 핵, 범죄, 인권 등을 가지고 계속해서 북한을 옥죄는데 그것은 결국 북한 체제만을 강화하고 있다. 적대적 공존일 뿐이다.
이필렬의 ‘황우석 사태, 끝난 것이 아니다’ 역시 중요한 글이다. 사기가 아니라면 여전히 한국 사회는 어떤 광기 속에 있을 것이라는 지적, 그리고 그 광기가 여전히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날카롭다. 그 신기술만 확보된다면 수많은 여성들이 난자 매매가 이뤄질 것이며, 거기엔 역시 빈민 여성들이 참여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돈으로 인간 생성을 사고팔게 될 것이다. 이건 분명 광기이고 야만이다. 그런데도 그의 지적처럼 이게 가능하다면 한국사회는 분명 그 광기 속에 휘말릴 게 틀림없다.
박승옥의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 역시 심각한 글이다. 석유 시대가 끝나가고 있는데도 우린 불감이다. 농사꾼이 되는 게 정답인데 나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답답하다. 빨리 떠나야 하는데.
이번 호에서 가장 내가 공감했던 글은 박경미의 ‘지식인과 염치’다. 예전에도 이 분의 글을 좋아했다. 기독학과 교수인 만큼 종교적으로 세상을 보면서도 편견이 아니라 진정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글이었다. 근데 그래서인가 그의 글은 항상 따뜻했다. 그런데 이번 글은 아주 매섭다. 주변 지식인들의 타락을 너무 많이 봐와서 그랬나. 암튼 내가 요즘 거의 경멸에 가까운 저주를 보내고, 그리곤 그 학문 공동체를 떠날까 싶을 정도로 나는 그 지식인 세계를 혐오한다. 그래서인가 그의 일갈에 너무도 깊이 공감했다.
항상 성경을 중심으로 쓰던 그의 글은 이번에 동양 고전으로 옮겨 갔다. 그 이전에 나는 예전에 다산 정약용에게서 배웠던 ‘학문하는 자의 자세’를 이번에 박경미의 글에서 잡아낼 수 있었다. 그도 다산을 살짝 언급하긴 했다. 하지만 주된 인용은 아니다. 물론 가르침은 동일했다.
“내가 몇 마디 말과 글을 농사꾼의 손에 쥐어주고서는 그 손에서 쌀을 빼앗아 올 말과 글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어야 할지 생각하게 만든다.” ‘밥그릇의 엄숙함’을 다시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다산이 ‘선비의 학문은 생산하는 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라는 말, ‘생산하는 자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면 그것은 글로써 밥을 빼앗아 먹는 강도 짓’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칼 대신 붓을 잡고 하는 강도 짓'이라고 했던가. 왜냐하면 나의 글이 밥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생산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글은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학문은, 나의 글은? 성찰할 일이다.
“이들은 잔머리를 굴려 일시적으로 현실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조작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악순환의 눈 덩이를 증폭시키는 데 일조하지 않았다.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무리로부터 고립되어 밖으로 나갔다. 자유로운 걸음걸이로.” 나 역시 최근에 어느 시민사회단체를 떠났다. 이미 그 단체는 정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악순환의 눈 덩이를 증폭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자유로운 걸음걸이’를 되찾기 위해서다. “속류사회와 자신과의 유대관계에서 벗어나 현실의 진면목, 인간의 진면목을 보고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그 사람들을 본받기 위해서다. ‘무리로부터의 고립’이 외롭긴 하지만 마음은 편하다. 박경미는 계속해서 ‘외로운 거리두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거리두기의 대상은 권력과 자본이다.
사람들이 ‘문화상품’에 눈이 멀 때 우리는 ‘문화’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문화에는 이기고 짐도 없으며 경쟁도 가격도 없다. “삶의 진면목을 얼마나 잘 표현해내고 세계와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얼마만큼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지식인이 고민해야 할 내용이다. 그것을 포장해서 상품화하는 게 아니다.
최근 인문학의 위기라고 떠들며 무슨 선언을 하는 우스운 교수들은 그저 인문학을 어떻게 포장해서 팔 것인가를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정말 한심한 노릇이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이 무슨 선언을 하고 성명서를 낼 수 있는 성격의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 이벤트가 교육부나 학술진흥재단의 데스크 하나를 더 만들거나 유지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리고 거기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잠시 얻어먹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심각한 얼굴로 선언한 내용 자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그러나 대신 그들은 인문학 위기 운운하며 국가에 매달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문학 위기 선언은 ‘인문학을 팔어먹는 장사의 위기 선언’이라는 비난을 자초했다. 그 점에서 그들이 한 인문학 위기 선언은 국가와 자본에 기생하지 않는 자립적이고 자생적인 인문학이 더 이상 이 땅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인문학 파탄선언’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교수들에게서 희망을 보지 못한다. “국가와 자본이 벌여 놓은 문화의 경쟁판에서 시끄러운 소음과 끊임없는 자기 과시, 변덕스런 유행으로 날이 새고 지는” 그런 곳에서나 어울릴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벼랑끝을 향해 달려가는 한 무더기 돼지떼처럼 다른 사람들과 같은 무리에 속해서 같이 뛰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안도감을 느낀다. 다수의 무리에 속함으로써 자신의 건전함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심리”인 것이다. 이런 ‘맹목적인 달리기’는 문화가 아니라 야만일 뿐이다. 그런데도 주변의 지식인들은 그저 ‘눈 먼 돈’ 타먹기 경쟁에 미쳐 있다. 그들은 이미 지식인이 아니다. 지식 장사꾼, 기능인일 뿐이다.
그래서인가. 그 동안 착하고(?) 여린 글만을 쓰던 박경미가 작심한 듯 써댔다. 그의 글 말미는 이렇다.
“인문학의 고결한 가치를 이야기하고, 그 중요성을 주장하려면 그리고 사회를 향해 대접받기를 요구하려면, 적어도 민중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지식 팔아 밥 먹고 살면서 최소한의 염치라도 지킬 수 있다. 인간성을 밑바닥에서부터 위협하는 시대의 야만성에 괴로워하기는커녕 어떻게든 그 조류를 타볼까 궁리나 하는 주제에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사회를 나무라고 뭔가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보기가 민망하고 창피하다. 배가 좀 고픈가? 이럴 때 동양의 한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말을 해 주고 싶다.
염치 불구하고 말하겠다.
소인은 궁하면 흐트러진다. 군자라야 굶는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논어> 위령공, 1)”
독설이지만 필요한 독설이다. 아주 적실하고 절절한 독설이다. “배가 좀 고픈가?”
자존심을 버린 지식인들, 대학 때 학교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게 있었다. ‘호랑이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나니’. 이제 채식주의자가 된 내가 인용하긴 좀 뭐한 구절이지만, 배알마저 자본에 다 팔아버린 쓸개 없는 지식인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진정 인문학은 돈 타먹을 궁리나 하는 게 아니라 그 돈과 권력 넘어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기에 그렇다.
정영홍의 글에선 <로스앤젤스 타임즈>의 기사를 인용한 대목이 있다. ‘영어학습은 거의 국민종교’가 되었다는 대목이다. 역시 제목이 ‘교육에서 자연으로-국가와 시장을 넘어’다. 같은 맥락이다. 교육 역시 그런 안목에서 보아야 한다.
강국주의 글. 그는 풀무학교 전공부 강사다. 국가 공인 졸업장도 나오지 않는 2년제 전문대학 강사라고 하면 이해가 쉽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몰린다. 서서히 정신 차린 사람들이 많아져 간다는 증거다. 그 사람들 중에 나도 포함되고 싶다. 그의 글을 통해, 그리고 뒤쪽 <홍순명 선생님의 들려주는 풀무학교 이야기> 서평에서 풀무학교을 엿본다. 예전부터 말은 많이 들었다. 1958년에 개교한 대안학교. 그 땐 대안학교라는 말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선지적인 삶을 살았다.
그래서인가 요즘 허망하게 떴다 사라지는 허투루 대안학교와는 다르다. 철학이 확고하다. 그리고 그 철학을 몸으로 실천하는 어르신들이 계신다. 그 학교의 건학정신부터가 다르다. ‘더불어 사는 평민’이다. 엘리트를 키우기 위한 이우학교와는 다르다. ‘잔머리만 잘 굴리는 머리 좋은 바보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25명의 교직원과 75명의 학생 그리고 학부모가 공동체가 된 학교다. 그렇다면 교직원 하나에 학생이 셋이다. 부럽다. 물론 거기에는 교사들의 희생이 따른다. 아마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쁨으로 살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문명에서 뒤떨어진 것도 아니다. ‘흙에서 인터넷까지’ 전인교육을 실시한다. “일만 하면 소, 공부만하면 도깨비‘라는 모토 아래 배우고 가르친다고 한다. 매일 아침 성서 한 장씩 읽는 것도 영성 교육을 위해 좋은 것 같다. 학부모 특강, 노작 교육 등은 빼 놓을 수 없는 것이겠다. 이렇게 일과 공부를 하나로 하고, 영성(인성)과 지식을 하나로 한다면 참으로 좋겠다.
서평을 쓴 조향미는 글 끝에 이렇게 말한다. “학교는 교육의 현장이 아니라 사육의 우리”라고. 아프지만 공감한다. 그러면서 그는 “세상을 바꾸려면 교육부터 바꿔야 한다. 없는 것은 길이 아니라 용기였음을 각성한다면, 길은 언제나 어디서나 만들 수 있다”라고.
절절히 공감했는데, 정작 내겐 용기가 없다. 그러니 길도 안 보이는 것이다.
랄프 네이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후보와 인터뷰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미 국가는 자본에 먹혀 있다는 게 핵심이다. 기업정부라는 것이다. 그러니 국가가 서민을 보호해주진 못한다. 그리고 그 통제력은 국가 밖의 국제 기구에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 항의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홍기빈이 말하는 ‘투자자, 국가 직접 소송제’가 FTA에서 가장 두려운 항목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책 거의 말미에 김종철 선생님의 발표했다던 대목을 꼭 다시 옮기고 싶다. “FTA는 평지돌출한 사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경제성장 일변도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제가는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지적이다. 욕망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대량생산, 물질적 풍요, 풍족한 소비, 안락과 편의를 버리고 생명을 기르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소박한 삶에서 진정한 기쁨을 맛보아야만 미래가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