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06년 11~12월 - 통권 91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빛나고 맑은 글들이

<녹색평론> 2006년 11-12월호(통권 91호)


“이번에는 어떤 빛나고 맑은 글들이 나를 깨우치고 위로하고 따뜻한 연대의 손으로 어깨를 두드려줄까”
충북 음성의 독자 남용식이라는 농민이 두 달에 한 번 배달되는 <녹색평론>을 받을 때의 설렘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 역시 위의 수사보다 더 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을 만큼 이 책에서 받는 영감과 위로는 크다. “쓸쓸하다고 할 밖에는 달리 설명하기 힘든 현실에서 그래도 <녹색평론>에서 만나는 이들의 존재는 무너져 내리는 어깨를 추스르도록 힘을 준다.” 나 역시 그렇다. 그렇게 기다리고 또 그렇게 힘을 추스른다. 이번 호 역시 나의 등을 떠밀어줬고 자꾸만 주저앉는 다리에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 만큼 버릴 글이 없다. 그러니 책 읽고 몇 자 쓰자는 게 한편으로 부담까지 된다. 버릴 글이 없어서다. 책에 밑줄을 박박 그으며 읽는 내가 예전에 신영복 선생님 책을 읽으며 거의 모든 글에 밑줄을 쳤던 기억이 난다. 지금 역시 그런 심정이다. 그 만큼 주변 환경이 황량해졌고 그래서 내가 이 책에 기대는 게 커졌다는 말일 것이다.

‘책을 내면서’에서 김종철 선생님은 말한다. 전쟁의 논리나 환경파괴의 논리는 같은 뿌리라는 걸. 얼마 전부터 <녹색평론>이 환경 문제를 넘어 현실 정치에 많은 발언을 한다 싶었는데, 그건 바로 그것이 결코 다른 뿌리가 아님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리라. 본래 환경문제 이전에 사회의 부정의에 분개했던 내가 요즘 들어 더욱 이 책에 매력을 느끼는 것도 이 둘의 문제가 같은 것이라는 지적에 공감해서 그럴 것이다.
똑똑한 바보들은 자꾸 현실 논리를 들이밀며 전쟁을 부추긴다. 그러면서 반전 평화 운동을 이상주의적 운동이라고 나무란다. 그러나 김종철 선생님 말대로 전쟁, 경제성장의 논리야 말로 세계를 말아먹을 낭만적 환상이다. 그 탐욕스런 똑똑이들에게 덕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기에 최소한 ‘공생의 논리’만이라도 갖추어줬으면 좋겠다.

철저한 원칙주의자 천규석 선생님의 일갈은 여전히 매섭다. “나는 전쟁을 위해 불필요한 전시작통권을 되돌려 받는 것보다 아예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헌법 혹은 반전헌법을 제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자주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전통수권이 우리에게 속한 권리라면 그것을 되찾아오는 데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다만 그것을 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손으로 버리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물론 천선생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쪽이 아니다. ‘시장’과 ‘친환경’은 더불어 공존이 불가능한 모순관계임을 말하고 있다. 시장에 맡기면 결국 반환경 농산물이 되고 만다고 한다. 그와 더불어 운동하는 사람들에게도 매서운 일침을 가한다. ‘기구’보다는 ‘사람 사이의 관계 변화’를 중시하라고 하신다. ‘재정지원을 받는 물량운동은 반드시 망한다’라고도 한다. 절절히 공감한다. 그것은 이미 운동이 아니다.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추수하는 것일 뿐이다. 결국 시장과 국가를 동시에 넘어서서 민중 스스로의 자치와 자율로 서는 자립적인 지역공동체를 꿈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 주변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처럼 국가 자본 의존형 운동을 벌이다간 결국 기존의 시장에 흡수되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새겨들을 일이다.
정혜진의 글 중 기억할 만한 통계 하나. 세계 인구 4.6%의 미국 사람이 에너지 소비는 전 세계의 22.2%라고 한다.
개번 매코맥의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의 서문이 실렸다. 동아시아에 정통한 사람이다. 그의 책이 집에 있는데도 아직 읽지 않았다. 물론 이 서문에 실린 내용은 당연한 말이라 새삼스레 꺼낼 건 아니다. 북한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은 미국의 잘못이라는 내용이다. 미국이 핵, 범죄, 인권 등을 가지고 계속해서 북한을 옥죄는데 그것은 결국 북한 체제만을 강화하고 있다. 적대적 공존일 뿐이다.
이필렬의 ‘황우석 사태, 끝난 것이 아니다’ 역시 중요한 글이다. 사기가 아니라면 여전히 한국 사회는 어떤 광기 속에 있을 것이라는 지적, 그리고 그 광기가 여전히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날카롭다. 그 신기술만 확보된다면 수많은 여성들이 난자 매매가 이뤄질 것이며, 거기엔 역시 빈민 여성들이 참여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돈으로 인간 생성을 사고팔게 될 것이다. 이건 분명 광기이고 야만이다. 그런데도 그의 지적처럼 이게 가능하다면 한국사회는 분명 그 광기 속에 휘말릴 게 틀림없다.
박승옥의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 역시 심각한 글이다. 석유 시대가 끝나가고 있는데도 우린 불감이다. 농사꾼이 되는 게 정답인데 나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답답하다. 빨리 떠나야 하는데.

이번 호에서 가장 내가 공감했던 글은 박경미의 ‘지식인과 염치’다. 예전에도 이 분의 글을 좋아했다. 기독학과 교수인 만큼 종교적으로 세상을 보면서도 편견이 아니라 진정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글이었다. 근데 그래서인가 그의 글은 항상 따뜻했다. 그런데 이번 글은 아주 매섭다. 주변 지식인들의 타락을 너무 많이 봐와서 그랬나. 암튼 내가 요즘 거의 경멸에 가까운 저주를 보내고, 그리곤 그 학문 공동체를 떠날까 싶을 정도로 나는 그 지식인 세계를 혐오한다. 그래서인가 그의 일갈에 너무도 깊이 공감했다.
항상 성경을 중심으로 쓰던 그의 글은 이번에 동양 고전으로 옮겨 갔다. 그 이전에 나는 예전에 다산 정약용에게서 배웠던 ‘학문하는 자의 자세’를 이번에 박경미의 글에서 잡아낼 수 있었다. 그도 다산을 살짝 언급하긴 했다. 하지만 주된 인용은 아니다. 물론 가르침은 동일했다.
“내가 몇 마디 말과 글을 농사꾼의 손에 쥐어주고서는 그 손에서 쌀을 빼앗아 올 말과 글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어야 할지 생각하게 만든다.” ‘밥그릇의 엄숙함’을 다시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다산이 ‘선비의 학문은 생산하는 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라는 말, ‘생산하는 자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면 그것은 글로써 밥을 빼앗아 먹는 강도 짓’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칼 대신 붓을 잡고 하는 강도 짓'이라고 했던가. 왜냐하면 나의 글이 밥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생산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글은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학문은, 나의 글은? 성찰할 일이다.
“이들은 잔머리를 굴려 일시적으로 현실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조작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악순환의 눈 덩이를 증폭시키는 데 일조하지 않았다. 그러기보다는 차라리 무리로부터 고립되어 밖으로 나갔다. 자유로운 걸음걸이로.” 나 역시 최근에 어느 시민사회단체를 떠났다. 이미 그 단체는 정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악순환의 눈 덩이를 증폭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자유로운 걸음걸이’를 되찾기 위해서다. “속류사회와 자신과의 유대관계에서 벗어나 현실의 진면목, 인간의 진면목을 보고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그 사람들을 본받기 위해서다. ‘무리로부터의 고립’이 외롭긴 하지만 마음은 편하다. 박경미는 계속해서 ‘외로운 거리두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거리두기의 대상은 권력과 자본이다.
사람들이 ‘문화상품’에 눈이 멀 때 우리는 ‘문화’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문화에는 이기고 짐도 없으며 경쟁도 가격도 없다. “삶의 진면목을 얼마나 잘 표현해내고 세계와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얼마만큼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지식인이 고민해야 할 내용이다. 그것을 포장해서 상품화하는 게 아니다.
최근 인문학의 위기라고 떠들며 무슨 선언을 하는 우스운 교수들은 그저 인문학을 어떻게 포장해서 팔 것인가를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정말 한심한 노릇이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이 무슨 선언을 하고 성명서를 낼 수 있는 성격의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 이벤트가 교육부나 학술진흥재단의 데스크 하나를 더 만들거나 유지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리고 거기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잠시 얻어먹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심각한 얼굴로 선언한 내용 자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그러나 대신 그들은 인문학 위기 운운하며 국가에 매달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문학 위기 선언은 ‘인문학을 팔어먹는 장사의 위기 선언’이라는 비난을 자초했다. 그 점에서 그들이 한 인문학 위기 선언은 국가와 자본에 기생하지 않는 자립적이고 자생적인 인문학이 더 이상 이 땅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인문학 파탄선언’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교수들에게서 희망을 보지 못한다. “국가와 자본이 벌여 놓은 문화의 경쟁판에서 시끄러운 소음과 끊임없는 자기 과시, 변덕스런 유행으로 날이 새고 지는” 그런 곳에서나 어울릴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벼랑끝을 향해 달려가는 한 무더기 돼지떼처럼 다른 사람들과 같은 무리에 속해서 같이 뛰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안도감을 느낀다. 다수의 무리에 속함으로써 자신의 건전함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심리”인 것이다. 이런 ‘맹목적인 달리기’는 문화가 아니라 야만일 뿐이다. 그런데도 주변의 지식인들은 그저 ‘눈 먼 돈’ 타먹기 경쟁에 미쳐 있다. 그들은 이미 지식인이 아니다. 지식 장사꾼, 기능인일 뿐이다.
그래서인가. 그 동안 착하고(?) 여린 글만을 쓰던 박경미가 작심한 듯 써댔다. 그의 글 말미는 이렇다.
“인문학의 고결한 가치를 이야기하고, 그 중요성을 주장하려면 그리고 사회를 향해 대접받기를 요구하려면, 적어도 민중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지식 팔아 밥 먹고 살면서 최소한의 염치라도 지킬 수 있다. 인간성을 밑바닥에서부터 위협하는 시대의 야만성에 괴로워하기는커녕 어떻게든 그 조류를 타볼까 궁리나 하는 주제에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사회를 나무라고 뭔가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보기가 민망하고 창피하다. 배가 좀 고픈가? 이럴 때 동양의 한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말을 해 주고 싶다.
염치 불구하고 말하겠다.
소인은 궁하면 흐트러진다. 군자라야 굶는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논어> 위령공, 1)”

독설이지만 필요한 독설이다. 아주 적실하고 절절한 독설이다. “배가 좀 고픈가?”
자존심을 버린 지식인들, 대학 때 학교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게 있었다. ‘호랑이는 굶주려도 풀을 먹지 않나니’. 이제 채식주의자가 된 내가 인용하긴 좀 뭐한 구절이지만, 배알마저 자본에 다 팔아버린 쓸개 없는 지식인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진정 인문학은 돈 타먹을 궁리나 하는 게 아니라 그 돈과 권력 넘어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이기에 그렇다.

정영홍의 글에선 <로스앤젤스 타임즈>의 기사를 인용한 대목이 있다. ‘영어학습은 거의 국민종교’가 되었다는 대목이다. 역시 제목이 ‘교육에서 자연으로-국가와 시장을 넘어’다. 같은 맥락이다. 교육 역시 그런 안목에서 보아야 한다.

강국주의 글. 그는 풀무학교 전공부 강사다. 국가 공인 졸업장도 나오지 않는 2년제 전문대학 강사라고 하면 이해가 쉽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몰린다. 서서히 정신 차린 사람들이 많아져 간다는 증거다. 그 사람들 중에 나도 포함되고 싶다. 그의 글을 통해, 그리고 뒤쪽 <홍순명 선생님의 들려주는 풀무학교 이야기> 서평에서 풀무학교을 엿본다. 예전부터 말은 많이 들었다. 1958년에 개교한 대안학교. 그 땐 대안학교라는 말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선지적인 삶을 살았다.
그래서인가 요즘 허망하게 떴다 사라지는 허투루 대안학교와는 다르다. 철학이 확고하다. 그리고 그 철학을 몸으로 실천하는 어르신들이 계신다. 그 학교의 건학정신부터가 다르다. ‘더불어 사는 평민’이다. 엘리트를 키우기 위한 이우학교와는 다르다. ‘잔머리만 잘 굴리는 머리 좋은 바보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25명의 교직원과 75명의 학생 그리고 학부모가 공동체가 된 학교다. 그렇다면 교직원 하나에 학생이 셋이다. 부럽다. 물론 거기에는 교사들의 희생이 따른다. 아마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쁨으로 살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문명에서 뒤떨어진 것도 아니다. ‘흙에서 인터넷까지’ 전인교육을 실시한다. “일만 하면 소, 공부만하면 도깨비‘라는 모토 아래 배우고 가르친다고 한다. 매일 아침 성서 한 장씩 읽는 것도 영성 교육을 위해 좋은 것 같다. 학부모 특강, 노작 교육 등은 빼 놓을 수 없는 것이겠다. 이렇게 일과 공부를 하나로 하고, 영성(인성)과 지식을 하나로 한다면 참으로 좋겠다.
서평을 쓴 조향미는 글 끝에 이렇게 말한다. “학교는 교육의 현장이 아니라 사육의 우리”라고. 아프지만 공감한다. 그러면서 그는 “세상을 바꾸려면 교육부터 바꿔야 한다. 없는 것은 길이 아니라 용기였음을 각성한다면, 길은 언제나 어디서나 만들 수 있다”라고.
절절히 공감했는데, 정작 내겐 용기가 없다. 그러니 길도 안 보이는 것이다.

랄프 네이더,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후보와 인터뷰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미 국가는 자본에 먹혀 있다는 게 핵심이다. 기업정부라는 것이다. 그러니 국가가 서민을 보호해주진 못한다. 그리고 그 통제력은 국가 밖의 국제 기구에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 항의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무서운 일이다. 홍기빈이 말하는 ‘투자자, 국가 직접 소송제’가 FTA에서 가장 두려운 항목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책 거의 말미에 김종철 선생님의 발표했다던 대목을 꼭 다시 옮기고 싶다. “FTA는 평지돌출한 사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경제성장 일변도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제가는 제기될 수밖에 없는 문제”라는 지적이다. 욕망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대량생산, 물질적 풍요, 풍족한 소비, 안락과 편의를 버리고 생명을 기르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소박한 삶에서 진정한 기쁨을 맛보아야만 미래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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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6년 7~8월 - 통권 89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녹새평론> 2006년 7-8월호(통권89호)




김종철 선생님의 '책을 내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좋은 글이지만, 이번 호에선 무엇보다 이계삼 선생님의 글 하나 하나가 나를 다잡게 했다. 언제부터인가 <녹색평론>에서 본 이계삼 선생님의 글은 늘 나를 긴장케 했고 삶의 의미를 다시 묻게 했지만, 이번 호에 실린 글은 더더욱 나를 또박또박 한 구절씩 읽게 해줬다.

'경남 밀양 밀성교 교사'라고만 소개가 된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겠다. 언젠가 양동기 선생님도 그 분 말을 했다. 이 책에 실린 글 중에 참 좋은 글이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런 좋은 글은 기교에서 나오지 않는다. 삶에서 나온다. 같이 아파하고 책임지려는, 그런 진한 노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힘이 있는 것이다.

이번 글은 천성산 소송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문을 보고서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쓴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짐작은 했다고 한다. 그러나 판결문의 내용은 너무도 참담한 것이어서 수용과는 무관하게 펜을 들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죄 없는 그 시절의 시 한 구절부터 시작했다. 그러더니 2006년 한국의 월드컵 현상으로 글을 옮긴다. "어디서도 풀어낼 수 없었던 한국 사람들의 공격적인 욕망, 분출의 충동, 그 고단한 삶의 응어리들이 터뜨려질 순간을 위해 몇 날 몇밤을 숨죽이며 기다렸다가 이제 스스로 풀이 죽어버렸다. 실로 가련한 축제였다." 동의한다. 그 '가련한 축제'라는 말에 대해.
"세상은 24시간 내내 끓어오르는 대낮 같다. 무언가 차분하게 가라앉을 순간은 좀처럼 찾아들 것 같지 않다. 이 가속의 질주를 잊을 수 있는 길은 더한 가속의 질주밖에 없다는 듯 대한민국은 욕망의 과잉, 정치의 과잉, 다툼의 과잉, 무어든 과잉으로 넘쳐 오른다."

"불의는 외면하되, 불이익에는 목숨을 거는 것이 꼿꼿한 상식이 되었다. 그래서 가치로운 것들은 패배하고, 힘없고 약한 것들은 뿌리뽑히고 죽임당한다. 2006년 이 시간, 대한민국은 아타깝고 추하다."
특히 이 대목에선 나까지 그저 말 없이 먹먹하게 있어야 했다. 추한 대한민국의 2006년.

그는 그 추함의 절정을 어쩌면 천성산 대법원 결정문에서 보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마음을 많이 다스렸다. "세상의 폭력은 같은 크기의 폭력으로 결코 잦아들지 않으며, 이 세상을 넘어서려는 열정은 사회공학적 시스템이 아니라 오직 '사랑'과 '희생'의 가치를 향해 바쳐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는 자신의 각성을 써 넣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유물론자의 자의식을 일찌감치 버렸다"라고 한다. "장 지오노가 묘사한 나무를 심은 사람처럼 사랑과 희생에 바탕한 반복된 행동-뿌리내림만이 유일한 노선이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그였지만 이번에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나 보다. 물론 천성산에 지율 스님이 매달릴 때부터 그는 그 스님의 육성과 몸짓, 태도 속에서 "간절한 사랑과 희생의 열기를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자식을 감옥이나 사지로 내보낸 어머니의 다급하고도 절절한 마음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는 그의 결론, 사랑과 희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스님의 고행에는 이 세상에 넘쳐나는 폭력과 맹목들을 '어쩔 수 없다'고 용인하면서 내심 세상의 타락을 즐기며 살아온 우리들 모두의 죄의 업연이 서려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라고 말한다.

그 대법원 판결의 주심이 김영란이어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 김영란은 꽤나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법관으로 알려져 있다. 강지원 변호사의 부인이다. "물론 나는 이분들에 대한 개인적인 유감이 없다. 한국사회의 법정신, 환경문제를 대하는 우리 법조계의 습속, 그리고 최고위급 법관들의 일반적인 멘탈리티 따위를 생각한다면 이 분들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시민의 시선으로 이 판결 과정과 결정문을 유심히 살핀다면 참담해질 수밖에 없다........오직 법관의 재판만이 효력을 가지는 것을 시민들이 그들 법관에게 판단의 권능을 위임했기 때문이다.........현대의 법은 다만 현대세계의 힘의 질서를 반영할 뿐이다.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그들의 행위-법의 해석과 적용-가 실제 세계에서 갖는 구체적인 의미를 따져보는 일종의 가치론적인 성찰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어진 사실 중에서 결론에 필요한 것만 고르고 그것을 형식논리에 맞게 퍼즐처럼 짜맞춘 것이 이른바 판결이 아닌가. 그러므로 판결들은 인간의 성찰과 고뇌의 산물이라기보다 대개 판결 기계가 어슷비슷하게 찍어내는 복제 품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 세계의 압도적인 힘의 질서가 화인처럼 박혀있다."

그렇게 그는 판결문을 보며 참담한 마음을 써 내려갔다. 우리사회 법관들의 기본적 사고가 이 정도라는 것에 크게 절망했던 모양이다.

이 대목에선 김종철의 서문에 쓰인 '국가'에 대한 견해를 떠올리게 한다. "국가란 무엇일까. 근대국가란 본질적으로 폭력에 기초해 있고, 또 폭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지적. 그러면서 그는 또 "국익은 과연 누구의, 무엇을 위한 국익인가라는 좀 더 근원적인 질문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누구를 위한 한미 FTA인지, 누구를 위한 새만금인지, 누구를 위한 천성산 관통도로인지, 맑스의 말대로 국가는 '지배계급의 위원회'일 뿐이다. 대법원의 판결 역시 그 맥락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계삼 선생님이 고통스럽게 이야기 하는 사랑과 희생 외에는 방법이 없다. 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이다.

그들의 사고는 무엇에 맞춰져 있을까? "경제적 효용성"이다. "비인간적인 체제일망정 거기에 경제적인 효율성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순수한 학문적인 관심의 표명이라고 하기 어려운 '경제인간'으로서의 그들 나름의 약육강식적 인간관"을 보여줄 뿐이다.

이건 우리사회의 진보 역시 그렇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사회 역시 진보가 비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김종철 선생은 말한다. "부의 공평한 분배나 경제적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다급하고 절실한 것은, 미국식 생활방식 혹은 근대문명의 본질을 근원적으로 묻고 그 너머를 내다볼 수 있는 급진적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는 한 우리는 저항하다고 하면서 실은 비인간적 체제의 영구화를 돕는 신민 혹은 노예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개안(開眼) 혹은 회심(回心)이다."

우석훈이 쓴 출산장려 정책에 대한 비판도 시사적이다. 출산률 저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핵심엔 건설업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박태견이 말한 건설족, 토건족이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아이들, 바로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의 아이들을 '노동력'으로 그것도 비정규직으로 기꺼이 노동을 제공할 그러한 노동력으로밖에 보지 않는 천박한 시대철학이다.....인간은 높은 교육비용을 지출해 사교육과 영어도시를 먹여 살리고 기꺼이 도시빈민의 삶을 받아들이고 비정규직으로 순종하면서 아낌없이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애들 많이 나라고 말하기 전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과 환경부터 만들어줘야 한다.

군사기지를 다룬 글에선 "안보전략에 있어서 가장 지혜로운 방법, 특히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고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현실 속에서 한국에게 가장 요구되는 지혜는 '불필요한 위협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제주 해군기지 논란에 반드시 적용해야 할 지혜다. 불필요한 위협을 만들지 않는 것.

서평에선 스치다 다카시의 <공생공빈>이라는 책에 대한 서평을 눈여겨 보았다. 언제 읽어봐야겠다. 공생공영이 아니다. 그건 무리라고 한다. 한정된 자연조건 안에서 그건 말이 안 된다. 망하지 않는 대신 성하지도 않는 공생공빈이야말로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삶. 사실 따지고 보면 그건 불편함이 아니다. 무지와 몽매 속에 '경제인간'으로 사는 게 오히려 더 불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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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6년 5~6월 - 통권 88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녹색평론>2006년 5-6월호(통권 88호)




책을 왜 읽는가? 좋아서. 물론 맞다. 그러면 그 '좋음'이란 건 또 뭔가. 어떨 때 좋은가?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때 좋다. 그것이 감성적인 것이든, 논리적인 것이든, 가치적인 것이든, 경제적 이권에 관한 것이든.

내가 <녹색평론>을 읽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하나의 신선한 자극으로 읽었다. 이것은 아니다 싶은 세상에 대해 하나의 다른 숨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참을 보니 버거웠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원론적이고 원칙적이고, 그랬다. 그래서 도망을 갔다. 어차피 내가 행하지도 못할 삶이라면 그런 글을 읽으며 가책을 느끼느니 피하자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다시 이 책을 잡았다. 그러고 나서부터 읽는 이유는 달라졌다. 강화다. 내 삶의 가치관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책을 읽으며 위로를 받는다. 그렇게 사는 게 옳다고 생각은 했지만, 늘 부담과 두려움으로만 오곤 했던 그런 생태적 삶, 그렇게 살겠다는 나의 의지를 다시 강화시켜 줄 수 있기에 읽는다. 이번 호도 마찬가지다. 사실 어찌 보면 항상 테마는 똑같다. 같은 말을 계속해서 책에 싣는 것이다. 그러니 진정 깨달은 자라면 책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 나처럼 의지가 약한 사람들만이 책을 정기구독하며 읽는 것이다. 왜? 약해지지 않기 위해서.

<프레시안> 기자 노주희의 글 '한미 FTA와 성장중독증'이 생태주의적 삶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 현안과 관련하며 생태주의적 가치관을 설득하고 있는 글이다. FTA가 가져올 재앙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지금도 우린 대충 넘어가고 있다. 나중에 피눈물 흘릴 날이 올 것임에도 말이다. 1910년 일본이 우리를 강제로 병합하던 것과 비슷한 효과가 날 것이라고 한다. 하긴 그때도 일본에 빌붙은 애들은 더 잘 살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민의 삶은 팍팍해져도 미국에 붙은 애들은 오히려 더 풍족하게 살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가 빼앗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풍족해진 친미파를 부러워하며 모두들 닮아가려고만 발버둥칠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 성장주의, 파이가 커진다라는 말에 과감히 무시할 수 있을 때, 참된 진보는 온다. "1인당 소득 3만 불 시대가 아니라 1인당 복지비 3천불 시대를 원해야 세상이 바뀐다. FTA로 벌어들일 돈보다 깨끗한 공기와 소박한 먹거리가 훨씬 더 소중하다고 말하는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용기"가 있어야만 새날은 온다. "한미 FTA를 제멋대로 추진하는 노무현이 나쁜 놈이라고 욕할 용기가 아니라, 마음속으로부터 돈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있어야 새 세상이 온다.

이 책의 첫 글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한 비판부터 시작한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 책의 저자들은 성장, 돈을 제1의 가치로 삼고 역사를 다시 서술했다. 그러다 보니 일제 강점기마저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돈을 벌게 해주고, 근대화를 당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근대화가 왜곡된 것이라는 가치는 무시한다. 그러기에 현재 성장주의자들은 일제 강점기를 욕할 수 없다. 그들이 원하는 가치관대로라면 말이다.

우석훈이 이정우 교수를 비판한 글도 읽을 만하다. 천규석이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책에 대해 이정우가 들뢰즈를 끌어들이며 비판했는데, 우석훈은 이것을 다시 비판한 것이다. 그는 그 비판에 앞서 상당히 겸손하게 시작한다. "후덕하지만 날카로운 논쟁이 아니라, 날은 섰지만 겉도는 논의들에 또 하나의 소음을 더하는 게 될 것" 같아 죄송스럽다고 말이다. 그러나 논지는 뚜렷하다. 물론 들뢰즈가 말하는 '노마디즘'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리고 그를 옹호하는 이정우 역시 그렇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들의 논의를 그대로 들이댈 만큼 한가한 게 아닌 것 같다. "개인의 유목이 정신적 자유로움과 자본으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일진대, 우리는 그것과는 정 반대다. "자본이 유목을 자신의 것으로 응용하고 활용하는 속도가 훨씬 더 빠르다." 그러기에 그 유목은 천규석의 말처럼 침략주의일 수밖에 없다. 자본은 훨씬 영악하고 빠르다. "생태관광이라는 이름으로, '농촌 어메니티'라는 이름으로" 그 유목성은 기만으로 다가온다. 진정한 유목성은 그 자본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현실에서의 그것은 자본의 유목만을 뜻할 뿐이다.

마을 축제도 마찬가지다. "마을 축제를, 지역공동체가 자신의 전통문화를 재생산하는 긍정적인 기회로 만들고 있는 유럽의 경우와는 달리 지금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천편일률적인 수많은 축제들....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잔혹함이 느껴질 뿐이다."

결국 '현대화의 해체'라는 글에서처럼 "기존의 틀에서 뛰쳐나와야만"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 대부분은 "이익이 이미 사상을 결정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부디 이름을 얻고, 방을 얻고 박사가 되기를 그래서 어디든지 가 강의비를 벌 수 있기를, 그것만이 그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나 중국이나 모두 비슷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가 지율 스님이 재판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선 절망과 함께 결단의 중요함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한 길을 가는 순간, 다른 한 길은 '가지 않는 길'이 될 것입니다. 엔젠가는 우리는 이야기하게 되겠지요. 두 길이 있었다고..... 과거로부터 날아와서 미래를 위해 출발하는 모든 선택의 순간 속에서 우리는 이 두 길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가 목적과 이해관계에 가려 사람에 대한 친밀함과 배려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청빈과 검약을 미덕으로 삼았던 것은 이익을 다투다가 명분과 도덕성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염치가 없어진 사회, 명분도 모두 이익에 녹아버린 사회에서 한 청정한 수도자가 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삶은 기적이다>라는 책에 대한 서평에서 옮긴다. "예술이건 교육이건 모두 얼마나 상품성이 있는지가 생존 경쟁력이 되고 있다. 정부도, 교육도, 종교도, 병원도 마치 기업조직처럼 변질되고, 규모의 성장과 이윤의 확대를 추구하게 되었다. 물론 기업들이 외치는 글로벌 경제라는 것이 이제는 상품이 아닌 돈을 생산해내는 것이며, 당연하게도 표토나 삼림이 줄어들어야 돈은 늘어나게 되어 있다......대학은 기업의 거간꾼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 ......효율성과 생산성만을 발전의 척도로 삼는다면 결국 우리는 영원히 새로운 시장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바꾸는 것이다. 패러다임을. 성장 중독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파이가 커지지 않아도 좋다는, 그런 마음을,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비난을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세상을 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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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6년 3~4월 - 통권 87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녹색평론> 2006년 3.4월호(통권 87호)




"아뇨,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아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소로우의 삶을 몸으로 살았던 아나키스트 애먼 헤나시(1970년 졸)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동안, 그렇게 해서 새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는 냉소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했다는 대답이라 한다.

추운 겨울의 광장 에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소박한 실천으로 그러나 더욱 힘있는 실천으로 생태 위기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 <녹색평론>은 희망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내게는 거의 유일한 복음의 메세지처럼 울리는 책이다. 이번 호 권두언에서 소개된 앞의 구절도 이런 나의 희망 찾기에 더욱 큰 따뜻한 기운을 불어 넣어 주었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말 그대로 미친듯이 불어대고 있다. 철도, 수도, 가스, 전기 등 공공재마저 효율성과 경제성이라는 명목으로 장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 속에서 비정규 노동자는 양산되고, FTA협상으로 농민들은 더 이상 물러설 땅을 잃고,
이처럼 '민중의 공유재'를 민영화, 상업화 하려는 자본과 국가권력의 로드맵에 대하여 투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제 밥그릇 지키기라는 비난에 몰린다. 언론이 갈 길을 잃은 탓이다. 솔직히 말하면 허황한 대의명분보다는 일용할 양식과 그 토대를 지키기 위한 그 밥그릇 싸움은 신성한 것이다.
"민중의 생존의 토대인 땅과 자연, 우리의 공동체를 모조리 재물의 신 앞에 '봉헌'하려고 하는 이 자본과 국가권력의 미친 '기관차'를 실제로 멈출 수 있는 것이 누군인가, 우리 사회의 자립, 자치와 공존의 길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도록" 그래야 한다.

이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바로 그 책 만드는 일을 통해 사회적 토론과 연대에 기여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여긴다. 나 역시 하나의 행동이 그런 토론과 연대에 기여할 수 있나를 되물어 본다. 그것은 무엇보다 "책임감과 확신을 가지고, 지치지 말고, 각자의 위치에 발을 딛고, 서로 대화하고 연대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주변의 냉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세상이 나를 바꾸지 못함을 삶으로 증거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의 책이라 다시 반가웠다.

이번 호는 무멋보다 노동연대, 농민운동의 방향 전환 등이 주된 테마였다. 화학농으로 싸움을 계속해봐야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 이제 시민은 농민운동에 대해 철지난 가엾은 노인들의 한탄으로만 여긴다고 한다. 그러나 제대로된 도농연대라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고 한다. 아니 도농연대라기 보단 사회적 연대라는 말이 맞겠다. 여기서 시민발전 대표 박승옥의 글은 아프지만 정확하다. 그의 지적대로 연대를 위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그 실천을 통해 미국의 부당한 간섭에도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대안 중 하나인 유기농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관점이 필요하다. 유기농이라 하더라도 자본에 포섭된 유기농은 이미 유기농이 아니다. 지역 직거래라야만이 친환경이 된다. 기업의 자본에 의해 연변에서 유기농으로 재배되고 그것이 국내로 들어오 소비자에게 웰빙의 형태로 소비된다면, 그것은 반생태적 자본농일 뿐이다. 유기농은 유통비용을 줄이고 화석연료 사용을 그 만큼 적게 하면서 지역 내 자치와 자립을 통한 것이라야 한다. 이것은 천규석의 주장인데 백 번 옳다. 바나나 포도 등 수입 농산물을 먹지 않는 것부터 실천해야 겠다.

이승렬의 글은 이슬람 문화권의 소외에 대한 바른 시각을 제공한다. "유럽의 공포는 사실 이질적 문화가 확산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인들이 두려워 한다는 말의 참 뜻은 유럽의 근대체제 내에 형성된 내부 식민지의 백성들을 노동력으로 부리되, 이들이 집단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정치적 힘을 키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파렴치하면서도 부질없는 조바심을 내고 있다는 데에 있다.
노동력을 착취하고 착취한 만큼 멸시하지만, 억업과 멸시의 끝은 결국 지배자가 감내해야 할 몫으로 남는 법이다." 최근 프랑스 호들갑의 본질을 그는 잘 설명해 주었다.

이계삼의 글에선 최근 아픔에 대한 공감이 빠진 <한겨레>기사에 대한 섭섭함이 표현되어 있다. 나 역시 요즘 한겨레를 읽으면서 그런 감정을 가지곤 했다. 특히 지율의 단식에 대해 그를 극단주의로 모는 칼럼을 볼 땐 심기가 많이 불편했다.

얼마 전 타계한 친구이기도 한 김경률 감독에 대한 글 마지막에 인용된 시구절이 다가온다.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라는 말.

김재형의 글에서 나오는 한자 풀이, 자비로울 慈는 풀 초와 마음심이 이어져 있는 모습인데, 바로 풀(자연)과 사람이 이어질 때 자비와 사랑이 나오는 것이라 한다.
슬플 悲는 마음이 이니다 이기 때문에 단순히 슬프다 수준이 아니라, 안타깝고,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농민들의 처지를 보면 그런 글자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김완진이라는 사람이 쓴 '생태적으로 산다는 것'에선 선각자의 아픔을 볼 수 있다. 가족과의 갈등이 잘 드러나 있다. '생태적 삶의 가치와 행복'을 가지고 '돈의 가치와 위력'을 대화 속에서 녹여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의 시선으론 철 없는 몽상가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생명과 자연에 대한 파괴" 끝이 없다.

서평에 소개된 우희종의 <생명과학과 선>이라는 책에 관심이 간다. 이제 곧 그 책을 사서 봐야겠다. "생명체는 반드시 죽어 그 개체가 소실되는 과정을 겪게 되다. 죽음은 곧 욕망이 소진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의 속성에 집착하고 있기에 생명체는 지금 살아있다는 현상에 집착하게 되어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태어나고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닌 또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고 현재의 삶만 고집함으로써 결국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생명과학의 구조에 속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나에 대한 이해를 갖지 못하고, 나의 껍데기인 육체에만 집착하여 나를 잘못 규정하는 생명과학과 같은 지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삶과 죽음에 바로 서지 못하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표면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지 말고 욕망을 잉태하는 마음의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
"몸이라는 육근에 길들여지지 않은 생명의 '본'자리는 끝없이 펼쳐진 열린 세계 속에 있는 것이다."
"선을 통하여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체가 연기적 관계 속에서 빚어져 생겨나고 태어난 것은 질서이며 이것은 반드시 안정된 무질서인 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됨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소멸된 것은 원인에 의해 상호작용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될 때, 인간을 생명체의 '생명연장'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즉 인연으로 받은 몸을 갈 때까지 잘 관리하여 사용하다가 때가 되면 좋게 제 갈 곳으로 돌려 줄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갖추어질 때, 자신과의 모든 인연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상(相)ㅇ으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속는 줄 알면서 속아주는 마음으로 일상의 희노애락 속에서도 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연기적 인과에 따라 가고 옴에 있어서조차 조금도 두려움 없이 작은 미소를 띨 수 있는 마음의 평정심을 찾을 때, 거기에는 진정한 관용과 사랑이 나타난다."

늘 그랬지만 시커먼 어둠 속에서 빛을 보는 심정이다. 특히 이번 호 권두언에 실린 에먼 헤나시라는 사람, 그가 보여준 낙천적이면서도 굴하지 않는 삶의 태도에 많은 감동을 받는다. 지치지 말고 가야겠다
"서두르지 마라, 그러나 쉬지도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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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다카기 진자부로 지음, 김원식 옮김 / 녹색평론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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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기 진자부로/ 김원식 옮김, <지금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 녹색평론사, 2006.




책 읽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 책을 번역한 사람부터 이야기해야 되겟다. 김원식이라는 사람. 처음 듣는 사람이다. 근데, 책 마지막 옮긴이의 글 제일 끝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원자력 폐기물 처리를 둘러싼 최근의 작태, 새만금과 천성산에서 발악하고 있는 개발망령들은 아직도 제정신을 못 차리고 묘혈(지구멸망)을 파고 있다. 내 나이 어느덧 80을 넘었지만 나는 앞날을 똑바로 바라보고, 오늘도 자본주의와 싸우려고 한다."
80을 넘은 노인이다. 근데 그가 '앞날을 똑바로 바라보고 오늘도 자본주의와 싸우겠다고'고 한다.
책 뒷표지 안에 있는 약력을 보았다. "현재 아나키즘에 기반한 반전, 평화운동 등 여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라고 나와 있다.
머리 숙인다.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다 본다.

본래 이 책을 쓴 것은 1985년이라고 한다. 그 후 증보를 한 게1998년이라고 한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래서인가 조금은 식상한 내용이다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1985년에 이미 사태를 예측한 것이다. 그가 이 책을 쓰자마자 체르노빌 사건이 터졌다. 그러니 식상이 아니라 선지적 지식이었던 셈이다.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제목 그대로 이것이 이 책의 핵심적 질문이다. 그리고 답은 자연을 인간보다 밑에 놓지 말라는 것이다. 자연 속의 인간이지, 자연 위에 인간이 아니라는 얘기다.
"자연계에서 인간의 위치를 철저하게 상대화하고, 근대의 인간을 인간답게 했다고 여겨진 인간지성의 절대적 보편성(또는 다른 자연에 대한 우위)을 버리자는 것이 에콜로지즘의 본질인 것이다."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 산자락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볼 때의 자연, 이것은 시인의 자연이다. 그러나 천체운행을 설명할 때의 자연은 과학자의 자연이다. 둘 다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후자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회복이 필요하다.

근데 사실 책이 좀 어려웠다. 집중해서 읽지 않고 들고 다니며 읽어서 그랬는지 잘 들어오지 않은 대목이 많았다. 게다가 책의 처음엔 고대 서양철학의 자연관부터 다뤘다. 그랬으니 내가 좀 헤맸을 수밖에.

특이한 해석을 보였던 게 프로메테우스 신화였다. 그는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주었다. 그래서인가 지금까지 그 신화에 대한 해석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 개척을 상징했다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영웅이고 제우스는 악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다카기 진자부로는 다른 해석을 내린다. 제우스가 그를 벌 주었던 것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적 문화와 테크놀로지의 대립이라고 말한다.

이후 자연은 점차 로고스가 되었다. 감성과 직관은 사라지고 오직 단순한 논리만이 중시되었다. 한 예를 보자.
태양이 왜 가라앉는가를 물으면 그것은 지구의 자전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답이 아니다. 어떻게를 답했을 뿐, 왜에 대해서는 아직 말한 게 아니다. 왜 자전하는가. 우린 이쯤되면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 그러고서도 우리는 로고스를 말한다. 아 허약한 로고스여.

소위 지속가능한 개발에 대해서도 말을 한다. 이 말은 본래 부르트란트위원회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 사고다. 출구가 없는 임시 방편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구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대해야 한다. 열려있는 생명 시스템으로서의 지구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근본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지구환경문제는 말이 잘못되었다고 한다. 지구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문제라는 것이다. 환경에 문제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중심적 사고의 결과다. 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문제에 핵심에 서 있다. 인간 중심을 벗어나야 한다. 환경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인간이 잘못을 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환경문제라고 한다니, 그의 지적이 옳다.

특히 이런 자세는 생태주의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경종이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태주의가 항상 어깨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선 것 같은 이른바 '전투적 생태주의'로만 존재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본질적으로 더 자유롭고 더 자연스러운 정신과 신체의 존재양식의 지평일 것이다.

언젠가 이 책을 읽고 평을 썼던 최성각이 인용했던 구절을 여기 다시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우리 대지 위에 사는 사람들 모습과 이 풍경이 허물어지고 죽어가는데, 또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반인간적인 정경, 그 하나하나에서 들녘을 달리는 신(神)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놈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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