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녹색평론 2006년 5~6월 - 통권 88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녹색평론>2006년 5-6월호(통권 88호)

책을 왜 읽는가? 좋아서. 물론 맞다. 그러면 그 '좋음'이란 건 또 뭔가. 어떨 때 좋은가?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때 좋다. 그것이 감성적인 것이든, 논리적인 것이든, 가치적인 것이든, 경제적 이권에 관한 것이든.
내가 <녹색평론>을 읽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하나의 신선한 자극으로 읽었다. 이것은 아니다 싶은 세상에 대해 하나의 다른 숨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참을 보니 버거웠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원론적이고 원칙적이고, 그랬다. 그래서 도망을 갔다. 어차피 내가 행하지도 못할 삶이라면 그런 글을 읽으며 가책을 느끼느니 피하자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다시 이 책을 잡았다. 그러고 나서부터 읽는 이유는 달라졌다. 강화다. 내 삶의 가치관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책을 읽으며 위로를 받는다. 그렇게 사는 게 옳다고 생각은 했지만, 늘 부담과 두려움으로만 오곤 했던 그런 생태적 삶, 그렇게 살겠다는 나의 의지를 다시 강화시켜 줄 수 있기에 읽는다. 이번 호도 마찬가지다. 사실 어찌 보면 항상 테마는 똑같다. 같은 말을 계속해서 책에 싣는 것이다. 그러니 진정 깨달은 자라면 책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 나처럼 의지가 약한 사람들만이 책을 정기구독하며 읽는 것이다. 왜? 약해지지 않기 위해서.
<프레시안> 기자 노주희의 글 '한미 FTA와 성장중독증'이 생태주의적 삶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다. 현안과 관련하며 생태주의적 가치관을 설득하고 있는 글이다. FTA가 가져올 재앙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지금도 우린 대충 넘어가고 있다. 나중에 피눈물 흘릴 날이 올 것임에도 말이다. 1910년 일본이 우리를 강제로 병합하던 것과 비슷한 효과가 날 것이라고 한다. 하긴 그때도 일본에 빌붙은 애들은 더 잘 살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민의 삶은 팍팍해져도 미국에 붙은 애들은 오히려 더 풍족하게 살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가 빼앗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풍족해진 친미파를 부러워하며 모두들 닮아가려고만 발버둥칠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 성장주의, 파이가 커진다라는 말에 과감히 무시할 수 있을 때, 참된 진보는 온다. "1인당 소득 3만 불 시대가 아니라 1인당 복지비 3천불 시대를 원해야 세상이 바뀐다. FTA로 벌어들일 돈보다 깨끗한 공기와 소박한 먹거리가 훨씬 더 소중하다고 말하는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용기"가 있어야만 새날은 온다. "한미 FTA를 제멋대로 추진하는 노무현이 나쁜 놈이라고 욕할 용기가 아니라, 마음속으로부터 돈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있어야 새 세상이 온다.
이 책의 첫 글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한 비판부터 시작한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 책의 저자들은 성장, 돈을 제1의 가치로 삼고 역사를 다시 서술했다. 그러다 보니 일제 강점기마저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돈을 벌게 해주고, 근대화를 당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근대화가 왜곡된 것이라는 가치는 무시한다. 그러기에 현재 성장주의자들은 일제 강점기를 욕할 수 없다. 그들이 원하는 가치관대로라면 말이다.
우석훈이 이정우 교수를 비판한 글도 읽을 만하다. 천규석이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책에 대해 이정우가 들뢰즈를 끌어들이며 비판했는데, 우석훈은 이것을 다시 비판한 것이다. 그는 그 비판에 앞서 상당히 겸손하게 시작한다. "후덕하지만 날카로운 논쟁이 아니라, 날은 섰지만 겉도는 논의들에 또 하나의 소음을 더하는 게 될 것" 같아 죄송스럽다고 말이다. 그러나 논지는 뚜렷하다. 물론 들뢰즈가 말하는 '노마디즘'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리고 그를 옹호하는 이정우 역시 그렇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들의 논의를 그대로 들이댈 만큼 한가한 게 아닌 것 같다. "개인의 유목이 정신적 자유로움과 자본으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을 획득"하는 것일진대, 우리는 그것과는 정 반대다. "자본이 유목을 자신의 것으로 응용하고 활용하는 속도가 훨씬 더 빠르다." 그러기에 그 유목은 천규석의 말처럼 침략주의일 수밖에 없다. 자본은 훨씬 영악하고 빠르다. "생태관광이라는 이름으로, '농촌 어메니티'라는 이름으로" 그 유목성은 기만으로 다가온다. 진정한 유목성은 그 자본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현실에서의 그것은 자본의 유목만을 뜻할 뿐이다.
마을 축제도 마찬가지다. "마을 축제를, 지역공동체가 자신의 전통문화를 재생산하는 긍정적인 기회로 만들고 있는 유럽의 경우와는 달리 지금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천편일률적인 수많은 축제들....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잔혹함이 느껴질 뿐이다."
결국 '현대화의 해체'라는 글에서처럼 "기존의 틀에서 뛰쳐나와야만"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 대부분은 "이익이 이미 사상을 결정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부디 이름을 얻고, 방을 얻고 박사가 되기를 그래서 어디든지 가 강의비를 벌 수 있기를, 그것만이 그들이 사는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나 중국이나 모두 비슷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가 지율 스님이 재판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선 절망과 함께 결단의 중요함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한 길을 가는 순간, 다른 한 길은 '가지 않는 길'이 될 것입니다. 엔젠가는 우리는 이야기하게 되겠지요. 두 길이 있었다고..... 과거로부터 날아와서 미래를 위해 출발하는 모든 선택의 순간 속에서 우리는 이 두 길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가 목적과 이해관계에 가려 사람에 대한 친밀함과 배려를 잃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청빈과 검약을 미덕으로 삼았던 것은 이익을 다투다가 명분과 도덕성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염치가 없어진 사회, 명분도 모두 이익에 녹아버린 사회에서 한 청정한 수도자가 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삶은 기적이다>라는 책에 대한 서평에서 옮긴다. "예술이건 교육이건 모두 얼마나 상품성이 있는지가 생존 경쟁력이 되고 있다. 정부도, 교육도, 종교도, 병원도 마치 기업조직처럼 변질되고, 규모의 성장과 이윤의 확대를 추구하게 되었다. 물론 기업들이 외치는 글로벌 경제라는 것이 이제는 상품이 아닌 돈을 생산해내는 것이며, 당연하게도 표토나 삼림이 줄어들어야 돈은 늘어나게 되어 있다......대학은 기업의 거간꾼 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 ......효율성과 생산성만을 발전의 척도로 삼는다면 결국 우리는 영원히 새로운 시장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바꾸는 것이다. 패러다임을. 성장 중독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파이가 커지지 않아도 좋다는, 그런 마음을,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비난을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세상을 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