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06년 3~4월 - 통권 87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녹색평론> 2006년 3.4월호(통권 87호)




"아뇨,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아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소로우의 삶을 몸으로 살았던 아나키스트 애먼 헤나시(1970년 졸)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동안, 그렇게 해서 새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는 냉소적인 질문을 받았을 때 했다는 대답이라 한다.

추운 겨울의 광장 에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소박한 실천으로 그러나 더욱 힘있는 실천으로 생태 위기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 <녹색평론>은 희망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내게는 거의 유일한 복음의 메세지처럼 울리는 책이다. 이번 호 권두언에서 소개된 앞의 구절도 이런 나의 희망 찾기에 더욱 큰 따뜻한 기운을 불어 넣어 주었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말 그대로 미친듯이 불어대고 있다. 철도, 수도, 가스, 전기 등 공공재마저 효율성과 경제성이라는 명목으로 장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 속에서 비정규 노동자는 양산되고, FTA협상으로 농민들은 더 이상 물러설 땅을 잃고,
이처럼 '민중의 공유재'를 민영화, 상업화 하려는 자본과 국가권력의 로드맵에 대하여 투쟁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제 밥그릇 지키기라는 비난에 몰린다. 언론이 갈 길을 잃은 탓이다. 솔직히 말하면 허황한 대의명분보다는 일용할 양식과 그 토대를 지키기 위한 그 밥그릇 싸움은 신성한 것이다.
"민중의 생존의 토대인 땅과 자연, 우리의 공동체를 모조리 재물의 신 앞에 '봉헌'하려고 하는 이 자본과 국가권력의 미친 '기관차'를 실제로 멈출 수 있는 것이 누군인가, 우리 사회의 자립, 자치와 공존의 길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도록" 그래야 한다.

이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바로 그 책 만드는 일을 통해 사회적 토론과 연대에 기여하는 것을 스스로의 임무로 여긴다. 나 역시 하나의 행동이 그런 토론과 연대에 기여할 수 있나를 되물어 본다. 그것은 무엇보다 "책임감과 확신을 가지고, 지치지 말고, 각자의 위치에 발을 딛고, 서로 대화하고 연대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주변의 냉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세상이 나를 바꾸지 못함을 삶으로 증거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의 책이라 다시 반가웠다.

이번 호는 무멋보다 노동연대, 농민운동의 방향 전환 등이 주된 테마였다. 화학농으로 싸움을 계속해봐야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 이제 시민은 농민운동에 대해 철지난 가엾은 노인들의 한탄으로만 여긴다고 한다. 그러나 제대로된 도농연대라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고 한다. 아니 도농연대라기 보단 사회적 연대라는 말이 맞겠다. 여기서 시민발전 대표 박승옥의 글은 아프지만 정확하다. 그의 지적대로 연대를 위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그 실천을 통해 미국의 부당한 간섭에도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대안 중 하나인 유기농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관점이 필요하다. 유기농이라 하더라도 자본에 포섭된 유기농은 이미 유기농이 아니다. 지역 직거래라야만이 친환경이 된다. 기업의 자본에 의해 연변에서 유기농으로 재배되고 그것이 국내로 들어오 소비자에게 웰빙의 형태로 소비된다면, 그것은 반생태적 자본농일 뿐이다. 유기농은 유통비용을 줄이고 화석연료 사용을 그 만큼 적게 하면서 지역 내 자치와 자립을 통한 것이라야 한다. 이것은 천규석의 주장인데 백 번 옳다. 바나나 포도 등 수입 농산물을 먹지 않는 것부터 실천해야 겠다.

이승렬의 글은 이슬람 문화권의 소외에 대한 바른 시각을 제공한다. "유럽의 공포는 사실 이질적 문화가 확산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인들이 두려워 한다는 말의 참 뜻은 유럽의 근대체제 내에 형성된 내부 식민지의 백성들을 노동력으로 부리되, 이들이 집단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정치적 힘을 키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파렴치하면서도 부질없는 조바심을 내고 있다는 데에 있다.
노동력을 착취하고 착취한 만큼 멸시하지만, 억업과 멸시의 끝은 결국 지배자가 감내해야 할 몫으로 남는 법이다." 최근 프랑스 호들갑의 본질을 그는 잘 설명해 주었다.

이계삼의 글에선 최근 아픔에 대한 공감이 빠진 <한겨레>기사에 대한 섭섭함이 표현되어 있다. 나 역시 요즘 한겨레를 읽으면서 그런 감정을 가지곤 했다. 특히 지율의 단식에 대해 그를 극단주의로 모는 칼럼을 볼 땐 심기가 많이 불편했다.

얼마 전 타계한 친구이기도 한 김경률 감독에 대한 글 마지막에 인용된 시구절이 다가온다.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라는 말.

김재형의 글에서 나오는 한자 풀이, 자비로울 慈는 풀 초와 마음심이 이어져 있는 모습인데, 바로 풀(자연)과 사람이 이어질 때 자비와 사랑이 나오는 것이라 한다.
슬플 悲는 마음이 이니다 이기 때문에 단순히 슬프다 수준이 아니라, 안타깝고, 이건 아니다 싶은 마음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농민들의 처지를 보면 그런 글자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김완진이라는 사람이 쓴 '생태적으로 산다는 것'에선 선각자의 아픔을 볼 수 있다. 가족과의 갈등이 잘 드러나 있다. '생태적 삶의 가치와 행복'을 가지고 '돈의 가치와 위력'을 대화 속에서 녹여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의 시선으론 철 없는 몽상가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생명과 자연에 대한 파괴" 끝이 없다.

서평에 소개된 우희종의 <생명과학과 선>이라는 책에 관심이 간다. 이제 곧 그 책을 사서 봐야겠다. "생명체는 반드시 죽어 그 개체가 소실되는 과정을 겪게 되다. 죽음은 곧 욕망이 소진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의 속성에 집착하고 있기에 생명체는 지금 살아있다는 현상에 집착하게 되어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태어나고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닌 또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고 현재의 삶만 고집함으로써 결국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생명과학의 구조에 속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나에 대한 이해를 갖지 못하고, 나의 껍데기인 육체에만 집착하여 나를 잘못 규정하는 생명과학과 같은 지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삶과 죽음에 바로 서지 못하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표면적인 방법으로 접근하지 말고 욕망을 잉태하는 마음의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
"몸이라는 육근에 길들여지지 않은 생명의 '본'자리는 끝없이 펼쳐진 열린 세계 속에 있는 것이다."
"선을 통하여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체가 연기적 관계 속에서 빚어져 생겨나고 태어난 것은 질서이며 이것은 반드시 안정된 무질서인 소멸을 향해 나아가게 됨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소멸된 것은 원인에 의해 상호작용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될 때, 인간을 생명체의 '생명연장'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즉 인연으로 받은 몸을 갈 때까지 잘 관리하여 사용하다가 때가 되면 좋게 제 갈 곳으로 돌려 줄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갖추어질 때, 자신과의 모든 인연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상(相)ㅇ으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속는 줄 알면서 속아주는 마음으로 일상의 희노애락 속에서도 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연기적 인과에 따라 가고 옴에 있어서조차 조금도 두려움 없이 작은 미소를 띨 수 있는 마음의 평정심을 찾을 때, 거기에는 진정한 관용과 사랑이 나타난다."

늘 그랬지만 시커먼 어둠 속에서 빛을 보는 심정이다. 특히 이번 호 권두언에 실린 에먼 헤나시라는 사람, 그가 보여준 낙천적이면서도 굴하지 않는 삶의 태도에 많은 감동을 받는다. 지치지 말고 가야겠다
"서두르지 마라, 그러나 쉬지도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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