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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06년 7~8월 - 통권 89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녹새평론> 2006년 7-8월호(통권89호)

김종철 선생님의 '책을 내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는 좋은 글이지만, 이번 호에선 무엇보다 이계삼 선생님의 글 하나 하나가 나를 다잡게 했다. 언제부터인가 <녹색평론>에서 본 이계삼 선생님의 글은 늘 나를 긴장케 했고 삶의 의미를 다시 묻게 했지만, 이번 호에 실린 글은 더더욱 나를 또박또박 한 구절씩 읽게 해줬다.
'경남 밀양 밀성교 교사'라고만 소개가 된다. 그러나 나는 그 분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겠다. 언젠가 양동기 선생님도 그 분 말을 했다. 이 책에 실린 글 중에 참 좋은 글이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런 좋은 글은 기교에서 나오지 않는다. 삶에서 나온다. 같이 아파하고 책임지려는, 그런 진한 노력에서 나온다. 그래서 힘이 있는 것이다.
이번 글은 천성산 소송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문을 보고서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쓴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짐작은 했다고 한다. 그러나 판결문의 내용은 너무도 참담한 것이어서 수용과는 무관하게 펜을 들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죄 없는 그 시절의 시 한 구절부터 시작했다. 그러더니 2006년 한국의 월드컵 현상으로 글을 옮긴다. "어디서도 풀어낼 수 없었던 한국 사람들의 공격적인 욕망, 분출의 충동, 그 고단한 삶의 응어리들이 터뜨려질 순간을 위해 몇 날 몇밤을 숨죽이며 기다렸다가 이제 스스로 풀이 죽어버렸다. 실로 가련한 축제였다." 동의한다. 그 '가련한 축제'라는 말에 대해.
"세상은 24시간 내내 끓어오르는 대낮 같다. 무언가 차분하게 가라앉을 순간은 좀처럼 찾아들 것 같지 않다. 이 가속의 질주를 잊을 수 있는 길은 더한 가속의 질주밖에 없다는 듯 대한민국은 욕망의 과잉, 정치의 과잉, 다툼의 과잉, 무어든 과잉으로 넘쳐 오른다."
"불의는 외면하되, 불이익에는 목숨을 거는 것이 꼿꼿한 상식이 되었다. 그래서 가치로운 것들은 패배하고, 힘없고 약한 것들은 뿌리뽑히고 죽임당한다. 2006년 이 시간, 대한민국은 아타깝고 추하다."
특히 이 대목에선 나까지 그저 말 없이 먹먹하게 있어야 했다. 추한 대한민국의 2006년.
그는 그 추함의 절정을 어쩌면 천성산 대법원 결정문에서 보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마음을 많이 다스렸다. "세상의 폭력은 같은 크기의 폭력으로 결코 잦아들지 않으며, 이 세상을 넘어서려는 열정은 사회공학적 시스템이 아니라 오직 '사랑'과 '희생'의 가치를 향해 바쳐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는 자신의 각성을 써 넣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유물론자의 자의식을 일찌감치 버렸다"라고 한다. "장 지오노가 묘사한 나무를 심은 사람처럼 사랑과 희생에 바탕한 반복된 행동-뿌리내림만이 유일한 노선이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그였지만 이번에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나 보다. 물론 천성산에 지율 스님이 매달릴 때부터 그는 그 스님의 육성과 몸짓, 태도 속에서 "간절한 사랑과 희생의 열기를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자식을 감옥이나 사지로 내보낸 어머니의 다급하고도 절절한 마음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는 그의 결론, 사랑과 희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스님의 고행에는 이 세상에 넘쳐나는 폭력과 맹목들을 '어쩔 수 없다'고 용인하면서 내심 세상의 타락을 즐기며 살아온 우리들 모두의 죄의 업연이 서려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라고 말한다.
그 대법원 판결의 주심이 김영란이어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 김영란은 꽤나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법관으로 알려져 있다. 강지원 변호사의 부인이다. "물론 나는 이분들에 대한 개인적인 유감이 없다. 한국사회의 법정신, 환경문제를 대하는 우리 법조계의 습속, 그리고 최고위급 법관들의 일반적인 멘탈리티 따위를 생각한다면 이 분들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시민의 시선으로 이 판결 과정과 결정문을 유심히 살핀다면 참담해질 수밖에 없다........오직 법관의 재판만이 효력을 가지는 것을 시민들이 그들 법관에게 판단의 권능을 위임했기 때문이다.........현대의 법은 다만 현대세계의 힘의 질서를 반영할 뿐이다.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그들의 행위-법의 해석과 적용-가 실제 세계에서 갖는 구체적인 의미를 따져보는 일종의 가치론적인 성찰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어진 사실 중에서 결론에 필요한 것만 고르고 그것을 형식논리에 맞게 퍼즐처럼 짜맞춘 것이 이른바 판결이 아닌가. 그러므로 판결들은 인간의 성찰과 고뇌의 산물이라기보다 대개 판결 기계가 어슷비슷하게 찍어내는 복제 품처럼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 세계의 압도적인 힘의 질서가 화인처럼 박혀있다."
그렇게 그는 판결문을 보며 참담한 마음을 써 내려갔다. 우리사회 법관들의 기본적 사고가 이 정도라는 것에 크게 절망했던 모양이다.
이 대목에선 김종철의 서문에 쓰인 '국가'에 대한 견해를 떠올리게 한다. "국가란 무엇일까. 근대국가란 본질적으로 폭력에 기초해 있고, 또 폭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지적. 그러면서 그는 또 "국익은 과연 누구의, 무엇을 위한 국익인가라는 좀 더 근원적인 질문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누구를 위한 한미 FTA인지, 누구를 위한 새만금인지, 누구를 위한 천성산 관통도로인지, 맑스의 말대로 국가는 '지배계급의 위원회'일 뿐이다. 대법원의 판결 역시 그 맥락을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계삼 선생님이 고통스럽게 이야기 하는 사랑과 희생 외에는 방법이 없다. 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이다.
그들의 사고는 무엇에 맞춰져 있을까? "경제적 효용성"이다. "비인간적인 체제일망정 거기에 경제적인 효율성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순수한 학문적인 관심의 표명이라고 하기 어려운 '경제인간'으로서의 그들 나름의 약육강식적 인간관"을 보여줄 뿐이다.
이건 우리사회의 진보 역시 그렇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사회 역시 진보가 비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김종철 선생은 말한다. "부의 공평한 분배나 경제적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다급하고 절실한 것은, 미국식 생활방식 혹은 근대문명의 본질을 근원적으로 묻고 그 너머를 내다볼 수 있는 급진적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는 한 우리는 저항하다고 하면서 실은 비인간적 체제의 영구화를 돕는 신민 혹은 노예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개안(開眼) 혹은 회심(回心)이다."
우석훈이 쓴 출산장려 정책에 대한 비판도 시사적이다. 출산률 저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핵심엔 건설업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박태견이 말한 건설족, 토건족이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아이들, 바로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의 아이들을 '노동력'으로 그것도 비정규직으로 기꺼이 노동을 제공할 그러한 노동력으로밖에 보지 않는 천박한 시대철학이다.....인간은 높은 교육비용을 지출해 사교육과 영어도시를 먹여 살리고 기꺼이 도시빈민의 삶을 받아들이고 비정규직으로 순종하면서 아낌없이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애들 많이 나라고 말하기 전에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과 환경부터 만들어줘야 한다.
군사기지를 다룬 글에선 "안보전략에 있어서 가장 지혜로운 방법, 특히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고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현실 속에서 한국에게 가장 요구되는 지혜는 '불필요한 위협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제주 해군기지 논란에 반드시 적용해야 할 지혜다. 불필요한 위협을 만들지 않는 것.
서평에선 스치다 다카시의 <공생공빈>이라는 책에 대한 서평을 눈여겨 보았다. 언제 읽어봐야겠다. 공생공영이 아니다. 그건 무리라고 한다. 한정된 자연조건 안에서 그건 말이 안 된다. 망하지 않는 대신 성하지도 않는 공생공빈이야말로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삶. 사실 따지고 보면 그건 불편함이 아니다. 무지와 몽매 속에 '경제인간'으로 사는 게 오히려 더 불편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