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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꿈꾼 시대 - 육성으로 듣는 열정의 20세기
장석준 지음 / 살림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Another world is possible
장석준 쓰고 엮음, <혁명을 꿈꾼 시대>, 살림, 2007.
혁명가들의 육성을 들려준 책이다. 20세기 혁명가. 헨렌 켈러에서부터 우고 차베스에 이르기까지. 20세기와 21세기의 대화 형식을 빌고, 또 그 혁명가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 뒤에 그들의 연설문을 모았다. 연설문이라 직접적이라는 맛이 있어서 좋았고, 또 생소함을 덜어주기 위한 해설도 좋았다. 무엇보다 이 책 하나가 그대로 20세기 세계사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세계사 보충 교재로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연설문 중 일부는 보편성보다 그 상황의 특수성이 많아 이해가 어려운 곳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흠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일 수 있다. 더 많은 이해를 요구했으니까.
테마는 전쟁, 자본주의, 제국주의, 인종주의, 파시즘, 남성중심 사회, 자본의 세계화를 넘어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연설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새로운 지향이 그래도 우리 인류를 야만 단계에서 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어쩌면 여전히 그들의 꿈이 실현된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야만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다른 세상’을 꿈꾼다. 그 꿈이 있기에 나 역시 지금까지 숨을 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늘 무너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이 구절을 떠올린다. 2001년 세계사회포럼에서 외쳤다는 그 구호, “Another world is possible", 물론 그 다른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른다. 여전히 모색 중이다. 다만 지금 이대로라면 절멸뿐이다. 그러니 경쟁이 아니라 협력 밖에 방법은 없다. 가능할 것인지는 따로 묻지 않는다. 가능하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옳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우고 차베스의 연설에서 “보건, 교육, 물, 에너지, 대중교통, 이런 공공서비스를 사적 자본의 탐욕에 넘겨선 안 됩니다. 이건 민중의 권리를 부정하는 짓이에요. 이건 노예제로 가는 길입니다. 자본주의는 노예제도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대로 우리 현실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인 사회재마저 자본주의에 맡기면 파멸이다. 노예화 밖에 남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말대로 사회주의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자본주의의 병폐는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극복은 ‘우리’라는 경계 짓기로는 어림없어 보인다. 경계를 지으면 필연적으로 경쟁을 한다. 물론 연대를 전제로 한 자연스러운 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민족으로 인종으로 뭉치면 이는 재앙이다.
그래서인가 헬렌 켈러의 목소리가 다가온다. 우리는 헬렌 켈러를 시각과 청각을 잃은 난관 속에서 훌륭한 사회사업가로 성장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의 활동이 사실은 더욱 주목받을 만 하다. 그는 미국의 혁명적 좌파였다. 그는 기독교도이면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제게는 세계 전체가 저의 조국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전쟁도 제게는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같은 민중끼리 서로 죽이는 동족상잔의 공포로 다가옵니다. 저는 인류의 형제애와 만인이 만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애국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싸움은 세계가 자유와 정의 그리고 만인의 풍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싸움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까? 조국의 독립? 이건 지배자 자신들만의 독립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더 나은 생활조건을 요구할 때 여러분을 감옥에 처넣는 그 법을 위해? 아니면 國旗? 그 깃발이 여러분이 충분히 자유를 누리며 가정을 꾸리는 그런 나라의 깃발입니까? 혹시 그 깃발이 여러분이 임금 상승과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파업투쟁을 할 때 주먹질을 퍼붓는 그런 나라의 상징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살인 명령을 받았을 때조차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지배자들의 종교를 위해 싸우고 싶은 겁니까?”라며 국가주의를 비판한다. 전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도 같은 맥락의 발언을 한다. “저는 한 명의 영국인이 아니라, 또 한 명의 유럽인, 서방 민주주의 진영에 속한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인류의 일원, 앞으로도 과연 존속할지 의문스런 인간이라는 종의 일원으로 발언하겠습니다”라고 한다.
빌리 브란트,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만행을 공식으로 사과하고 유태인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던 독일 총리다. 그 역시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최후의 무리수입니다”라며 국가간의 갈등을 경계한다. 모두 평화를 향한 발언들이다.
살바도르 아옌데의 마지막 라디오 연설은 가슴을 쥐게 만든다. 죽음에 임박한 절절한 육성이어서 그럴 것이다. “반역자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려는 이 암울하고 가혹한 순간을 딛고 일어서 또 다른 사람들이 전진할 것”이며 “저는 저의 희생이 헛되지 않으리란 것을 확신합니다. 결국에는 제가 대역죄인과 비겁자 그리고 반역자를 심판할 도덕적 교훈이 될 것임일 확신합니다.”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였다. 나머지는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저자는 인도의 간디도 책에 넣었다. 그러면서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발언을 인용한다. ‘21세기 새로운 진보정치의 구성과 그 가능성을 위해선 아마도 레닌과 간디의 만남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구체성은 없지만 대략적인 방향만은 분명 맞다. 간디의 비폭력, 다시 들어도 구구절절 공감하게 만든다. “폭력적인 비협력은 악을 증가시킬 뿐임을, 악이 폭력을 통해서만 지탱할 수 있는 것처럼 악에 대한 지지 철회는 폭력의 완전한 자제를 요구하는 것”이라 한다.
반대로 딱지 붙이기로 타자화하여 억압하던 그 ‘인민의 적’이라는 개념도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 사회엔 영화 제목으로 ‘공공의 적’이라는 표현도 유행했다. 어쨌거나 그런 대상으로 찍히면 철저히 배제된다. 도덕의 이름으로. 근데 그 개념은 스탈린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꿈꾸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제시 잭슨의 말이 아니라도 그 꿈꾸기 마저 없다면 악의 세력에 굴복하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