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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천규석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천규석은 거울이다>
천규석,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실천문학사, 2006.

유목, 유목적 삶, 폼나게 말해서 ‘노마디즘’. 천박한 세상 흐름에 따르고 싶지 않지만, 그들이 어떤 소리를 하고 사는 지는 알아야하기에 노마디즘을 보려했다. 물론 10여 년 전 불어대던 포스트 광풍이 사라지고 허망하게 남은 식민지 지식인의 추한 꼴을 또 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 포스트 광풍 속에서도 건질 것은 있었다. 마찬 가지다. 기지촌 지식인의 꼴은 뒤로 하더라도 노마디즘이 뭔지, 왜 떠도는지, 왜 열광하는지, 그 한계가 무엇인지를 봐야 했다. 그리고 지금 준비하는 논문의 방계적 서술을 위해서도 검토하고 싶었다.
바로 가타리와 들뢰즈의 글로 들어갈까 하다가 아무래도 자신도 없었고, 또 한국사람들이 쓴 글에서 친화감을 찾을 것 같기에 잠시 미뤘다. 그럼 이진경의 책, 하지만 그도 왠지 끌리지 않았다. 그래서 천규석을 찾았다.
천규석. 근본주의자. 처음 그의 글을 접했을 때, ‘지독한 사람이다’라는 정도의 인상이었다. 너무한다 싶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의 모순이 쌓여감에 따라 근본으로의 회귀야말로 정답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는 그처럼 살 자신은 없다. 그래도 그를 바라본다. 거울이어서 그렇다.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에게 비춰볼 것이다. 그리고 성찰할 것이다. 부끄럽게 살지 않고 싶다. 그러기에 그의 글은 내게 있어 심대한 기준이다.
이 책은 요즘 유행하는 노마디즘의 본질을 나름의 판단으로 지적했다.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라는 게 그의 단호한 결론이다. 아직 노마디즘을 제대로 접하지 못한 나로서는 천규석의 말이 얼마나 옳은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노마디즘이 뭔지는 모르지만 한국사회 현상에 대한 그의 쓴 매는 지독하지만 정당하다.
그에게 매를 맞는 자들은 비단 한국사회의 기득권자만이 아니다. 소위 진보 인사들 사이에 칭송을 받는 사람들도 많이 포함된다. 우선 김지하. 이 사람의 한계는 오래 전에 보았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유홍준 역시 그렇다. 그 사람의 천박함이야 오래 전부터 내가 직접 내 눈으로 봐 왔다. 그의 재주를 부러워할망정, 그의 삶에 대해선 나는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온갖 폼은 다 잡으면서도, 오히려 운동권이었던 것을 자신의 배경으로 깔아 장사 밑천으로 삼으면서도, 기득권자들이 행하는 못된 버릇은 마찬 가지로 가지고 산다. 역겹다.
그런데 의외였던 건 박원순이다. 박원순에 대한 비판도 매섭다. 괜한 시비가 아니다. 어차피 그들은 주류다. 기득권 세력이다. 기득권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시민운동 지도자라는 사회적 명예까지 얻었다. 곰곰이 따져보면 정말 그는 밑진 장사를 한 게 아니다. 포기한 게 없다. 게다가 요즘 타락한 현실 정치에 은근히 머리를 들이 미는 것이나, 무슨 연구소인가 하는 걸 차려서 기업으로부터 엄청난 액수의 돈을 받고 있는 모습도 그렇다.
고은 시인 역시 마찬가지다. 디제이 정부 시절 정권 인사들과 사진 찍는 자리에 참 가볍다 싶을 정도로 얼굴을 많이 내밀었다. 천규석은 말한다. 오히려 디제이 때가 농민에 대한 정책은 더 가혹했다. 그런데도 시인이 그런 정권 옆에 가서 놀고 있냐는 질타다. 시인은 그래야 한다. 세상 모순이 없어질 때까지 시대를 증거하고 피를 토해 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고은 시인은 너무 안이하게 사명을 버렸다.
천규석은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았을까. 흙냄새 풍기는 초심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농업. 몸으로 하는 농업에서 멀어지면 사람은 타락한다. 잔머리를 굴린다. 이윤에 민감해진다. 양심보다 이권에 눈이 간다. 진실보다 명예를 탐하게 된다. 특히 “전문가는 언제나 강한 자의 편에서 오는 피할 수 없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이건 분명 내가 경계로 삼을 문구다.
그는 또 사람들에게 말한다. 도시의 온갖 기득권, 소비문화는 다 누리면서, 자본이 주는 혜택은 다 받아 챙기면서, 그 자본이 만든 온갖 부정적인 폐해는 떠안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그의 표현대로 하면 “온갖 기득권은 그것대로 다 누리면서도 납 들어간 조기와 농약에 오염된 썩은 배추 대신 건강한 유기농산물도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인지상적이지만 지나친 욕심이라고 말한다.
유기농 가격이 비싸 도시 노동자들을 조롱하는 물품일 뿐이라는 지적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한다. 그러면, 그렇게 비싸면 유기농 농사꾼들이 돈 좀 된다는 말이니, 이제 도시 노동자들도 도시를 떠나 농촌에 와서 유기농하면 된다는 것이다. 정확한 답이다. 그렇게 많은 노숙자도 농촌엔 안 간다. 그건 뭘 말하는 건가. 농촌이 더 힘들다는 것 아닌가.
여성해방 운동에 대해서도 쓴 소릴 마다 않는다. “주부들은 자신의 가사노동을 외부화함으로써 날로 커가는 그 시장에 다시 자기 노동을 팔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가사 노동으로부터는 해방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대가는 자기 노동의 시장 예속과 피착취다”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무엇을 위한 해방이었는지가 궁금해진다. 시장 예속과 피착취가 더 무섭지 않은가. 차라리 그래도 가사 노동은 사랑하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쓰인다. 하지만 자본에 의한 착취는? 다시 여성운동을 생각해 볼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생태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시장에 예속된 삶으로부터 해방되어 지속 가능한 삶으로 가는 길은 삶의 시장 의존을 최소화하고 그 삶의 범위를 지역공동체화, 마을공동체화하는 것 말고 달리 없다”라고 단언한다.
‘국민의 공복’이라는 공무원에 대한 비판도 매섭다. 국민의 공복이 아니라 국민 지배조직인 국가나 특권 지배층의 공복일 뿐이라는 것이다. 요즘 서귀포시청 공무원들이 해군기지 만들기 위해 싸돌아다니는 행위는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국민의 이름을 빌린 국민 지배기구인 국가, 소수 자본가와 권력자, 고급공무원이 주인인 국가 기구일 뿐이다. 그런 그 지배 기구에 들어가 헌신하는 386들을 뭐라 해야 할까. 어찌 봐줘야 할까. 다 호구지책이니 인정해 달라고. 그래 솔직하게 그렇다고 말하면 가련하지언정 밉지는 않다. 그러나 그 주제에 뭐 국민을 들먹이고 하는 짓들을 보면 역겹다. 구역질이 난다.
또 시민단체에 대한 비판에서 많은 걸 생각한다. 푸른우포사람들 소식지의 글을 한 예로 들었다. 한마디로 “우포늪 생태를 파는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여러 환경단체들이 새겨들을 말이다.
천규석의 결론은 하나다. “모두 현재의 자기 기득권을 버리고 제 먹을 농사를 스스로 지어 먹으러 귀농하지 않는 한 이 세상의 파국은 결코 막아내지 못하리라.”
정리하다 보니 정작 유목주의에 대한 말은 거의 못했다. 이건 이진경의 책과 들뢰즈의 책에서 본격적으로 하자. 애당초 천규석을 읽고 싶었던 건, 노마디즘이 아니었다. 그냥 그걸 계기로 그의 삶을 다시 내 삶에 비춰보고자 했을 뿐이다. 기득권이 생길 즈음이면 나는 돌아간다. 전문가란 항상 자본과 권력의 유혹 앞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임을 다시 떠올린다. 그리곤 바짝 삶을 죄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