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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평점 :
오랜만에 20대에 읽던 시집을 꺼내 보았다. 기형도, 라는 이름 석자 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우울과 감상과 연민의 이유가 있었다. 그 시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요절한 천재, 기형도는 그냥 느껴지는 슬픔이 있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없어도 그냥 느낄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죽음같은 삶, 슬프기만 했던 삶, 기어이 혼자 죽어야 했던 삶...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의 시는 빈집으로 처음 만났다. 나는,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그 말에 눈물이 났다.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내 것이 아닌 열망은 무엇일까. 시인에게 그것이 무엇이었는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내게 그것이 무엇인가 궁금했다. 내가 더 이상 내것으로 둘 수 없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일 수도 있으나, 한 편 젊음일 수도 있고 또 순수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이 왜 이제 내 것이 아닌가. 내 스스로 빈집에 가두어 버린 것은...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다시 기형도를 떠올린 것은, TV단막극에서였다. 극중, 시인을 꿈꾸는 문학도가 MT가서 시 한 수 읊는데, 그것이 ’엄마 걱정’이었다.기형도의 시가, 그만큼 대중적이고 통속적이라는 뜻일까. 물론, 엄마 걱정이 기형도의 다른 시에 비해 쉽기도 하다. ’찬밥처럼 방에 담겨’ 혼자 제 할일을 하며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 혼자 훌쩍훌쩍 우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그 방은 분명, 차가웠을 것이다. 아랫목은 누가 차지 했을까. 왜 윗목에 엎드려 있어야 했을까. 나는, 엄마가 집에 없으면 참 싫었다. 다 커서도 엄마가 외출하고 늦게 온다고 하면 싫었다. 우리집은 따뜻했는데도 그랬다. 엄마가 나를 방치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내가 너무 예민했던 것인지, 나는 이 시를 읽으면, 내가 찬밥이 된 것 같다. 차디 차게 식어서, 빈방 홀로 지키는 어린 아이 같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기형도의 시를 우울하네, 어둡네, 심지어는 그래서 죽었네 까지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누가 뭐라고 떠들어도 기형도는 변명할 수가 없다. 새로운 시로 자신을 대변할 수도 없다. 그의 유일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박제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오히려 잊혀지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또 다른 시집을 냈다면, 혹은 그럴 수 있다면, 이렇게 까지 이 시집이 내 마음에 박히지는 않을 것 같다. 누구에게나 우울한 청춘의 시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흘러가는 것인데, 기형도에게는 흘러가지 못하고 멈춰버린 청춘이라, 흘려보내고 싶었을테지만 그러기 전에 멈춰버렸기 때문에, 애통하고 비장하다. 이제는 부디, 평안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