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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힘 - 0.3초의 기적
데보라 노빌 지음, 김용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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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힘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확 와 닿지는 않는다. 감사가 좋은 줄이야 알지. 그런데 그것이 그다지 큰 힘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감사의 힘이라는 예쁜 책과 함께 감사 노트까지 따라 오자, 웬 숙제? 뭔 감사꺼리?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렵게 생기진 않았다. 일단 읽어보자. 폰더 씨나 밥 아저씨 종류인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저자의 이력은 화려했다. 예쁜 외모에, 에미상을 2번이나 수상했다고 하고, TV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기자라고 하니 논리적이기도 할 거고 완벽하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예뻐서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었다.) 그런데 웬 감사? 좋은 운을 타고난 거 아니고???(외모도 실력도 없는 찌질이의 반항!)

관습적으로 한국 사회가 ’감사합니다’를  남발하지는 않는다. ’실례합니다’나 ’감사합니다’는 전형적인 서구적 습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쎄, 업무상으로나 회사에서는 그런 말들을 많이 쓰는지 모르겠지만 일상 생활에서 가족끼리, 수퍼에서, 문구점에서, 식당에서는 별로 많이 쓰지 않고 들어보지도 못 한 것 같다. 그래서인가, 별로 감사하다는 생각보다는 받는 서비스나 상품을 당연하게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한 것 같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데는 시간이 좀 걸리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사람을 향해 직접적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좀 힘들 것 같지만 그것보다 어떤 사건이나 상황, 삶 자체를 향한 감사는 혼자서도 가능하다고 할까. 사실은, 별로 할 일 없이 유복한 사람들의 배부른 소리라는 생각을 했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잠시 덮어 두고, 일을 하는 사이사이, 엄청 화가 나고 속상한 일이 생길 때 나도 모르게, '그래, 감사 한 번 해 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 그런데 기댑다 큰 효과가 있었다. 정말로 내가 감사한 그 내용이 믿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억지로 감사했으니 내 성격상 그 감사를 믿지 않아야 하는데, 마음 속으로 계속 '내 감사가 진짜 감사냐?' 의심을 해 봤지만 진짜 감사한 걸. 이런 류의 책의 효과를 그다지 믿지 않는데, 이번엔 내가 졌다. 얇고 쉬운 책인데 의외로 큰 영향력이 있다. 그렇다면 감사노트도 한 번?

감사노트는 혼자 쓰는 것이 자신이 없어서 가족 감사노트를 만들어 볼까 싶다. 가족이 같이 그날그날 감사꺼리를 간략히 기록하고 서로 피드백을 하면? 울 아들 사춘기도 쉬 넘길 것 같고, 남편과도 좀 편안히 대화할 것 같고, 울 딸 예쁘게 잘 자랄 것 같다. 한 번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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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올 때 보았네
이윤기 지음 / 비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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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목이 맘에 든다. 그리고 작가도. 나는 주로 이윤기 선생님이 번역하신 신화들을 보았지만 어쨌거나 이름 석자의 무게가 가볍지 않은 분이라는 걸 알고는 있기에. 제목은 좀 길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것은 고은 선생님의 시 ’그 꽃’의 전문이다. 역시~! 이 짧은 시 안에 얼마나 많은 사색과 통찰력이 들어있는지.

그 꽃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꽃

야~ 정말 기가 막히다. 올라갈 때 무슨 생각을 하며 올라갔을까. 그냥 올라가야지, 했겠지. 그러다 내려가는 길, 이제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발견한다. 분명 아까 지나갈 때 보이지 않았던,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을, 그 꽃.  바로 삶의 이야기 아닌가. 이윤기 선생님이 이 시를 보고 절망을 하셨단다. 이런 절창 앞에서 당신의 산문집이 너무 하찮게 여겨지셔서 종일 우울했단다. 그런데 그걸 냉큼, 편집자가 제목으로 쓰자고 했단다. (이런걸 염장지른다고하지 않나?ㅋㅋ) 시인께 허락을 받기는 했지만, 이윤기 선생님 고백컨데, 내려올 때도 그 꽃을 볼 수 있을지 난망이라고 하신다. ㅎㅎ 이런 대가가 난망이면 나 같은 범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오히려 편안하다. 그래서 이윤기 선생님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연세가 적지 않으신데 사회를 문화를 세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한없이 젊고 여유로우시고 열려 있어서 참 감사하고 본받을 바가 많다.  이윤기라는 이름으로 번역물을 주로 만났을 때는 날선 칼처럼 예리할 것 같은 선입견(?)이 있었는데, 정작 에세이로 만나보니 과연 예리하시지만, 무 자르듯 아무데나 휘두르는 칼은 아닌 듯 싶다.  그 연세에 쌓아놓은 경력이나 연륜이 있어 자칫, 남이 알지 못하는 허세도 부리고 싶고 난 척, 교만도 부리실 수 있을텐데,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조차 보인다. 가끔 치기와 오기도 보이지만, 곧게 살려고 노력해 오셨다는 자신감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한다.  후배에게도 배우시고, 채팅 용어도 수용하시고, 소통에 애쓰시고, 그러면서 또 계속 공부하시고... 히유~ 나는 그 정도 연세면 그냥 유유자적하면 되는 줄  알았다. ㅠㅠ 그러나 끝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공부하고 소통하는 것이 바로 살아있음의 증거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그런 연세’라는 말은 무정하고 무심한 말이 된다. 살아있으면 생각하고 공부하고 소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누군가에게 증거로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일로 인하여 살아있음이 증거되겠다. 그일을 멈추는 날은 살아도 살아있는것이 아니겠지. 남의 에세이집 한 권 읽고 생각이 많아진다. 나도 좀, 열심히 부지런히 배우며 생각하며 살아야 겠다. 이윤기가 건너는 강이 있다고 했다. 내가 건너는 강도 있다. 이윤기 선생님과 내가 건너는 강은 각자 다르지만, 어느 물굽이에선 슬몃, 스쳐갈 수도 있으리라. (씨도 안 먹히는 소리를!)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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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의 내가 알았더라면 - 성공한 여성 30인이 젊은 날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
엘린 스프라긴스 외 지음, 김양미 옮김 / 글담출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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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명을 믿는다기 보다는, ’그 때 내가 그랬더라면~’이라는 말이 부질없다는 생각이다. 나는 그 때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나인 이상, 나는 그 때로 되돌아 간다고 해도 역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윤회라는 것도,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보통, 안타까운 사랑 앞에서, 다음 세상에서는 우리~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그건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나 아름답고 안타까울 뿐, 다음 세상에서 뭐 할라고? 다음 세상에서 만나면 뭐 더 잘 사랑할 수 있대?

뭔 소리냐고? 책 제목이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의 내가 알았더라면’이잖아. 잘 보면 알겠지만, 후회나 회한이 담긴 이야기가 아니다. 저명한 여성들의 글인데, 저명해지기 위해 부단한 인고의 시간을 보내왔겠지. 항상 성공하고 항상 반듯하고 항상 올곧게 살아온 건 아니겠지. 그러나 그렇게 보내지 못한 젊은 날에 질책이나 후회나 비난을 보내지 않는다.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젊음에 대해 따스하고 온화한 시선으로 격려와 충고를 보낸다. (합리화 전략이라고 하면 너무 김 빠지겠지?)

멋지다. 그러나 한 편으론, 성공했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금 성공했으므로 과거도 아름답게 추억할 여유가 생기는 건 아닐까. 어쨌거나 나도, 저명해지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날, 내 젊은 날을 돌아보며 격려와 위로 한 마디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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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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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20대에 읽던 시집을 꺼내 보았다. 기형도, 라는 이름 석자 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우울과 감상과 연민의 이유가 있었다. 그 시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요절한 천재, 기형도는 그냥 느껴지는 슬픔이 있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없어도 그냥 느낄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죽음같은 삶, 슬프기만 했던 삶, 기어이 혼자 죽어야 했던 삶...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의 시는 빈집으로 처음 만났다. 나는,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그 말에 눈물이 났다. 내 것이었으나 이제는 내 것이 아닌 열망은 무엇일까. 시인에게 그것이 무엇이었는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내게 그것이 무엇인가 궁금했다. 내가 더 이상 내것으로 둘 수 없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일 수도 있으나, 한 편 젊음일 수도 있고 또 순수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이 왜 이제 내 것이 아닌가. 내 스스로 빈집에 가두어 버린 것은...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다시 기형도를 떠올린 것은, TV단막극에서였다. 극중, 시인을 꿈꾸는 문학도가 MT가서 시 한 수 읊는데, 그것이 ’엄마 걱정’이었다.기형도의 시가, 그만큼 대중적이고 통속적이라는 뜻일까. 물론, 엄마 걱정이 기형도의 다른 시에 비해 쉽기도 하다.  ’찬밥처럼 방에 담겨’  혼자 제 할일을 하며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 혼자 훌쩍훌쩍 우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그 방은 분명, 차가웠을 것이다. 아랫목은 누가 차지 했을까. 왜 윗목에 엎드려 있어야 했을까. 나는, 엄마가 집에 없으면 참 싫었다. 다 커서도 엄마가 외출하고 늦게 온다고 하면 싫었다. 우리집은 따뜻했는데도 그랬다. 엄마가 나를 방치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내가 너무 예민했던 것인지, 나는 이 시를 읽으면, 내가 찬밥이 된 것 같다. 차디 차게 식어서, 빈방 홀로 지키는 어린 아이 같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기형도의 시를 우울하네, 어둡네, 심지어는 그래서 죽었네 까지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누가 뭐라고 떠들어도 기형도는 변명할 수가  없다.  새로운 시로 자신을 대변할 수도 없다. 그의 유일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박제가 되려고 한다. 그래서 오히려 잊혀지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또 다른 시집을 냈다면, 혹은 그럴 수 있다면, 이렇게 까지 이 시집이 내 마음에 박히지는 않을 것 같다. 누구에게나 우울한 청춘의 시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흘러가는 것인데, 기형도에게는 흘러가지 못하고 멈춰버린 청춘이라, 흘려보내고 싶었을테지만 그러기 전에 멈춰버렸기 때문에, 애통하고 비장하다. 이제는 부디,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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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윤성희 지음 / 창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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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윤성희의 ’감기’를 들고 왔다.

윤성희, 전혀 정보가 없다. 이력을 보니, 내 연배에 일찍부터 많은 상을 탔더군.

괜히 주눅이 든다. 나는 뭘 했나.

읽었다. 읽다가 턱,턱, 막힌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지금 뭐하자는 거지, 하는 생각이 자꾸 올라온다.

단편은, 어렵다.

장편은 그냥 스토리만 따라가도 반은 건진건데, 단편은 꿈을 꾸는 것 같다.

그 꿈이 내 꿈이 아니라서 제대로 따라가기가 힘들다.

그런데 읽는 내내 우울하다. 비평가들은 유머와 해학이라는데 대체 어디가?

 나는 슬퍼서 눈물이 날 것 같은데.

하는 사업마다 말아 드시는 아버지,

혹은 뒤늦게 찾아온 아들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혼자 벌서는 아버지,

졸업 후 수년 동안 취직도 못 한 오빠, 걱정이 많아 잠도 못 자는 오빠,

미혼모가 되어서도 공장에서 악착같이 일하는 엄마,

재수가 엄청 좋아서 교통사고를 당해도 다른사람만 죽게 하고 살아나는 나...

그 중 누가 재미있어서?

그러고도 나는 운이 좋아, 를 외치는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잠시 책을 덮었다.

잊었던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네.

그 말도 안 된다고 생각되는 소소한 단편들이 내 속에도 있었네.

유머라, 유머....

어느새 윤성희의 꿈은 내 꿈이 되어 간다.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슬몃 웃음도 나온다.

지지리 궁상을 덮는 얇은 웃음을 나는 비웃었는데,

도저히 덮어지지 않아서 오히려 더 우울했는데

이제 웃음이 난다, 나도.

왜냐하면,

나도 늘 그렇게 웃었으므로.

남의 일일 때는 정직하게, 우울하다가

나의 일일 때는 나도 웃었으므로. 덮어지지 않더라도 일단 웃고 보자.

 

일단 윤성희 승리.

모든 재주가 다 부럽지만,

글쓰는 재주, 참 부럽다.

 

며칠 후에 다시 한 번 읽어볼 생각이다.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처음과 같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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