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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올 때 보았네
이윤기 지음 / 비채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일단, 제목이 맘에 든다. 그리고 작가도. 나는 주로 이윤기 선생님이 번역하신 신화들을 보았지만 어쨌거나 이름 석자의 무게가 가볍지 않은 분이라는 걸 알고는 있기에. 제목은 좀 길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것은 고은 선생님의 시 ’그 꽃’의 전문이다. 역시~! 이 짧은 시 안에 얼마나 많은 사색과 통찰력이 들어있는지.
그 꽃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꽃
야~ 정말 기가 막히다. 올라갈 때 무슨 생각을 하며 올라갔을까. 그냥 올라가야지, 했겠지. 그러다 내려가는 길, 이제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발견한다. 분명 아까 지나갈 때 보이지 않았던, 그러나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을, 그 꽃. 바로 삶의 이야기 아닌가. 이윤기 선생님이 이 시를 보고 절망을 하셨단다. 이런 절창 앞에서 당신의 산문집이 너무 하찮게 여겨지셔서 종일 우울했단다. 그런데 그걸 냉큼, 편집자가 제목으로 쓰자고 했단다. (이런걸 염장지른다고하지 않나?ㅋㅋ) 시인께 허락을 받기는 했지만, 이윤기 선생님 고백컨데, 내려올 때도 그 꽃을 볼 수 있을지 난망이라고 하신다. ㅎㅎ 이런 대가가 난망이면 나 같은 범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오히려 편안하다. 그래서 이윤기 선생님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연세가 적지 않으신데 사회를 문화를 세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한없이 젊고 여유로우시고 열려 있어서 참 감사하고 본받을 바가 많다. 이윤기라는 이름으로 번역물을 주로 만났을 때는 날선 칼처럼 예리할 것 같은 선입견(?)이 있었는데, 정작 에세이로 만나보니 과연 예리하시지만, 무 자르듯 아무데나 휘두르는 칼은 아닌 듯 싶다. 그 연세에 쌓아놓은 경력이나 연륜이 있어 자칫, 남이 알지 못하는 허세도 부리고 싶고 난 척, 교만도 부리실 수 있을텐데,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조차 보인다. 가끔 치기와 오기도 보이지만, 곧게 살려고 노력해 오셨다는 자신감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한다. 후배에게도 배우시고, 채팅 용어도 수용하시고, 소통에 애쓰시고, 그러면서 또 계속 공부하시고... 히유~ 나는 그 정도 연세면 그냥 유유자적하면 되는 줄 알았다. ㅠㅠ 그러나 끝없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공부하고 소통하는 것이 바로 살아있음의 증거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그런 연세’라는 말은 무정하고 무심한 말이 된다. 살아있으면 생각하고 공부하고 소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누군가에게 증거로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일로 인하여 살아있음이 증거되겠다. 그일을 멈추는 날은 살아도 살아있는것이 아니겠지. 남의 에세이집 한 권 읽고 생각이 많아진다. 나도 좀, 열심히 부지런히 배우며 생각하며 살아야 겠다. 이윤기가 건너는 강이 있다고 했다. 내가 건너는 강도 있다. 이윤기 선생님과 내가 건너는 강은 각자 다르지만, 어느 물굽이에선 슬몃, 스쳐갈 수도 있으리라. (씨도 안 먹히는 소리를!)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