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소는 아이들에 대한 그와 같은 교육을 가리켜
‘아이들을 살해하는 행위‘라고 가혹하게 비판하면서
그 폐해를 경고하고 있다.
그런 교육기관들에서 아이들은 살아가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지식을 쌓고 있으며, 체벌에 대한 공포와 포상에 대한 희망속에서 비굴한 정신을 기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첨하는 법을 배우며, 계략을 짜내는 법을 배우며, 질투와 시기심으로 뒤범벅이 된 경쟁만을 배울 뿐이다.
그렇게 아이 시절의 속박과 구속에서 벗어나면 이제는 관습의 멍에라는 것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청년기에 이른 그들은 자유를 찾았다고 생각하면서 환호할지 모르지만, 세상의 준칙의 노리개가 되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되는 것을 배우지 못하고, 그들 자신이 되어보는 때를 찾지 못한다. 아이 시절에는 아이로, 청년시절에는 청년으로 살지를 못한다.
그 시절은 그저 빨리 흘려보내야만 하는 의미 없는 시기일 따름이다.
- p.29
이 부분은 저의 학창시절 덧씌워진
학교 권위의 굴레에 대한 공포감을 떠올리게 합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그 당시 이런 신념을 갖고 실천했던 분이 과연 몇이나 있었던가. 하는
의문과 함께 몇몇 소수 교육자의 탈을 쓴 인간이하의 선생에게 환멸을 느낍니다.
물론 일선의 교육현장이 잡다한 행정서류에 파묻혀
교육에만 전념할 수 없는 환경인 걸 잘 알지만
한나아렌트의 말처럼 ‘악의평범성‘으로 변명할 수 밖에 만 없다면 그 분들은 다른 일을 하는게 낫지 않을까요.
적어도 ‘교육자‘라면 말이죠
문득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첫 페이지 문장이
다시금 와 닿네요.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 나는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