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전에 읽었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두 주인공이 이 책에서 다시 부활한 느낌입니다.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와
청강생 플리니오 데시뇨리의 만남인데요.
이 책에서 요제프는 ‘헤겔‘에게 가장 강하게 사로잡혔다는걸 상기해보면,
이 둘의 정반합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합니다.
헤세의 책을 읽노라면
삶의 진정성과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사람은
나를 인정해 주는 친구라기보다
나의 세계를 깨어주는 그 누군가가 아닐까 싶어요.
그 고통을 감당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고통‘이란 건 ‘쾌락‘과도 너무나 닮아있다는 말..
무슨 말인지 알것 같아요.

진리는 분명 있네. 그러나 자네가 바라는 ‘가르침‘,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그것만 있으면 지혜로워지는 가르침이란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완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자네 자신의 완성을 바라야 하네. 신성은 개념이나 책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네 안에 있어.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야. 싸울 각오를 하게. 요제프 크네히트. 보아하니 투쟁은 벌써 시작됐네.- p.105~106
그는 카스탈리엔의 ‘거만한 스콜라적 정신성‘에 맞서 ‘속세‘와 소박한 삶을 옹호하되, 자신이 그 일을 상대편의 무기를 써서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정신적 교양의 정원을 맹목적으로 짓밟는 무뢰한은 안 되려고 했다.-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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