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
김영민 지음 / 김영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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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소설집을 읽기에 아직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자신에 대한 불신. 그리고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한쪽만의 탓이 아니라는 변명에 기대어 저자에 대한 미약한 의심을 피워내며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를 읽었다. 제목만 보고 달달하게 단맛만 맛보려고 이 책을 집어들었다간 큰 혼이 날 것이야, 책 표지가 아니더라고 책등이나 날개에라도 경고해 두었어야 페어플레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 조교없이는 자살할 능력조차 없는 것이 교수 아닌가! 교수가 자살 같은 것을 할 리가 없다! 197" 

첫 단편 제목이 [이웃집 개에게 쓰는 편지]였을때부터 예감했어야 마땅하다. 그 어떤 비유가 아닌 진짜 이웃집 개에게 편지를 쓰는 사람의 글을 읽게 되리란 것을. 가끔은 화가 나기도 했다. 이렇게 말장난 같은 문장들 사이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밝히라고, 괜히 울화통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남들은 다 여유롭게 눈짓을 주고받으며 낄낄 웃으면서 책을 읽고 있을 것 같아 초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만 웃지 못하고 있을까봐 포모*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라니. 

" 무슨 '주의자'가 될 시간에 내향인은 차라리 자기반성에 몰두한다. 내로남불 태도를 거부한다. 오히려 내불남로 태도로 살아간다. 내로남불을 하느니 생불이 되겠다는 것이 내향인의 인생관이다. 90" 

이미 다 우려낼대로 우려내 맹물밖에 남지 않은 MBTI 얘기도 듣다보면 어느새 집중하게 만드는 언변이 매력적이다. 그러니 체력과 집중력 저하로 인해 따라가기 버거워져도 정신차리고 다음장으로 따라붙게 만드는 힘이 있다. 때로는 좀 과하게 나간다 싶기도 하고, 너무 멀리 퍼져나간 갈래를 적당히 갈무리해줬으면 하다가도 '뇌절은 뇌절이다.'* 하고 포기와 인정을 하게 된다. 

" 완성된 사람은 사랑을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미완성이기에, 결함이 있기에, 상대를 찾아 나서고 그 상대가 그를 완성하려 들 때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결함을 포함합니다. 아니, 결함이 필요합니다. 결함이 없으면 사랑하고 싶지도 않고, 사랑이 가능하지도 않겠지요. 215" 

여유롭게 문장을 다루며 글을 요리해나가는 모습이 약이 오르게 만들기는 하지만, 확실히 '대체 뭐야?' 하고 흰눈으로 보기엔 날카로운 문장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기강을 잡고 있었다. 비슷한 느낌을 어디서 받았더라 한참을 생각했는데, 예전에 플라시보 시리즈로 읽어본 적 있었던 초단편 장르의 개척자 호시 신이치였다.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에서 즐거움을 느꼈다면 호시 신이치도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웃긴 것 같은데 우습진 않고, 아무말이나 늘어놓는 것 같은데 그 안에 예리하게 벼려진 침이 하나 숨어있어 읽다보면 묘한 책을 하나 읽어보고 싶다면. 가진 재능을 왜 이렇게 휘두르는지 궁금해지는 글빨을 가진 작가를 만나고 싶다면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를 읽어보길 추천한다. 차마 더 풀지 않고/못하고 쌓아둔 글이 분명히 더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다음이 궁금해지는 만남이었다.


*FOMO (Fear of Missing Out) 놓치는것에대한두려움
*[동어 스님전]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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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쓸모없다 - 사노 요코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이소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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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마음도 있었어. 이제 저마다의 인생이 시작된 거니까. 그 친구도 나도 그걸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104" 

어른이 되고 난 뒤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일이 참 힘들구나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어렸을 때는 함께 놀 상대가 매일 주변에 있었고, 좀 더 자라서는 학교에 가면 항상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잘 몰랐다. 요즘은 학급인원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친구 사귀는 일이 조금 더 압박감이 있겠지만, 예전에는 많은 인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가까운 무리가 생기고 어느정도 여유롭게 무리를 오가며 지내는 일이 보통이었다. 그때는 번화가만 나가도 길을 걷다 금방 인사를 나눌 친구를 마주치기도 하고, 막 성인이 되어선 어울릴 사람도 챙길 친구도 많아 바쁘기도 했었는데, 정신없이 눈 앞을 살아가다보니 곁에서 같이 걷고 있었던 것만 같던 친구들이 각자의 길로 걸어나가버린 뒤였다. 어느새 누군가와 함께 노는 것보다 혼자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에 더 익숙해졌구나, 문득 스스로가 어른이 되긴 했구나 새삼스러웠다. 

이런 자신의 상황에 비추어 '친구는 쓸모없다' 제목을 보고, "좋아하고 미워하면서도 자꾸 연락하게 되는 사람들"이란 부제를 보고, 어른이 되어 찾아오는 '친구 기근'과 연관된 내용이겠거니 어림 짐작하며 봤는데, 의외로 시작은 최초의 놀이 친구에 대한 기억부터였다. 어린시절 열심히도 손윗동기를 따라다녔던 기억이 났다. 하필이면 자랐던 동네에 손윗동기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댓명이 넘게 있었는데 나와 나이가 같은 아이는 없었다. 혹은 그보다 한두살 더 나이가 많은 아이들이라 나는 혼자 놀거나 이들이 노는 자리에 금붕어 똥처럼 졸졸 따라붙어 깍두기 노릇을 했다. 

" 그렇게 하루를 시작해서 온종일 오빠를 쫓아다녔어. 지루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25" 

우리는 사이가 좋았던터라 집에서 둘이 같이 놀 때도 어지간히 잘 맞고 재밌기는 했지만, 손윗동기 입장에선 제 또래랑 놀러 다닐 나이가 되었을때 늘 봐줘야하는 혹을 하나 달고 다니는 일이 제법 성가셨을 것이다. 한번은 그날만은 나를 떼어놓고 싶었는지 몰래 나가려다 들켜서 따라가겠다며 떼를 쓰는 나를 이불에 돌돌 말아서 방에 넣어두고 가버린 적도 있었다. 그 뒤로 몇 해 지나지않아 각자의 친구와 놀게 되면서 그 시절은 끝나버렸지만, 어른이 된 이제는 함께 쌓아온 추억, 취향이 맞는 서로 의지하는 친구같은 사이가 되었다. -고 하고 싶지만, 아직도 나만 더 같이 놀고 싶어한다. 동생들은 공감할텐데, 아직도 지루해지지가 않는다. 

" 우정이라는 건 중학생쯤 되어 자아가 생기고 부모에게서 독립하려 할 때가 되어서야, 절실히 원하게 되는 것 같아. 부모가 아니라 타인이 필요해지는 시기인 거지. 그렇게 친구를 원하고 찾아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어른이 되는 거야. 53" 

얼레벌레 주변의 놀이친구와 어울리게 되는 어린시절이 지나고 중학생이 되면서 '친구'에 대한 갈망이 생기고 슬슬 처음 기대했던 재밌는 내용, 인간관계라 할 만한 것이 시작된다. 이렇게 상세하게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로 당시 어떤 생각을 했고, 또 누구와 어울렸는지 적혀있어서 저자에게 친구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저자의 말에 공감이 되는 것이, 나 역시 친구와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끊는데 신경을 쓰게 된 시기가 중학생 무렵부터 였던 듯 하다. 같이 어울릴 무리와 친한 친구가 있다는 것은 그 시기의 증명서같은 것이라 이를 원만히 만들어놓지 않으면, 다른 무리와도 쉽게 어우러지지 않고 혼자 튀어나온 것처럼 겉돌게 되는 일도 생긴다는 걸 알게 됐었다. 

좀 다르게 느껴진 것은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에 대한 인상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성숙한 상태로 상대를 알아갈 수 있으나 사귐에 있어 계산이 적고, 감수성이 민감한 시절이라 이 무렵 마음을 터놓고 사귀게 되는 친구는 평생 가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일본은 그런 인식이 없는 것인지 개인의 경험이 달랐던 것인지 궁금했다. 

" 이 책은 청소년을 위해 쓰기로 한 책인데, 왜 어른이 되고 난 뒤의 친구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하는지 알아? 우정은 지속된다고 믿기 때문이야. 163" 

회고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에세이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대부분이 사노 요코와 다니카와 슌타로의 대담으로 되어 있다. 이런 형식의 글은 익숙하지 않아서 처음엔 조금 당황했지만 묘한 리듬감과 친구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편안한 분위기에 동화되어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나 이 둘은 성인이 되고 난 후에 친구가 된 관계로, 일로 만나게 되었다가 2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알고 지내면서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고(194) 한다. 읽으면서 부럽단 생각이 들었는데, 이들도 자신들과 같은 경우가 흔치 않다는 것으로 봐서 어른이 되고 난 뒤에 친구를 새로 사귀는 일은 모두 쉽지 않게 여기는구나 싶었다.  

일본 특유의 정서가 짙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종종 있었는데 "전학생은 당연히 괴롭힘을 당혔어. (61)"라던 어린시절이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대로 된 회사에 들어가기는 어렵겠구나."(119) 같은 이야기가 나왔던 것, "나는 평생 한 번도 치한을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 애가 부럽더라."(130) '부럽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 어떤 생각에서 나오는 것인지 상황에 맞는 표현이 아닌 것 같아 때로 어색했다. 더불어 전쟁에 관한 이야기(48)가 나올 때는 자신도 모르게 예민한 눈으로 몇번이나 살펴서 읽게 되기도 했다. 

제목은 다소 파격적이지만, 알고보면 친구를 너무나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이라 '쓸모를 염두에 두고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인다. 청소년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기획된 책이라고 하지만 성인 독자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면이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시기와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보다 조금 지나서 벗어나고 난 뒤에 보면 더 자세히 보이는 것이 있는 것처럼, '친구 관계'에 대해서도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시기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이제는 알 것 같아서다. 책을 읽고 난 뒤인 지금도 새 친구를 사귀는 것은 여전히 어렵겠다고 생각하지만, 곁에 남아있는 친구들에게 '홋카이도의 라일락과 우리 집에 핀 민들레가 이어져 있(201)'는 것처럼, 언제든 가볍게 안부를 묻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그래도 별로인 면이 있다는 걸 서로 알고도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더 안심되지 않아?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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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월드 - 교유서가 소설
오선영 지음 / 교유서가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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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스무 살 넘으면 꼭 가자. 138_스페이스 월드

 한동안은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책들의 맨 위에 '스페이스 월드'를 올려놓을 것 같다. 오선영 작가의 '스페이스 월드'는 좀처럼 돌려 말하는 법을 모른다. 하고픈 말을 위해선 적나라한 인물과 클리셰나 다름없는 익숙한 사건들을 가져와 고스란히 펼쳐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솔직함이 재미있고 익숙하게 다가오는 점이 좋지만, 한편으로는 독자를 한걸음 더 그의 안으로 혹은 세계의 예상치 못한 골목 안으로 이끌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남는다. 

 익숙한 피곤함을 안겨준 '어니언마켓'이 첫 시작이어서 책을 읽는 동안 그런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았는지 모른다. 이름만 살짝 바꾼 당근마켓 소재부터, 영어유치원 레벨테스트니, 엄마들 브런치 모임이니,하는 여왕벌 얘기는 소설,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니까. 이렇게 판에 박힌 인물과 사건을 끌어다놓을 수 밖에 없었나. 아이 엄마들 모임은 다 저렇게 서로 눈치만 보고, 어딘가 한둘씩 정상적이지 못한 구석을 드러내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경쟁하고 남 욕이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틀 안에 또 한 번 찍혀나와야 했을까. 기대가 컸던만큼 섭섭했다.

 특히 '아직 오지 않은 말'처럼 관계 속에 깊이 파고든 균열의 정체가 이렇게 긴 시간동안 사이를 가르도록 방치할만한 것이 맞을까 의문이 들 때도 그 한 걸음이 아쉬웠다. 각 단편들 안의 인물과 사건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에서 허구로 한 걸음 더 나아가줬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오히려 안평이라는 공간에서 '순자'를 통해 두 세계가 엮이는 것을 보며, 선주가 놓쳤던 안평마을의 마지막 날을 이렇게라도 보게 되었구나 안도했다. 어쩌면 그래서 이들은 어떻게 되는걸까, 그 이후가 걱정되는 마음이 아쉬움으로 쌓였는지도 모른다.

 읽어가며 아쉬움을 지워내는 재미도 쌓여갔다. 익숙하고 단편적이라 치부하고 말아버리기엔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묘한 끌어당김이 있었다. 이런 느낌을 어디서 느껴봤더라? SNS를 하다 자극적인 내용의 사연 콘텐츠를 우연히 보고 결말이 궁금해져 계정까지 찾아가보게 되는 그 느낌이었다. 마치, '중고거래에서 사간 내 물건 플미 붙여서 판 사기꾼 참교육 썰' 같은 제목이나 '남직원만 따로 챙기면서 꼬리치는 회사남미새 썰' 같은 제목이 떠오른다. 유치하고 뻔하다고 거부하기엔 어려운 재미와 공감대가 있다. 그렇다면 이 또한 이 책의 매력이 된다.

 곁에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그런 자신의 내면을 어쩔 수 없이 모른척 삼켜내고 멀쩡한 얼굴로 버텨내야 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 나약하고 비겁한 이중적이고 평범한 모습들이 주변에 흔하고, 흔한만큼 공감되는 스스로를 깨닫는다. 보증금을 가지고 도망가버린 도영에 대한 원망보다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배경을 가진 은하에 대한 불쾌감이 종종 더 짙게 느껴졌던 '안평', 여자친구와 회사동료 사이에서 혼자 줄을 타던 '카페인 랩소디', 자신의 인생으로 걸어나간 친구에 대한 애정과 원망이 오가는 '스페이스 월드', 보낼 수도 품을 수도 없는 '임시보호자'처럼.

 처음엔 작가의 색과 힘이 조금만 더 보였다면 어땠을까 싶었는데, 어쩌면 결말이 좀 더 닫혀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 아쉬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 역시 생각하기를 작가에게 외주 주려는 챗지피티 시대의 영향일까. 이미 결말이 열린 채 마무리지어진 책을 앞에 두고 생각이 미치는대로 여러번 다시 보니 멈춰있던 그 지점에서 직접 인물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처음은 가벼움으로, 그 다음은 궁금함으로, 그리고 좋았는지 싫었는지 구분하기 어려운 모호한 마음으로 자꾸만 펼쳐보게 되는 면이 있다.

 선주가 너무 미워서 나쁜 년이라고 열번씩 욕해주고 싶었던 건 누구였을까, 종종 책을 읽다가도 멈추고 궁금해하곤 했다. 그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그대로 담아내려고 노력한 결과물이 흔하고 뻔한 모습들이라 그리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아쉽게 여겼던 것일까 뒤늦게 곱씹어보게 된다. 나는 왜 이렇게 느꼈을까, 왜 좋은가, 왜 싫은가 이유를 갖기 위해 계속해서 다시 읽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 묘한 인상을 남긴다. 책을 읽고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을 카드에 적어 다른 사람과 서로의 이유를 나눠보고 싶은 책이다. 그럼 한 걸음씩 더 가까워지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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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두가 적이라면 ㅣ 교유서가 시집 9
김개미 지음 / 교유서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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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모두가 적이라고 말하는데 어째서 나는 나와 닮은 나를 볼까. 

언젠가 "침대 밑 침대 500mmx1800mm(18)"의 크기만한 공간에서 하루종일 먹고 자고 조금 움직이고 식판을 대신 옮겨놓고 빨대가 꼽힌 물컵을 가져다주고 이런 날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헤아려보다가 숨을 참기도 하던 때가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온 하루를 같이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텅 빈 침대만 남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고, 금새 처음 만나는 사람과 다르지 않은 하루를 같이 살게 되는 곳. 불꺼진 병동 어두운 의자 여기저기에 흩어진 사람들이 서로 닿지 않게 듬성듬성 앉기로 약속이라도 한듯한 곳. 당신도 거기 어느 어두운 의자에 앉아 있었구나 알아차린다. 

우리는 어두운 곳에서만 흐릿하게 닮아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집으로 오면 나는 집에서도 외출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며, 당신이 오기도 전에 당신이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쳤다 말하는 '왜 집으로 온다는 거니(62)'를 보고선 웃음이 터졌다. 이제 아무도 묻지 않는 MBTI가 무언지 아마 시인은 분명 I로 시작하는 인프피일거야,한다.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시간에도, 평범하고 별볼일 없는 시간에도(나는 왜 자꾸 이 영상을 볼까 음악도 없고 말 한마디 없는 이 영상을 91 '부시크래프트')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형태로 도망친다. 

읽는 내내 서로 다른 삶을 살면서도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이 세상 모두가 적이라면' 나도 나의 적이 되는걸까 고민하게 만든다. 시인 역시 누군가의 뒷모습이 내 뒷모습 같아서 두려움에 떨고(48 '유랑'),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나랑 똑같은 소녀를 보고(120 '드로잉북의 소녀') 비명을 지른다. 나와 남을 구분하지 못해서인지, 남에게서 나를 보아서인지, 나조차 남처럼 보아서인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은 가끔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도 놀라게 될 때가 있다*는 말을 떠올린다. 그럴 때가 있지, 그럴 수도 있지. 나도 나를 가만히 두지 못하겠을 그런 때가(88 '부서진 방'). 

김개미의 시집 안에서 유난히 계절이 많이 흐른다. 달력의 한 귀퉁이에 그린 그림들을 손끝으로 눌러 빠르게 넘기며* 몇번이고 바뀌는 계절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여름, 칠월, 벌레와 낙엽, 토끼와 고양이, 초록 파도와 가을의 추수, 은행나무 그림자, 겨울의 제일 추운 날과 눈 오는 날, 마른 풀, 작은 새, 십이월 같은 것들이 천천히 그려졌다 사라지며 시간을 쌓는다. 도무지 키가 자라지 않아 오래도록 아이옷을 입고(41 '나의 집이 나뭇잎 뒤에 있을 때'), 인형의 나라(114)를 꿈꾸던 시인이 아무 일도 없는 것이야말로 특별한 줄 아는 어른이 되기까지(67 특별한 가을 되세요) 갈피를 꼽아둔 날들이 담긴 듯 하다. 

계절 속에서 시인이 자라는 동안 할머니에게서 엄마에게로 이어진 병명 없는 병(30 '엄마의 종교는 소금물'), 자기가 깨고 나온 알 속으로 들어가려는 오빠(26 '누가 이 여름을 발명했어'), 집을 나가는 아빠(26/139 '인형놀이'), 가장 추운 날 언니 집으로 돌아간 나보다 작아진 언니(83 '언니가 갔다'), 아직도 여기저기서 털이 묻어 나오는 고양이 칠리(134 '고양이 털').가장 가까운 것들을 사랑해 이들이 그의 삶에서 멀리 걸어나가고 난 자리를 채워낸 사랑이, 너무 가깝고 무거워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토끼를 기르면 토끼 때문에 언젠가 마음을 다치게 되니까, 쉽게 죽고 무방비하게 공격 당하는 존재를 더는 들이지 않겠다던(24 '토끼 따위') 아이는 죽은지 3년이 지난 고양이 칠리의 흔적이 영영 사라지고 나면 오히려 섭섭할 것 같다(134)는 어른이 되었다. 그럼에도 사랑에 대해 용감하게 떠들고 싶다(5)는 그는 "날아갈 곳이 생각난다면 날개가 부러져도 좋다(107 '십자가에 앉은 새')"고 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그런 점이 가장 좋았다. 내 마음에 깊이 남겨두고 싶은 책보단 다른 이의 손에 들려주고 싶은 책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적처럼 느껴질 때 위로삼기를, 바쁜 신 대신 당신의 집에 한 권 놓여있기를 바라게 된다. 


*영해향진(影駭響震)
*플립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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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
유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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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맞추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때로는 속눈썹 개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상대에게 애정을 품는 일. 나에게 잘 듣는 일이란 구체적으로는 그런 것이다. 쓸모를 증명할 수 없으나 그 증명할 수 없음으로 인해 무가치해지지는 않는 일. 그것은 잠시나마 '나'를 넓혀가는 일이다. 내가 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아는 일이다. 116" 

'심장 듣기'를 앞에 두고 열심히 들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나는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저 열심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독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내면에서, 또 이웃에서, 세상에서 들어온 이야기는 내밀하고, 익숙하고, 낯설고, 어려운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함께 듣는 동안 내게도 뭔가 채워지는 것들이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임보 중이었던 밤이를 입양해 온 이야기는 언뜻 흔하디 흔한 이야기면서 매번 특별하게 여겨지는 구원 서사다. 12키로 까지 클 것으로 예상된다던 6킬로그램의 밤이가 21키로의 중형, 아마도 진도비빔일 강아지로 성장하게 되면서 보호자인 그가 겪는 산책길 시비 경험담은 너무나 예상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중대형견 보호자들은, 특히 진도의 핏줄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거기다 여성이라면 더욱더 수많은 시비와 싸움에 휘말린다. 
" 날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라는 아주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서 있을 때는 아무도 괜한 시비를 걸지 않았다. 반면 아침저녁마다 하는 산책을 그런 마음으로 할 수는 없었다. 169"
내 개는 안물지만 나는 뭅니다 싶은 전투력과 산책 상황을 영상으로 기록해놓을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입마개와 중대형견 분류 조항 등을 눈만 마주쳐도 쏟아낼 수 있을 정도의 준비를 한 채 하루에도 몇 번씩 내 강아지의 행복한 산책을 위해 집을 나서는 보호자들이 많다. 산책 뿐이랴 애견동반시설 등에서도 중대형견 특히 진도의 핏줄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이용이 불가하다는 거절을 당하기도 한다.
이 남일같지 않은 분투에 웃기도 하고 공연히 혼자 더 화도 내다가, 입양한지 몇 년이 지났어도 강아지를 이해하는데 실패하고 언젠가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올까봐 두렵다(40)고 고백하는 두려움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다. 반려동물을 버리는 것은 그들을 집으로 들였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 그 무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버린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니 부디 이해할 수 없는 그 간극마저도 오래도록 사랑하는 반려인이 되길. 

" 나는 2021년의 미얀마를, 2022년의 우크라이나를, 2023년의 팔레스타인을 떠올렸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건 대체 누가 결정하는 거야? 76" 

123의 밤을 듣는 일은 새삼스러웠다. 불행하게도 텔레비전을 보던 어느 평범한 밤에 갑자기 쏟아져나온 속보를 무방비하게 목격할 수 밖에 없던 충격과 무력함이 다시 찾아왔다. 미처 준비도 각오도 없이 현장으로 가야만 했던 저자의 생생한 그날밤을 들으며 이것 역시 상처로 남았구나 깨달았다. 그 밤을 지나왔으면서 어떻게 아직도 그 짓을 저지른 사람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을까.
왜 시간과 이익은 모든 잘못을 덮어버리는데 충실히 쓰일까. 비단 그 밤 뿐 아니라 아주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81번째 광복절을 앞두고 터져나왔다. '세월이 자신들의 편'이었다던 매국 집안이 쌓아올린 부와 명성을 자랑하던 부조리 앞에 다시금 터져나온 분노가 길게 이어지는 요즘이다. 둘 사이에서 닮은 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를 옹호하고 덮어두자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 같은 이익을 바라고 있다. 
온갖 정당화와 거센 몰이 앞에서 때로는 무력하고 이대로 저들이 원하는대로 세상이 굳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주워야 할 말은 주워서 '기억'하기 위해(103)" 애쓰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린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그저 잠시 귀를 기울이고, 몸을 기울이고, 그곳에 나의 몸을 존재하게(97)"함으로써 힘을 보탤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안에서 나와 타인과 사회를 연결하기 위한 사랑을 느꼈다고. 

" 대체 그것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이라 생각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에, 심지어 자신에게 그다지 호의적이도 않았을 사회에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이라고. 79"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저자와 겹쳐졌다가 다시 나로 떨어져나오기를 반복했다. 열심히 듣다보면 내가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소리들이 있었다. 저자 역시 말하거나 듣는 일을 오갔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심장을 듣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궁금했었는데, 의미를 파악하려 애쓰지 않아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우리 사이에 공감하고 나눈 것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 당신이 확장되어 나와 연결되는 특별한 시간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인상적인 듣기였다. 


* 152 백화점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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