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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광선 ㅣ 꿈꾸는돌 43
강석희 지음 / 돌베개 / 2025년 9월
평점 :
" 세상의 모든 비참이 내게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나를 즐겁게 하던 것은 금세 나를 괴롭혔다.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나를 쉽사리 중독시켰다. 나는 내게 자주 실망했다.
사실은 매일
아니, 매 순간.
돌이켜 보면, 사랑을 받고 싶었을 뿐이다.
더 많고 더 큰 사랑을. 24"
청소년도서는 좀 희망차야 하는거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책을 읽다 다시 표지를 뜯어보았다. 그런다고 읽고 있는 내용이 밝아지거나, 표지 색이 까맣게 바뀌거나, 띠지에 적힌 '성장소설상 수상 작가'라는 문구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모든건 여전하고 바뀌어야 하는 건 내 생각일뿐인데, 처음엔 그랬다. 치기어리고 분절된 투로 제 안의 고집과 상처만 쏟아내는 연주를 보며 마음이 답답해져 왔다.
" 그런 내 사정을 그 아이들에게 말하는 게 가능했을까? 내가 이해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놓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나는 나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오해는 오해로 남겨 두는 게 차라리 편했다. 56"
다가오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 이상의 벽을 치는 모습에 사춘기가 쎄게 왔구나 싶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고 왜 자신이 싫은지 늘어놓은 것들이 진학 실패, 남자친구가 퍼트린 악의적인 소문, 따돌림, 씹뱉과 먹토, 자해여서 마음이 가라 앉았다. 앙상하고 여윈 몸과 마음만 남은 연주가 안타까우면서도 한 번 걸려 넘어진 돌부리를 높은 벽처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모르는 새 불룩 나온 입에 '푸르르' 숨을 내쉬며 입매를 풀어내곤 나도 이제 어른이 다 되었구나, 했다.
그 시절엔 어제 나랑 화장실 다녀왔던 친구가 오늘 다른애랑 화장실에 가면 마음이 술렁이곤 했다. 눈길이 가던 사람이 다른 곳만 보고 웃어도 심장이 내려앉고, 누가 내 방에 노크없이 들어오기라도 하면 나를 무시해서 내 공간을 침범하는 것처럼 화가 나기도 하던 때였다. 그랬던 시절의 마음을 모두 잊고 섬세하게 벼려진 감성과 예민했던 감각이 지워진 머리로 연주를 재단하려고 했다. 마음을 풀고 눈길을 다듬어 다시 연주를 본다.
" "쓸데없는 말 하면 벌금 내는 법을 만들어야 돼."
이모는 할아버지의 지인 한 무리가 다녀간 다음 이마를 짚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입을 가리고 잠깐 웃었다. 그런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이모와 나 사이의 비밀이었다. 113"
하마터면 벌금으로 가진 돈을 다 털릴 뻔 했다. 정신에 힘을 주고 바보같은 소리나 내뱉는 어른이 되지 않고 살아야지, 생각한다. 연주가 그토록 바랐던 까만 돌 '묵묵'과 함께 돌보기를 이야기하는 다해, 정연, 혜영이를 보며 마치 묵묵이 영화 '청바지 돌려입기'의 청바지 같단 생각을 떠올렸다. 같은 것을 공유하기로 한 친구들의 성장과 우정을 다룬 청소년소설이 원작이라는 점에서 오래된 영화이지만 '녹색 광선' 독자들에게 함께 추천해주고 싶었다.
'녹색 광선'안에 모든 인물들은 다 이유가 있었다. 누구 하나도 예사로 살아가고 있지 않았다. 이모, 할머니라고 붙여진 호칭에도 윤재와 명선 같은 이름이 있었다.여기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도 괜찮은가, 싶을만큼 섭식장애, 가정불화, 장애인 인권, 성소수자 같은 키워드들이 빼곡했다. 하지만 인물들이 소설 속 주인공을 위해 기능하도록 쓰이는 장치가 아니라, 저마다의 무게를 짊어지고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숨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어둠이 길고 갈등은 다양한데, 멈춰있던 관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치유의 과정은 그에 비해 짧게 느껴졌다. 내면으로 침잠해 가라앉는 개인을 일깨워주는 것은 외부의 두드림이었다. 닫힌 이모네 집 문을 윤재야, 하고 부르며 두드리던 할머니의 마음처럼, 타인을 거부하던 연주를 초대한 생활 트래핑 단톡방의 알람처럼, 일반인에게만 열린 세상을 향해 지하철 장애인 이동권을 요구하는 시위처럼 곳곳에 두드림이 있었다.
모두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행복해지고 싶어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끝내 남은 페이지가 없어서 조금은 아쉬웠다. 하지만 인생은 완벽한 행복으로 닫힌 결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 남은 시간들이 여백으로 남겨져 있다는 점이 더 감각을 잃지 않은 성장소설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뜩 엉킨 실이 조심스럽게 하나씩 풀려가는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차분하고 섬세한 눈으로 상처를 보듬는 성장소설을 만나보고 싶다면 '녹색 광선'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