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
앨러스테어 레이놀즈 지음, 이동윤 옮김 / 푸른숲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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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도 거기 있었고, 나도 거기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거기 있었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222 

 읽는 동안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던 티켓이 이게 맞았는지 몇번이나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책을 읽기 전에 나도 책을 읽고 나서 다음 탑승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세이렌이 되어 보겠다 했는데, 그게 복선이었을까. 우주로 나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탑승하고 보니 배였다. 어긋나는 디테일과 어딘지 모르게 찜찜한 대화들 속에서 성격이 급한 사람은 책장이 느리게 넘어가는 것만 같아 조급했다. 이게 넷플릭스라면 배속을 했을텐데, 궁금한 마음을 읽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해 원통했다. 먼저 '대전환'을 읽은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서 정말, 그렇게 재밌다고? 싶었는데 흐름의 '대전환'을 맞이하는 순간부터 정말, 그렇게 재밌어졌다. 

 "이번에는 그 때문에 죽을 것 같지 않습니다." 155 

 세계의 균열을 몇번이나 반복하는 동안 기묘한 불쾌감이 신경을 자극한다. 처음엔 타임리프 장르일거라 생각했는데, 게임 속 가상 현실인가 싶기도 했다. 게임을 많이 해보지 못해서 잘 모르지만 이야기 흐름이 있고 캐릭터가 퀘스트를 따르며 엔딩을 깨는 류의 게임에선 자유도에 따라 멀티 엔딩을 볼 수 있는 게임이 있는데, '캐릭터-사일러스'가 죽으면 새로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진 엔딩을 향해 전개되는 것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도 아니라면 여러번 반복되며 업을 끊어야만 벗어날 수 있는 삶의 윤회인가 싶기도 했다. 한명씩 같은 것을 느끼는 인물을 골라내고, 단어 하나가 다르게 쓰인 대사를 골라내면서 이들의 차이점이 뭘까, 구조물과 반복 사이에는 대체 어떤 연결점이 있는 것일까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궁금했다. 

 이 세계의 반복과 변주는 멀티버스 세계관을 보여주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떠올리게 한다. 각기 다른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사일러스들의 파멸을 지켜보다, 세계의 '균열'과 함께 느껴지는 위화감이 다층구조가 아닌 [매트릭스]**의 가상현실 속에 있는 것 같은 의심을 품게 한다. 사일러스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불편함-코실과 위화감-라모스의 존재가 무의식을 일깨우며 독자를 향해 메시지를 보내오는 것도 같다. 이 반복은 무엇을 위한 장치일까? 진실로 인도하기 위해서? 진실을 가리기 위해서? 진실을 파헤쳐가는 항로 위에서 독자는 진실 그 자체를 의심한다. 같은 것을 보고도 우리는 다르게 해석한다. 내가 보는 것과 남이 보는 것이 반드시-대부분 일치하지 않는다. 진실은 그대로이지만 진실을 해석하는 시선에 따라 달라진다. 다만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믿음-합의가 이 왜곡을 왜곡하여 같게 만든다. 심지어 요즘 사용하기 시작하는 챗gpt의 인공지능마저 자신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거짓 정보***를 섞는다. 대전환 안에는 그런 오류와 오작동이 들어있다. 그리고 책에서 주는 정보를 독자가 해석하는 동안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한다. 

 내용을 잘 모르고 읽을수록 재미가 보장되리라 확언할 수 있는 것이, 우주선 티켓인줄 알았는데 타고보니 배여서 어리둥절했다가 '아!'하는 순간부터 싸악 도파민이 돌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지는 사람은 바로 그 마음 그대로 '대전환'을 읽어보길 바란다. 바라기로는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는 영화 2025년 선정 세 손가락 안에 꼽는다. 이 내용을 영화로 만들지 않으면 대체 무슨 작품을 원작으로 삼아 영화를 만들겠는가. 탄탄한 스토리에 영상으로 만들었을때 매력이 더욱 살아날 상황들이 많고 한국인 관객들이 좋아할만한 요소가 가득이라, 이건 된다 싶은데 책표지에 영화화 관련 문구가 없어서 오늘부터 영화화 확정되길 기도 시작하기로 했다. 같이 기도할 파티원 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말 못하니 빨리 '대전환'하시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매트릭스 The Matrix, 1999
***인공지능 환각 AI Hallucination 인공지능이 실제 데이터나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정보를 생성, 제공하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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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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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내 앞으로 말뚝이 왔다" 

 처음 '말뚝들'에 대한 짧은 소개를 보고 이토 준지의 '속박인'*을 떠올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속박인'은 어느날부터 각지에서 움직이지 않고 똑같은 자세로 계속 서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며 시작한다. 말하지도 먹지도 않고 같은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속박인'들이 왜 생기는지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점점 몸이 굳어 끝내 부서져가는 기묘한 이야기를 그려냈다. '말뚝들'의 불가사의한 발생은 이 '속박인'의 등장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이 말뚝들은 이동한다,는 차이점이 있긴 하다. 속박인이 발생하는 이유와 말뚝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지는 것이 두 작품의 핵심인데 어떤점이 다를까 궁금했다. 괴이한 그림과 내용에 거부감이 없고 '말뚝들'이 흥미로웠다면 '속박인'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어쨌든 어떤 내용인지, 어떤 점이 다른지 호기심이 생기는 바람에 한번 훑어본다는 것이 단숨에 그대로 끝까지 다 읽게 되었다. 사건 전개가 빠르고, 곳곳에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배치해놓아 이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만 봐야지, 하고 웃으면서 읽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책을 다 읽은 채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납치, 불가사의한 말뚝들의 등장, 엉망으로 돌아가는 회사생활, 친구의 죽음, 좁혀오는 수사망 등 사건들이 주인공 장을 화려하게 휘감아 전개된다. 장만 보더라도 작가가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녹록치 않게 만드는데 재주가 있구나 싶은데, 그냥 잠깐 살펴보려던 사람마저 늦은 시간까지 책을 붙잡고 있게 만드는 것을 보니 독자의 다음날도 몹시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니 시작할 때 시간을 여유있게 잡아두고 읽어야한다. 

 말뚝이 언제 나올까 어떤 의미일까 조금만 보려다가 갑자기 자동차 트렁크에 실려 납치되는 장을 보는 순간, 자신이 왜 납치되었는가 합리적인 생각을 몇 가지나 떠올리는 이 평범한 직장인이 겪을 수 있는 규모의 사건이 맞나 얼이 빠졌다. 동시에 요즘같이 더운 때에 갇혔다면 꼼짝없이 주인공이 죽고 '말뚝들'은 들까지도 가지 못하고 말뚝에서 그친 단편으로 마감했겠다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무사히 풀려나게 되었고, 다시 평범하게 직장으로 돌아가 급작스러운 무단 결근의 사유를 '납치'로 보고하게 된다. 처음엔 그래도 출근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 직장인의 찐광기라 생각했는데, 평일에 납치된 직장인이라면 출근 걱정을 안했을리 없으니 K직장인의 삶을 현실적으로 담아내 웃펐다. 

 거기에 더해 회사 동료인 아정씨가 우동집에서 밥 먹자더니 갑자기 개인사를 털어놓는 것도 당황스러운데, 그 내용이 심지어 불륜 고백이고, 상대방을 밝힐 수 없어 남편에게는 장이라고 거짓말했다며 아니라고 해봤자 소용없을거라 말하는 내용에서는 잠시 사고가 멈췄다. 아침드라마 급 전개가 아닌가. 그와중에 전아정씨네 족보가 양반은 되려나 헤아리는 장도 어이없었는데, 애먼 사람에게 상간남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인성이라면 아정씨의 족보는 6두품은 커녕 불가촉천민이라 해도 될 법하지 않은가. 아정씨는 무슨 그런 머리채 잡힐 말을 자가제면 우동 면발 들어올릴때 하시니? 투덜거리다 그래도 우동은 맛있었다는 장의 말은 또 입이 벌어졌다. 그래, 어이가 없는 거지 입맛이 없는 건 아니니까. 내용이 자극적이라 우동은 간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장의 매콤한 일상에서 다시 그 문제의 말뚝으로 돌아가자면 어느 날 뉴스에 보도된 서해안의 말뚝들부터(25), 부천 시장 한복판에(120), 광화문에(131), 사무실 빌딩 로비에(158), 베란다 창문 앞에(169), 심지어 호텔 프런트까지 쫓아오는 말뚝(179)까지, 말뚝은 계속해서 발견된다. 사람들은 말뚝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 눈물의 의미를 헤아리다 보면 어쩐지 친숙하고 안타까운 얼굴을 닮은 말뚝을 나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우리 삶에서 가슴에 말뚝처럼 박혀들어간 누군가가, 순간이, 하나씩은 있기 때문에 말뚝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재미 안에 슥 밀어넣은 숨겨진 말뚝의 의미와 진실을 밝힐 수는 없으나 이 책 안에 준비되어 있으니 꼭 만나보길 바란다. 

 매콤짜릿한 현실을 제대로 담아낸 '말뚝들'은 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는데, 웃음과 의미를 모두 잡아낸 작품임에 공감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치는 현실의 인물들을 소설속에 갑자기 등장시켜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의외성과 재미를 준다는 것이다. 우동집 백종원(166)의 등장이나, 파일즈(말뚝들) 때문에 취소된 데이식스 콘서트(174), 무한도전이 방송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은 너무 현실적이라 진짜 장이란 사람이 존재하고 있나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만든다. 반대로 움직이는 말뚝을 생각하면 그럴 일 없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지만. 사진 찍을 때 나도 모르게 브이를 해버리는 탓에 제대로 긁힌 구린 독자(249)도 몰입해 순식간에 마지막 장까지 달려가게 만들어버리는 매력 넘치는 파란만장 미스터리 활극, 장편인줄 알았는데 읽다보면 단편같은 장편 '말뚝들'을 추천한다. 재미와 감동을 가지고 독자앞에 '말뚝들'처럼 나타나 다가올 것이다.


*이토 준지 <어둠의 목소리> 2004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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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 예술 - 창을 품은 그림, 나를 비춘 풍경에 대하여
박소현 지음 / 문예춘추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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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은 창문으로 본 세상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와닿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창문은 커지고, 시야도 넓어진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점점 눈에 들어오면서 내가 경험한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이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마침내 창문 너머에서 벗어나 진짜 세상으로 걸어 나가면, 이 방대한 세상에서 자신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깨닫게 된다. 모든 것들에 그저 감사한 마음만 남는다. 170" 

 어릴 적 살던 주택의 창문은 이런저런 스티커를 붙여놓아 빛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어느 오후면 알록달록한 색이 방바닥에 번져나가곤 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창꾸를 했던 셈이다. 그렇게 꾸며진 창문틀은 겨울이 되면 나만의 냉장고가 되곤 했다. 창틀에 올려두어 차가워진 커피우유나 탄산음료를 따뜻한 방에서 바로 꺼내 마시는 것이 좋아 덜 닫힌 겉창으로 찬바람이 새어들어오는 것도 몰랐다. 특히 방에서 나와 부엌 냉장고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았다.
 지금 사는 집을 보러 왔을때 바깥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며 확인했던 것이 창을 통해 집안이 얼마나 잘 들여다보이는가 였다. 불 켜진 집 안은 웬만한 고층이 아니고서야 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의외로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어떻게 조심해서 생활해야 할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창 밖의 시선이 덜 신경쓰이는 낮에는 반대로 블라인드를 열어두고 창 안에서 밖을 바라보곤 하는데 그때 보이는 풍경이 마치 그림같단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이렇듯 창을 의식하고 있었던 오래된 기억들과 일상의 순간들이 모여, 어디에든 철학이나 예술이란 말이 붙으면 괜히 더 궁금하고 알고 싶어지는 마음과 얽힌 덕분에 '창문 너머 예술'이란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어렵거나 낯선 작품들을 만나게 될까 싶었는데, 금방 샤갈의 그림을 발견하고 그 친숙함에 반가움을 느끼며 시작할 수 있었다. 특히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억압을 받으며 러시아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미국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들을 얼마 전에 읽었던 '여행 면허(패트릭 빅스비 저)'라는 책에서 상세히 봤었기 때문에 그 기억이 되살아 나 도움이 되었다. 더불어 요즘 한가람 미술관에서 샤갈의 특별전*도 진행하고 있으니 '창문 너머 예술'을 인상깊게 본 독자라면 발걸음을 옮길 곳이 분명해질 것이다. 

   " 마티스는 아멜리의 초상화도 여러 번 그렸지만 한 번도 그녀의 마음에 들게 그린 적이 없었다. 자신의 본모습보다도 못하게 묘사되는 초상화를 보면서 어쩌면 남편이 자신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거나, 혹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78" 

 사진을 잘 찍는 법에 대해 말할 때 대상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꼽는다. 물론 기술과 타고난 미감, 마땅한 순간을 찾는 인내같은 점들도 중요하겠지만 애정을 바탕으로 대상의 장점을 끌어내야 함을 강조하는 가르침은 잘 알려져있다. 현대의 사진처럼 과거 그림으로 대상을 표현하던 때에도 비슷한 요소들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남편이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애정을 의심하던 아멜리의 마음이 짐작된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 두명이 짝을 지어 상대방의 얼굴을 그리는 실기 과제가 있었다. 내 짝은 그리 친하지 않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귀여운 미인이었는데, 그 애의 얼굴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려냈더니 '지나치게 예쁘게 그렸다'는 이유로 그리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그 애를 예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예쁜 모델이었는데 예쁜애를 예쁘게 그렸다는 이유로 점수가 깎였던 것이 꽤 분했던 앙금이 있다.
 점수야 어찌되었든 그 애는 자신을 그린 그림을 마음에 들어했었고, 고마워했었다. 그 애의 이름은 잊었어도 그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유심히 바라보았던 그 얼굴만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마티스 역시 아멜리와의 불화, 사소한 다툼들은 시간이 지나 잊었어도 그녀를 그리며 바라봤던 얼굴, 그 날의 공간들은 계속해서 기억하지 않았을까. 예쁘게 그렸다고 점수를 깎일 일도 없는데 왜 굳이 아내의 얼굴을 실물보다 더 못나게 그렸는지 그 마음은 모르겠지만. 

 '창문 너머 예술'은 저자의 일상과 다양한 생각들이 작품과 엮여 마치 일기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그림과 예술작품에 대한 설명만이 주를 이루는 형식이 아니고 방송과 관련된 일을 해온 사람이라 SNS와 유명인, 대중들과 관련된 생각을 담아낸 내용들도 자주 등장한다. 어떤 문장에선 적지 않은 압박감과 괴로움이 아직도 풀어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해 많은 생각이 오갔다. 
 
 " 누군지도 모르는 존재들에 휘둘려 내 마음을 감옥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제 발로 그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고, 몇 글자의 댓글로 누군가를 그 감옥으로 보내 버리기도 한다. 의도가 의심스러운 한심한 댓글을 보며 비웃다가도,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싶은 마음에 우쭐해지기도 한다. ...중략... 가감 없이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들은 상처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투사처럼 보인다. 위로받으려고 올린 글에도 돌을 던지는 사람들, 누군가를 흠집 내려고 올린 글에 신나서 몰려드는 사람들, 그런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그걸 읽는 나도 있긴 하지만. 누군지 모르는 존재들에 끊임없이 휩쓸린다. 가끔은 나도 그들과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섬뜩하다. 39" 

 " 우리는 매일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세상과 소통한다고 믿지만, 그 안에만 머물기에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온 셈이다. 59" 

 아무런 이름도 대단한 방문자들도 없는, 별 볼일 없이 소소한 나의 SNS에도 본인의 오해로 굳이 무례하고 원색적인 말을 남겨두는 사람이 간혹 있다. 하물며 더 많이 불특정한 타인에게 노출되고, 관심에 기민히 반응 해야하는 이런 유명인들은 또 얼마나 고단한 일들을 겪었을까 싶었다. 요가(145)를 통해 자신의 몸을 일깨우고, 그림을 보고 글을 쓰는 시간을 통해 내면을 살펴보며 채워온 시간들이 책에 함께 녹아있어 공감하며 읽었다.  

 책에서 소개된 수많은 작품들 중 가장 마음에 남은 작품은 빌헬름 하메르스회의 <햇살에 춤추는 먼지 티클>이란 그림(105)이다. 왜 이 그림이었을까 생각해보니 책을 읽는 동안 반복된 '우리는 어떤 공간을 꿈꾸는가? (180)', '"어떤 풍경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가?"라고 하이데거가 물었다. (177)'는 질문에 대한 답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듯 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물건들로 차있지 않은 넓고  조용한 공간에 대한 바람이 투영된 끌림이었다.
 <햇살에 춤추는 먼지 티클>은 그저 창과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이 그려진 그림인데, 사실적인 빛에 대한 묘사도 좋았지만 그 공간이 비어있다는 점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가 표현한 다른 실내 공간들도 정적이고 정갈한 것을 보면,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추구했는지 모르겠다. 또다른 작품인 <달빛, 스트렝게제 30번지>는 햇살이 들어오던 창의 그림과 같은 공간을 두고 시간적 배경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한층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다른 인상으로 공간의 감상을 변주하는 점이 재밌다.   

 '창문 너머 예술'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내용이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예술 작품과 예술가에 대해, 그리고 저자의 생활까지 함께 녹아들어간 글이라 부담없이 감상을 나눌 수 있는 책이다. 예술이란 말에 거리감이 느껴져 망설이던 독자라도, 그저 어느 날 블라인드를 걷어 창문 밖을 바라보듯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책장 안의 예술 작품들을 넘겨 보아도 좋겠다. 


*마르크 샤갈 특별전: BEYOND TIME 5월 23일(금) ~ 9월 21일(일) 한가람미술관 제1,2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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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시대 - 독립을 넘어 쇄신을 꿈꾼 식민지 조선 사회주의 유토피아
박노자 지음, 원영수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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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시대'는 확실히 어렵다. 다만 극우 민족주의와 결합한 자본주의의 종말을 내다 본 4장에서의 '박치우'와 관련된 내용이 아니라면, 끝내 그 어떤 흥미를 갖지 못한 채 책을 덮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전작 중 인물들에 대한 탐구를 한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이 떠올라 지난 저작이 독립과 사회주의에 힘쓴 인물들을 조명했다면, 이번 '붉은 시대'는 그 시대의 흐름 자체- 사상 분파 궤적과 조선 시대의 전반적 사회분석 등 폭넓고 깊게 접근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민족 개념에 대한 정리가 되어있고 현재의 남한과 북조선의 상황이 담겨 있는 5장의 내용이 가장 접근하기 좋았기 때문에, 혹 '붉은 시대'를 시작하려는데 벽이 느껴지는 독자라면 5장의 내용으로 책을 시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1898년 민족이란 단어가 들어온 이후 "민족이 국민보다 더 넓은 개념, '국민'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여성과 청소년도 포함하는 개념(198)"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인상적이었다. 지금과는 결이 다른 주제가 되었지만, 민족 간 결혼의 적합성에 대한 시선이 같은 민족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는 내용도 흥미로웠다. 

 현재 동아시아 국가간의 관계가 어찌되었든 한국의 '붉은 시대'를 이야기함에 있어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각 국가별 상황에 대한 내용이 빠질 수는 없었다. 시대적으로 1900년대 초중반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일본과 강점기 상황의 특수성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6장 1945년, 김사량의 중국 해방구 관찰'과 '7장 조선인 여행자의 눈에 비친 붉은 수도 모스크바' 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 중 7장 러시아에 대한 내용이 새로웠다. 인종, 문화적으로 일본이나 중국보다 더 차별적이기도 하고 특히 성평등의 관점에서 차이가 두드러져 흥미로웠다.
 " 조선인 목격자들의 관점에서 일부 주목할 만한 변화는 남녀 관계의 영역에서 일어났다. 공산주의에 경도된 목격자들은 여성이 작업장에서의 자기실현과 모성을 결합시킬 수 있도록 고려한 모성 보호 제도와 사회화된 어린이 보육 시스템에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258" 는 내용이나 "소비에트는 남녀 모두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264"는 내용과 더불어 성노동자에 대한 제도와 문화적 차이가 함께 설명되어 페미니즘의 시류와 여성의 인권이 어떻게 다뤄지고 있었는가 생각해보게 되기도 했다. 

 책장 안에서 한참을 골몰하다 보면 저자에 대해 생각이 미치고, 읽는 동안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왜 이토록 낮은가 자괴감이 드는 동시에 왜 독자들에게 이런 괴로움을 안겨주는가 고민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해방과 건국 당시 새로운 한국 사회를 형성하는데 있어 큰 틀을 차지했던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부족했음을 절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을 접하기에 앞서 도움이 되는 평을 구하고 감상을 나누기 위해 글을 살폈을 독서가들에게, 배워가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남기는 후기의 부족함에 양해와 더불어 도움의 첨언을 바란다. 

 전세계적으로 심각한 극우화 현상이 나타나고 혐오와 차별의 정서가 만연해지는 근래의 분위기는 언급된 1919년과 또 다른 '전 지구적 반란의 해(14)'가 아닐까 싶다. " 대공황과 또 한번의 세계전쟁이 분출한 인종-민족주의적 "전체주의"의 광풍 속에서 객관성과 보편성을 강조하는 진보적 근대 문화 전체의 소멸(31)"을 지켜보던 1940년대 임화의 상황과 위태로운 지금의 국제정세는 비슷한 불안감을 야기한다. 때문에 왜 지금 '조선의 붉은 시대'를 재조명하는가 다시 돌아보면 '과거는 현재를 구할 수 있는가'를 묻는 질문에 대한, 자본주의의 위기와 극우화를 향한 쇄신의 길을 제시하려는 저자의 답변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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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어린이들
이영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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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어린이'에 대한 인식이 태동하기 시작했던 것에 비해,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 사회는 그보다 훨씬 발전하고 윤택해졌지만 어린이에 대한 의식은 다시 퇴보하고 있다. 오히려 어린이의 미성숙함에 대한 몰이해,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양육관, 복지의 사각, 노키즈 존, 일관성 없는 교육 정책, 폭력/선정적 콘텐츠에 무분별한 노출 등 사회 안에서 어린이를 방치하고 지우는 것에 더욱 몰두하고 있는지 모른다. '제국의 어린이들'을 보며 왜 지금 다시 '어린이'이고 '강점기의 어린이들'인가를 생각했다. 특히나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시기에 "일본인 어린이들 글에서는 전쟁이라는 국가의 짐을 내려놓은 모습이 보일 것이고, 검열을 마친 조선인 어린이들 글에서는 민족 해방이라는 짐을 내려놓은 모습이 보일 것(32)"이라는 시선의 진위여부와, 방향성이 납득 가능한 것일까 의문을 가진 채 읽었다.   

 전쟁과 식민지배와 같은 현실은 '아무 죄 없는 아이들'과는 별개의 문제로 봐야함이 맞을까. 일반 시민의 삶은 세상의 거대한 흐름에 그저 휩쓸릴 수 밖에 없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어린 아이라면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세상의 현실을 일상과 생각을 표현한 글에 담아내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과연 "완전한 '개인'의 형성을 목표로 '어린이다운 표현'에 중점을 둔(32)" 결과물이 맞을까. 가장 우수작으로 선정된 [수업료]마저도 일본에서는 식민지 조선 아이만을 대상으로 수업료를 걷는다는 차별성 때문에 드러내놓고 소개하기를 꺼렸다고 하는데, 글이 쓰여지는 과정에서 선정되는 기준에서 추구하는 주제의식이 오히려 더 분명하지 않았을까. 이 경연대회의 진의가 불미스러운 차별과 억압이 존재하는 식민지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혹은 이미 세뇌되어 인식조차 되지 않음인지 살피며 읽었다. 어쩌면 이를 의식하는 것은 현재의 독자가 강점기를 역사적 관념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고, 과거의 아이들 세계에는 그를 초월하는 순수성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기획인지 알고 싶었다. 

 " 물론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에서 조선인 어린이들이 출품한 작품들이 일본인 어린이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착하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아이들이 열등한 식민지인의 콤플렉스를 일찌감치 내재화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선생님의 사랑을 얻고 싶었을 수도 있다. 혹은 이 대회 심사위원들이 이런 주제 의식을 가진 작품들만 가려 뽑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62" 책에서도 같은 부분을 지목하고 있지만 두 나라 아이들의 글을 통해 생활상을 비교 분석하는 내용을 보며 불쑥 공감하기 어려운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특히 " 일본의 패전은 그동안 일본인과 조선인 사회를 하나로 묶어 왔던 제국의 이념과 가치관을 한꺼번에 무너트렸고, 이 변화는 조선 반도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왔다. 패전을 며칠 앞뒀을 때부터 하얀 옷을 입고 길거리를 당당하게 걷던 조선인들을 보며 불안을 느끼던 재조 일본인들은 두려움 속에서 숨죽여 지내다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312" 같은 내용은 남의 땅을 식민지 삼아서 배불리고 살다가 패전 후에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일텐데, 두렵고 어쩌고 얼마 되지 않는 재산만 가지고 돌아가야 했다는 구구절절이 읽는 마음을 더 좁아지게 만들기만 했다. 

 '제국의 어린이들'은 과거 어린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시대와 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장점과 성숙하고 순수한 표현이 돋보이는 글짓기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매력을 가졌다. 하지만 글 하나하나를 살피는 동안에도 눈 앞에 펼쳐진 장면 밖의, 숨겨지거나 생략된 배경을 짐작해 그려보려는 시도를 멈출 수는 없었다. 일본 아이들에게 패전 이후 반성과 교육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인정과 사과, 책임이 없고, 조선 아이들에게 광복 이후 '파시즘적으로 주입된 식민지 의식 교육(227)'과 친일행위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잡음이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곱씹게되었다. 우리의 광복에 대해서도 일본인들은 원폭피해와 패전으로 기억할 뿐, 전쟁과 식민지배 가해자로 인식/인정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저마다의 마음을 담은 아이들의 소담한 글을 기껍게 읽으면서도 세상의 어두운 부분에서 시선을 옮길 수 없었던 것은 아쉬웠다. 문득 지금 시대의 아이들은 어떤 글을 쓸까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의 어린이들'이란 공모가 있다면 여전히 놀랄만한 순수와 예상치 못한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궁금함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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