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고전의 숲 - 삶이 풍요로워지는 여덟 번의 동양 고전 수업
강경희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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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필사를 시작했는데, 정말 이제 막 시작했는데 '어른을 위한 고전의 숲' 출간 소식을 봤을 때 지금 딱 필요했던 책이라 여겨졌다. 아무래도 고전은 필사하기 좋은 문구들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는데 다르긴 했다. 읽다보니 필사하기 좋은 문구들이 지나치게 많았다. 예전에는 뻔한 소리라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을 내용도 이것도 내 마음 같고, 저것도 내 마음 같아졌다. 그동안 나이만 헛먹었나 싶었는데 드디어 어른이 된 것일까 고전이 지루하거나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고 흥미롭고 재미있다니 좋으면서도 어떤지 씁쓸하다. 어쩌면 이 책이 사회초년생, 이제 막 성인이 된 이들에게 더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야 공자님 말씀을 좀 알겠구나 싶은 중년만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연령층에게 공감과 의지가 될만한 내용이 많다. 더불어 저자가 글을 잘 써서 받아들이기 쉬웠던 점도 있다. 

 티비 프로그램 중에 일반인이 나오는 연애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서 서로의 감정을 주고 받는 프로그램은 매번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놀라움과 재미를 준다. 굉장히 자극적이다. 방송이란 것에 준비되지 않은 일반인 출연자들이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던 말과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고스란히 보여진다는 것은 물론이고, 천천한 흐름에서라면 이해가 될 만한 면도 빠르게 편집되어 오해를 유발한다. 대체 왜 저런 언행을 하는 것일까 상대방을 어리석게 여기는 마음이 들 때면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고서는 판단하면 안된다는 말을 떠올린다. 누군가의 언행을 보고 그를 평가하고 비난하고 싶어질 때 쉽지는 않지만 "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사태의 일부라는 것, 입장이나 관점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다른 면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시비판단이나 독선, 아집 등으로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p120 " 는 내용을 떠올릴 것이다. 어떤 사건들이 시간이 지난 뒤에 다른 국면을 제시하여 놀라움과 반성을 야기하는 것처럼 남보다 자신을 우선하여 되돌아보기를 또다시 다짐한다. 

 " 동파는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해하거나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므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손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냥 놓아두는 것 이야말로 마음의 짐을 가볍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p114 "
 첫 직장을 다닐 적 일이다. 금요일 퇴근 전에 내가 했던 일에 큰 실수가 있었음을 발견했다. 퇴근시간 이후엔 프로그램이 막히기 때문에 일이 어찌되었든 집에는 갔고, 그 주말 내내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어떡하지' 걱정하느라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입맛도 없었다. 월요일이 되면 문제를 발견한 누군가 나를 혼낼 것 같고, 큰일이 난 것만 같고, 어찌됐든 다 망해버린 것만 같았다. 늘 그렇지만 그때는 더욱더 월요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세상이 망해서 출근을 안해도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커다란 불안과 공포를 안고 회사에 갔더니 주말 내내 나를 괴롭혔던 문제는 사실 내 업무 과정에서의 실수가 아니라 회사 시스템 내에서의 오류로 야기된 것이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때 나는 뭔가를 깨달았었다. 내가 그토록 걱정하고 불안해했던 문제들은 생각보다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없었다. 내 인생은 그런 문제 한두가지를 이유로 내가 걱정하는 것만큼 망가지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시간을 낭비하고 괴롭게 만드는 것은 나의 불안이었다. 한때 너무나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 이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지나고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 뒤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278), 실수는 날 어떻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난 실수를 어떻게 할 수 있다, 어쩌라고' 같은 직장인 마음가짐을 얻었다.

 그럼에도 " 실패라는 말은 언제나 두렵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가능한 한 실패를 경험하지 않기를 바란다. 실패로 인해 겪는 마음의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아프다. 그처럼 자신이 초라하고 쓸모없고 무능해 보이는 때가 없다. 때론 남 탓, 부모 탓, 세상 탓 등 문제를 외부로 돌리기도 하지만, 실패가 가져다주는 쓰라림의 가장 밑바닥에는 결국 자기 자신의 무능함을 마주해야 하는 고통이 똬리를 틀고 있다. 특히 능력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그 쓰라림이 더 클 수 밖에 없다. p177 "  과거의 나를 불안에 떨게 했던 것도 실패가 두려웠기 때문 아닐까. 그때의 나는 실패가 부끄러웠다. 아마 요즘의 실패는 그보다 더 할 것이다. 실패 후에 회복이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하기가 어려운 사회에서 실패의 리스크는 치명적이다. 실패하는 것이 스스로의 무능을 드러내는 수치와 고통뿐이라면 차라리 낫다. 지금의 실패는 생존에의 위협에 닿아있다. 실패를 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고? 실패를 하면 길이 막힌다. 요즘 세대는 앞에 놓여진 길이 최대한 막히지 않도록 가장 안전한 길을 찾아 나아갈 수 밖에 없다. 막힌 길 앞에서 뛰어넘을 계단을 만들기도, 뚫을 구멍을 내기도 시간을 너무 많이 소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창한 뜻을 세우기보다 그저 남들만큼만 되고 싶은 세대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노력을 믿으란 말을 할 수 없다. 대신, " 실패의 모든 원인이 자신의 능력하고만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실패를 전적으로 자기 무능의 탓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많은 다른 요인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열어놓는 것이다. p203 " 탓을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실패는 복합적인 요인과 상황의 산물이라는 점을 기억하라고 해두고 싶다. 

 앞서, 필사를 시작하면서 '어른을 위한 고전의 숲'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말을 했는데 책 안에서도 글로 쓰기에 대한 내용이 나와 반가웠다. " 그런데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바로 글쓰기다. 글로 적는다는 것은 모호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을 종이 위에 문자로 옮기는 행위다. 종이에 적힌 것은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므로 직관적인 관찰 대상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머릿속에서 어지럽고 복잡한 실타래처럼 엉클어진 것을 종이 위에 문자 형태로 고정시켜 놓는 것은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나 감정을 구체적으로 실체화시키는 일이다. p213 - 그리고 적은 것을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면 현재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지, 사건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어떠한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고통 사이에 틈이 생기면 그 고통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마침내 자신의 삶에 닥친 고통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때 비로소 치유와 성장이 시작된다. p225 " 전자책의 등장으로 종이책의 입지마저 흔들리는 때에 직접 종이 위에 손으로 글을 적는 필사는 또 얼마나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필사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항상성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글로 적는다는 행위 안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내용을 보니 좀 더 의지가 다져졌다. 

​ 기대보다 재미있게 읽었고 얻어가는 것이 많았다. 선입견을 버리고 고전에 발을 들여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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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사도 유행이 될 수 있을까? 
간만에 필사를 시작해서 필사에 대한 ㅇ이야길 쓰려고 했더니 상품도 이미지도 넣을 방법이 없다 
글씨크기 조차 바꿀수없는데 투표넣기는 활성화되어 있다.. 페이퍼 어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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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목민심서 (다산의 지혜 에디션) 다산의 지혜 에디션
정약용 지음, 다산연구회 편역 / 창비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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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이 공직에 오른 사람이 갖춰야 할 처신인지라 공과 사의 구분을 확실히 해야 함을 시종일관 강조한다. 개인적으로 받은 
 서신을 읽을 때는 관용초를 끄고 개인초를 켜서 읽었다는(p87 율기 6조 5. 씀씀이를 절약함) 내용은 인상적이기도 하고, 회사에서 개인 전자기기 충전을 금지한다는 일본의 사회 분위기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정선 역시 한국인이라 이는 '지나치'긴 하단 내용도 덧붙여져 있어 재밌었다. 공직에 몸담고 있는 것이 아니어도 공공의 물품을 아끼고 주어진 몫 이상의 것을 탐내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직장에서 제공하는 편의를 최대한 활용하자는 '소확횡'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사회 분위기에 반해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깨닫게 된다. 

 여러모로 자극이 되고 생각할 점이 많지만 모든 내용이 교훈적으로 공감되는 것은 아니다. " 내가 바야흐로 힘써야 하는데 어찌 남을 책망하겠는가? 나를 예로써 규율하고 남을 보통사람으로 기대하는 것이 원망을 사지 않는 길이다. p73 율기 3. 집안을 다스림 " 같은 내용에서 남=백성=사람 들을 가르치고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한정해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언뜻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하게 대하라는 의미로 보이지만 " 백성들은 조, 쌀, 실, 삼 등을 내어서 위를 섬기는 것을 본분으로 여기기 때문에p120", "백성이란 즐거워도 머물러 있고 괴로워도 떠나지 못한다. 몸이 토지에 박혀 마치 밧줄에 묶여 매를 맞는 것과 같으니 비록 그곳을 떠나지 않더라도 고통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p69" 같이 애민과 우민의 사이에서 사람에게는 계급이 있고 그에 따라 주어지는 책임과 소양이 다르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음이 보이기도 한다. 

 또 하나, 의외로 외모에 관해 박하게 평하고 구분짓는 내용이 종종 나오는데 " 가장 불쌍한 것은 못생긴 수급비이다. p176 / 무릇 사람 보는 법은 본래 위엄 있는 모습에 있다. 무인은 용모와 풍채가 더욱 중요하다. 키가 난쟁이 같고 누추하기가 농사꾼 같으며, 물고기 업에 개 이마를 가져 그 모습이 괴상한 사람은 앞에 나란히 세워서 백성들을 대하기 어렵다. p179 이전 6조 3. 사람 쓰기 " 다른 부분들은 지나치리만큼 공정하게 처신해야 함을 강조하는데 이런 민감한 내용이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드러나있는 점이 달라진 시대와 인식을 느끼게 해준다. 

 목민심서를 두고 오랜만에 필사를 시작했다. 한동안 필기구를 잡지 않은 손에서 펜이 헛돌았다. 읽는 중간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고르고 손에 힘을 주어 따라 적으면서도 속으로는 더 보기 좋게 쓰고 싶다는 조바심이 일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하는데 내 것은 형편없어 보여 공개하고 싶지 않다가도, 그런 생각이 들면 또 시작한 필사를 금방 그만두게 될 것 같아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럴 때 " 어리석은 자는 배우지 못하고 무식해서 산뜻한 옷에 좋은 갓을 쓰고 좋은 안장에 날랜 말을 타는 것으로 위풍을 떨치려고 한다. p28 부임 6조 2. 부임하는 행장 꾸리기 " 는 문장을 떠올렸다. 남의 눈에 보기 좋게 꾸며보이려는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자고, 아무리 꾸며도 내 것이 아니면 남의 눈에도 가치없음이 드러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을 비우는데 도움이 됐다. 

 고전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는데, 지루하고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이미지는 벗어나고 시대를 넘나들며 관통하는 삶의 지혜에는 감탄하며 흥미롭게 읽었다. 고전 읽기, 필사에 도전해보고 싶다면 목민심서로 시작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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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역사적인 도서관 - 우리 근현대사의 무대가 된 30개 도서관 이야기, 제30회 한국 출판 평론상 출판평론 부문 우수상 수상작
백창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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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투모로우'에서 이상기온 때문에 뉴욕이 물에 잠기고 기온이 급격히 낮아져 주인공 일행이 뉴욕 공립 도서관으로 몸을 피하는 내용이 나온다. 도서관은 튼튼하게 지어졌으며 충분한 대피 공간이 있고 유사시 활용할 땔감(!)들도 대량 보유하고 있었다. 세상이 망하게 될 만한 상황에서 인류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쌓아올린 거의 모든 것에 대해 기록해둔 도서관의 실용성이었다. 새로 생기는 도서관들이 교육을 받는다면 필수로 봐야할 영화로 투모로우를 꼽지 않을까. 이 영화를 보고 난 뒤로 재난이 오면 어쩌면 도서관이 가장 최후까지 남을 공간이 될 것 같아 도서관에 가서 숨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재난 상황에서 도서관으로 도망가야지, 계획을 세우는 것은 둘째치고 하다하다 도서관에 대한 책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긴 시간동안 책을 읽어왔으니 너네 집은 어떠냐며 호구조사를 좀 해봐도 그렇게 큰 실례는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종종 도서관의 책들을 데리고 나와 바깥 공기를 마시게 해주고 다시 들여보내는 산책을 함께 해놓고, 지금껏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 외려 무심했을지도 모른다.

 배우고 담은 것이 많은 댁이라 그런가 책들의 집이라 할 수 있는 도서관의 역사는 깊다. 그리고 대부분 오랜 시간을 굵직한 사건들 틈에 자리하고 있어 굴곡있는 여정을 지나왔다. 그토록 역사적인 도서관들은 어김없이 일제의 횡포 아래 명맥이 끊겨 있거나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오점을 달고 있다. "역사와 전통이 빛나는 대학도서관을 갖지 못한 이유(p29)"는 소제목만 봐도 또 일본이구나 싶어진다. 책을 펼치고 백여 쪽을 읽는 내내 도서관이 외압과 매국에 시달리는 내용이 이어진다. 심지어 우리가 쓰고 있는 도서관과 사서라는 단어조차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용어(p394)"가 그대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도서관의 수난은 강점기가 지나고 나서도 끊이지 않는다. 우리가 쟁취한 민주주의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잖는가. 평화로운 미국은 자연재해를 피하기 위한 배경으로 도서관이 쓰이지만 격동의 근현대사를 가진 우리의 도서관은 말 그대로 피난처이자 싸움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도서관은 민주주의를 담고 있는 책의 보관처가 아니라, " '투쟁의 현장'으로, '민주화의 무대'로 기능(p255 도서관이 '민주주의의 최전선'이었던 시절)"했다. 이 역사는 다시 기록이 되어 도서관에 남겨져있다.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다양하게 존재하는 '국가도서관'의 기능과 의의를 꼬집은 내용(p338 한국에 '국가도서관'이 많은 이유?)이다. 대학도서관이 가진 역사와 상징성을 잘 보여주었던 것처럼 국가도서관이 가진 문제점과 한계 또한 잘 정리했다. 특히나 우리 세금으로 운영이 되는 시설이니(p366) 이용률은 적으면서 '관장' 직위나 문제시 되는 현실을 알게되는 꽤 불만스럽다. 도서관이란 시설은 그 자체로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 여겼던 단순함을 재고하도록 만들었다. 도서관에 대한 책을 읽게 되면서 그저 역사성이 있는 유명한 도서관에 대한 정보를 조금 얻고 가까운 몇 곳을 직접 방문해보면 좋겠다는 가벼운 기대를 했는데 북한(p368)이나 개신교(p426)와 관련된 내용까지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북한 도서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니(p384). 책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들이 많이 생겨났다지만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문화를 조성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어렸을 때 동네 주민센터 이층에 아주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사무실 크기 공간 안에 서너줄 쯤 되어 보이는 칸막이 책상들이 있고 사방 벽에 이러저러한 책들이 꽂혀 있었다. 찾는 사람도 별로 없어 침묵이 내려 앉은 작은 도서관은 갑갑했지만 그 안에 있는 책들 아무거나 마음대로 가져다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때 어떤 책을 봤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도서관의 분위기만은 아직도 기억 난다. 중학생 때까지는 공부를 하러 곧잘 찾아갔지만 더 시간이 지나 주민센터의 이름이 몇 번 바뀌면서 이층의 도서관이 없어지고 휴게공간으로 바뀌었단 소식을 듣고 섭섭했었다. 박완서라는 작가를 탄생시킨 "어린 날의 찬란한 빛(p418)"까지 되지는 않지만, 그 작은 도서관의 존재는 변변치 않은 사람이 가진 얼마 되지 않는 좋은 점을 남기는데 분명한 도움이 되었다. 요즘 정부의 긴축 재정으로 지역의 작은 도서관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때의 생각이 떠올랐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줄고 사람들의 마음이 식고 생각이 굳어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사유하도록 해야 할 텐데. '이토록 역사적인 도서관'을 읽으며 도서관이 어떤 때에 힘든 시기를 지나왔는지 자연히 알게 된다. 특히 경복구의 집옥재를 수식하는 '작은 도서관'과 "주인이 제 역할을 못 할 때 나라는 어떻게 될까(p275)"는 내용은 요즘의 상황을 연상토록 한다. 얼마 되지 않는 이용자들이 안타까워하는, 특히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크게 체감하는 작은 도서관들의 고난은 지금 우리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1873년 프랑스 해군 쥐베르의 '조선 원정기' 기록에 따르면 "이 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 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고 했다. 남의 나라에 싸우러 와서 잘도 봤네 싶지만, 인상적인 기록이다. 요즘은 책 읽는 사람이 드물다. 독서가 우리에게 자극을 주기까지 속도가 느리고, 직관적이고 공감각적인 콘텐츠들 사이에서 번거로운 이해의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겠다. 그렇다고 해서 독서에 대한 열망이 사그러진 것만은 아니다. 도서전에 가는 것을 팝업스토어를 찾는 것처럼 힙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십수년 전에 독서 열풍을 일으킨 독서장려 티비 프로그램 재방영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세계적 문학상 수상작에 대한 관심으로 서점에 오픈런을 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읽는다. 도서관이 시대의 굴곡에도 종하지 않고 그 역사를 계속해서 이어나간 것 처럼, 책을 읽는다는 오래된 행위는 앞으로도 그 역사를 이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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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위태로운 천년의 거인들 - 개발과 손익에 갇힌 아름드리나무 이야기
김양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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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나무가 더 좋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그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은 흐린 날, 잎을 모두 떨군 채 염주 같은 콩깍지를 매단 회화나무를 만난다면 울컥하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어쩌면 펑펑 울어버릴지도 모릅니다. p47"

책을 읽기 시작할 때쯤 사는 곳 뒤편으로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공사가 시작됐다. 그동안 흉물이었던 넓은 부지가 정리되어 마침내 아파트와 공공시설에 들어온다고 하니 반가운 소식이었다. 새로 아파트가 들어올 부지 옆으로는 오래된 이차선 도로가 길게 뻗어 있는데, 그 도로 옆에 난 좁은 인도에는 그만큼이나 오래된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가로수로 서 있었다. 공사가 시작되는 건 반가운 소식이었으나 공사가 시작된 것을 체감하게 됐던 것은 바로 그 오래된 가로수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전부 사라져 버린 일 때문이었다. 사라진 수십 그루의 가로수. 가로수라고 하지만 아주 오래 되어 그 아름이 사람 혼자 양팔로 감을 수 없이 크게 잘 자란 나무였다. 가로수들이 있던 자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어설프게 시멘트로 메워져 있었다. 아까운 나무를 어디 옮겨심었길 바라지만 전에 비용 문제로 사람들이 옮겨심기보다 잘라내고 다시 심는 방법을 더 선호한다는 얘길 들었던 터라, 수년간 지나왔던 플라타너스 우거진 불편하고 좁은 길이 사라진 것을 혼자 아쉽게 여겼었다.

" 플라타너스는 매일 이산화탄소 3.6킬로그램을 흡수하고 산소 2.6킬로그램을 방출하는 등 대기 정화 능력이 은행나무의 5.5배, 느티나무의 3.5배에 이른다. 또 활발한 증산작용으로 도심 열섬을 누그러뜨린다. 이런 효용성 때문에 플라타너스는 전 세계 주요 대도시의 숲조성에 널리 쓰이는 나무 중 하나다. 하지만 한국 등 일부 나라에선 자동차 위주의 도시계획으로 인해 플라타너스가 가로수로 오래 살지 못하고 사라졌다. 찻길을 넓히려면 큰 나무는 방해만 된다. p79 "

책에서도 길을 넓히기 위해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사라져가는 플라타너스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깊이 공감됐다. 수미터는 됨직히 크고, 잎마저 넓직해 여름이면 우산없이도 비를 피해 걸을 수 있고, 가을에는 떨어져 내리는 큰 잎에 머리며 어깨를 맞기도 했는데 이제는 다시 걸을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전에 반겼던 뒷편의 공사도 함께 들어올 새로운 편의시설도 처음처럼 기껍지 않아졌다.

사지가 절단된 채 쫓겨난 500살 나무 부산 회화나무(P37)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일명 가로수 독살사건이라 불리는 기가 막힌 일이 떠올랐다. 서울 서대문에 있는 한 커피 체인과 관련된 이야기다. 이 커피 체인 가게 앞에는 죽어서 썩어가는 가로수가 제거되거나 새로 교체되지 않고 그대로 서 있는데, 그 이유가 참 어이없다. 커피가게가 들어오면서 건물 앞에 있던 가로수를 없애고 싶었으나 가로수 다섯 그루 중 두 그루만 제거 허가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허가가 떨어진 두 그루 뿐만 아니라 나머지 나무들도 연이어 죽어버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구청에서 경찰에 수사를 맡기니, 건물주가 나머지 나무도 없애고 싶어 몰래 제초제를 뿌려 죽였음이 드러났다. 범인도 자수를 한 이 사건을 검찰-또!...-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서대문구에서는 개인이 사욕을 위해 가로수에 해를 입힌 "이 안타까운 사실을 기억하고 사회적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단다. 그대로 두었다면 커피 가게 2층 창밖으로 나무가 우거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을, 얕은 생각과 부끄러운 이기심만 그대로 드러낸 표지판이 세워진 죽은 나무만 남아있게 된 것이다. 우습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이다.

"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릅니다. 10여 년 전부터 천연기념물에 대한 '외과수술'은 더 이상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가로수나 공원 나무, 보호수 등에 대해선 여전히 '외과수술'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가까운 이웃 생명체인 나무의 생리에 대해 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무를 사람인 양 '속을 채웠으면...'하고 어긋난 관심을 투영합니다. 참고로 '외과수술'은 조경업체가 하는 일 중에서 이익이 많이 남는 일 중 하나라고 합니다. 건강한 나무를 오래 지키고 싶다면, 차라리 건드리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p72 "

나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훼손되는데, 주로 개발의 이유로 잘리거나 옮겨가게 되기도 하지만 종종 볼 수 있는 나무 안에 속을 채운 '외과수술'들도 보호가 아닌 훼손에 해당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은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외에도 드러난 뿌리 부분에 흙을 덮는 복토(P63)도 나무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니 몰랐다. 특히 오래된 나무들, 보호수들이 사람들의 시선으로 주는 어긋난 관심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도 안타깝다. 그동안 '몰랐다'는 이유로 파괴인줄 인식 못했던 것이 또 있는데 제주 비자림 숲길이다. 몇 번 다녀온 적도 있는데 그 사이를 난 도로를 통해 다녀왔으면서도 그 아름다웠던 길 자체가 숲에는 문제가 되었단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p115) 더불어 제주의 환경을 파괴하는 요인으로 수많은 골프장 문제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서울과 가까운 고양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p203 고양 산황산 : 산 깎고 골프장 지어 자연을 살리겠다는 모순) 골프라는 운동을 긍정할 수 없는 개인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영화 같은 것을 보다보면 잔인한 장면을 거리낌없이 잘 보는데 책을 읽다 마주친 잘라진 나무 사진이 그보다 더 잔인하게 여겨져 눈살이 찌푸려졌다. p144에는 잘라져 밑동만 남은 전주의 버드나무들 사진이 실려 있는데 멀리 다리가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안에서도 참혹함을 느낀다. " 전주시는 무슨 명분으로 이 버드나무들을 벌목했을까. 전주시 하천관리과 담당자는 최근 치수 패러다임이 '환경(보호)보다는 인명,재산이 더 중요하다'로 바뀌었다며, 나무는 비가 오면 쓰러질 수 있어 제방 등 하천 시설을 손상할 수 있기에 벌목이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p146 " 나무가 훼손되는 대부분의 상황에는 늘 이렇게 사람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여가활동인 등산도 숲을 망치는 주범 중 하나였는데, 답압(*사람들이 밟아 땅이 단단해지면서 황폐해지는 현상 p224)이란 말과 문제점을 배우게 되었다. 건강을 위한 좋은 취미 쯤으로 생각했던 등산이 자연의 건강은 오히려 위협하는 문제였다. 생각해보니 제주도에 갔을 때 일부 오름들은 쉬는 기간을 갖고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 일정 기간동안은 자연이 회복할 시간을 주기 위해 방문을 금하는 것이다. 또 한라산은 등반을 위한 예약을 한다. 그마저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굳이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사람 길(P213)'이 더 줄어야겠지만, 다른 산들도 입장객 수 제한과 안식년을 두고 회복 기간을 가진다면 장기적으로 더 좋은 보호 효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산을 타고 있고, 그만큼 '이용압력'은 커지고, 생물다양성은 위협받는다. 특히 오랫동안 인간의 교란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높은 산의 생물들은 위협의 수위가 절멸 수준으로 치솟는다. p225"

등산 뿐 아니라 이용 목적에 따라 심어졌다가 잘리고, 그나마 운이 좋아 뿌리와 가지가 이리저리 잘린 채로 옮겨지고 다시 심기는 등 수백년을 사는 나무들은 백년도 채 살지 못하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시달린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란 책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면서 이런 인간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정말 책을 읽다보면 '아낌없이 빼앗기는 나무'가 더 맞지 않나 싶어진다. 언제 나무가 주고 싶다고 했나? 주겠다고 한 적이 없는 나무에게서 우리가 얻어낸 것들은 받아온 것이 아니라 빼앗아 온 것이나 다름없다. " 나무는 이용할 대상이고, 그것이 나무의 존재 이유라는 생각이지요. 정말 나무는 인간에게 이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걸까요? p99" 서울 봉산의 편백 인공림에 대한 부분에서는 깨어진 생태계 균형에 대한 주먹구구식 행정처리 문제와 함께 최근 공공의 적으로 떠오른 러브버그 이야기가 등장한다. 너무 많은 개체수의 벌레가 갑자기 온갖 곳에 나타나기 시작해 심지어 사람에게도 붙어서 나도 참 끔찍하게 생각했는데 " 사실 러브버그도 1~2주면 사라진다. 하지만 사람은 기다리지 않는다. p194 "의 문장을 읽으며 내가 그랬구나 깨달았다. 편의를 우선으로 하고 잠시의 불편이나 지체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던 태도를 돌아보았다. 이제 곧 날이 풀리고 한동안 러브버그가 나타나 괴롭겠지만 해충도 아니라던 그 벌레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안의 불편을 이제는 좀 여유롭게 지나보내게 되겠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나무의 모양을 세세히 보여주는 사진이나 그림이 적어서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자세한 모양은 저와 여러분의 숙제로 남겨두겠습니다. 뒷산에 올라 식물도감을 펴놓고 잎 모양을 비교해보고, 털이 있는지 없는지 만져보고, 수피가 갈라진 걸 느껴보면 어떨까요. 봄에는 고양이 꼬리처럼 폭신한 연노랑 수꽃도 관찰해보고요. 참, 신갈나무는 잎자루 아래쪽에 사람 귀처럼 생긴 작은 잎이 돋아있습니다. 꼭 확인해보세요. 가을에 도토리를 주워다가 키를 재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요. 우리는 참나무의 나라에 살고 있잖아요. P257 " 뒷부분에서 이런 아쉬움을 꼬집은 내용을 만났다. 몇 해 전부터 길을 다닐때 보이는 식물들과 새에 관심이 가서 가능한 사진도 찍고 검색도 해서 이름을 찾아보곤 했는데 아무래도 잘 외워지진 않았다. 특히 보기에 낯설거나 예쁜 것은 여러번 찾아보곤 했는데 익숙하게 보이는 나무의 이름은 알아볼 생각을 못했다.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나무가 참나무 종이라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도통 머리속으로 그려지지 않아 민망했다.

이제 와 덧붙이건데, 나의 말 못 할 비밀 중 하나는 내가 은행나무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별히 다른 나무들보다 더 아끼는 것도 아닌데 어느새부터 은행나무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은, 특히 가을에는 더더욱 꺼내기도 힘든 말이 되었다. 가을이면 길 여기저기 떨어져 밟히고 냄새를 풍기는 은행 열매가 공공의 적이 된 뒤로 사람들은 은행나무를 싫어한다, 냄새난다, 다 베어버려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 무시무시한 말을 공감하는 척 듣다가 슬쩍 근데 난 은행나무 괜찮던데 하고 두둔한다. 병충해에 강하고 계절마다 예쁘고 달리 가꾸지 않아도 잘자라고 열매도 맛있다고 주절거릴 때면 분위기가 떨떠름 해진다.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 좋아하는 편에 가까운데 별다른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고 예전에 어느 홍보문에서 은행나무의 장점을 알리는 글을 보고 그렇구나, 하고 납득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바닥에 떨어져 으깨진 은행냄새도 그리 싫지 않아졌다. 나같은 무비판수용러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나처럼 또 그렇구나, 하고 이해해서 나무와 자연에 대해 더 가깝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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