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페퍼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는 상실과 경직, 고착으로부터 시작된다.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무언가가 시작되려하는 시점은 늘
그렇듯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포화된 고인물에서부터다. 우리의 아서 페퍼는, -이후로 페퍼는- 그의 삶에서 더는 시작이란 것은 없을
것이란 다소 우울한 조건에서 존재한다. 페퍼는 거진 일흔이 다 된 나이의 노인이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왔다. 40여년의 결혼
생활을 통해 삶의 한 톱니바퀴처럼 되어버린- 평생동안 좋은 동반자로 사랑해왔던 아내, 미리엄과 사별한 뒤 그 상실을 이기지 못하고 집 안을
동굴처럼 배회한다. 그에게는 미리엄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이 있었지만 그들은 미리엄의 장례식에 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페퍼는 굳어가는 고목처럼
미리엄이 없는 집 안에 점점 자신을 가두었고 그런 그를 찾아오는 방문자는 이웃의 버나뎃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끔 찾아오는 버나뎃의 방문에도
마치 집에 없는 것처럼 숨을 죽이고, 응답하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면 마치 아무 기대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아들 댄과 딸 루시가 이제 그만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가라"며 종용하지만 페퍼는 그들의 무심함과, 예순 아홉의 나이에 이른 자신이 더 나아갈 무언가가 없음을 스스로 불평하듯 토로한다. 그러다
문득 아침의 균형을 뒤흔든 버나뎃의 방문에 페페의 일상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겼다. 사소한 물건들이 자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신호처럼 읽혀졌다.
페퍼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미리엄과의 작별 의식을 마음 먹는다. 그녀의 옷을 정리하여 구호단체에 기증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날 미리엄이 남겨 둔
작은 기적과 마주하게 된다. 그의 슬픔은 놀랍도록 다른 빛깔로 빠르게 변화해나간다. 호기심에서 두려움 그리고 자신 안에 존재했는지도 몰랐을 큰
질투까지. 이 변화를 통해 굳어져있던 그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가기 시작한다. 오직 하나 그녀에 대해 알고 싶다는 의지만으로! 그리고
여기까지는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페퍼의 진짜 걸음은 오직 읽는 이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었다.
페퍼의 모습을 보면 최근에 보았던 "고잉 인 스타일"이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우리에게 친숙한 모건 프리먼 배우가 나오는 영화로 페퍼와
마찬가지로 노년의 삶을 살고 있는 세 노인의 이야기다. 늘 가는 곳, 늘 먹는 음식, 항상 같은 친구들과 평범한 일상을 살던 그들의 삶에 변화가
생기면서 벌이는 활극을 다룬 영화다. 노쇠해진 그들의 움직임이 굼뜨고 불안한데도, 사실 일상에서 그토록 늙은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관심이
없었을 것인데도, 이들 노인들의 새로운 도전은 시선을 모으고 응원을 이끌어낸다. 비슷한 맥락으로 로버트 드니로가 나온 "인턴"이란 영화도
떠오른다. 성공한 젊은 CEO에게 일흔살의 인턴이라는 언발란스한 조합은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페퍼와
세 노인들에 앞서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페퍼들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일까.
흔한 표현으로 젊음에는 시작과 도전이란 말이 자연스레 따라붙고, 늙음에는 황혼과 정리, 안정같은 표현을 연상시킨다. 아마 우리 내면에서
나이듦이란 것을 삶의 많은 요소들에 대한 가능성을 마감하고 굳어진 채 그저 안존하는 자세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결말로 정해두었는지 모른다.
우리의 관념에서부터 노년의 이미지를 제한해 둔 것이다. 그런데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때로 우리는 어떤 젊은 영혼의 새로운 시작이 주는 자연스러움
보다 노년에 찾아온 의외의 여정에 더욱 공감하고 감명받는다. 사실 노화는 모두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숙명이다. 우리는 노년기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놓았지만, 자신이 만든 그 관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 또한 가졌다. 흔하게 마음만은 청춘이라 하는 말이 가벼운 표현이 아니라 해가
갈수록 절감되는 것처럼. 때문에 그런 고정관념을 깨는 이야기를 만났을 때 우리가 제한해놓은 선을 보란듯이 넘어서는 주인공들을 향해 진심어린
응원을 보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새롭게 만나는 페퍼의 여정을 함께 한다면 진한 감동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