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증발 - 사라진 일본인들을 찾아서
레나 모제 지음, 스테판 르멜 사진, 이주영 옮김 / 책세상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무엇을 하며 보냈는지 말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 자신의 길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일자리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아내가 집안 살림을 도맡고 있지만 그렇게 계속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다. 짐짝 같은 테루오, 무능력한 테루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빨갛게 달군 쇠처럼 내게 와닿았다. 부끄러워서 외출도 하지 않았다. 다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들자 내 자신이 두려웠다. 형편없는 놈 아닌가? 내 나이 이제 서른 살이다. 숨어버리는 것은 쉽지만 다시 일어서는 것은 쉽지 않다. -p.227 19 테로오의 고백, 2년 만에 귀가"

 

 많은 젊은 세대들이 특히나 이 부분에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젊은 세대에 한정짓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무엇에 대입하던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실패가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로 돌아오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공감을 살 것이다. '증발자'의 사정을 다 이해하기 어렵고, 다른 체계의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로 이 차이를 옳고 그름의 시선으로 판단하려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바로 저 단락을 읽으며 약간이나마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증발'은 다름을 이해하지만 인정하기에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회의 또 하나의 이면을 생생한 시선으로 가리킨 책이다. 흥미로운 시선으로 본문을 따라가다 보면 인식하지 않은 채 지나쳤던 주위의 인물들로 사고가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뉴스와 통계를 보며 실종자와 자살자에 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지만, 이전까지는 증발해버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했다. '인간증발'은 자신의 존재를 생활 모든 기반에서 마치 소멸된 것처럼 없애버린 "사라진 일본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낯선 사회 현상과 직면하기 위해 잡은 '인간증발'안에서 오히려 현 시대를 관통하는 문제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스스로 사라져버리는 10만명의 일본인들과 그 사실을 감추고 싶어하는 일본 사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 세대의 공감이자 곧 다가올지도 모르는 '사라질 한국인들을 향하여' 권하는 조심스러운 경고였다.

 

 "알 수 없는 규칙, 격식, 장벽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복잡한 일본 사회에서 어두운 부분들을 조사하기란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일본에서는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면 배척을 받는 것 같다. 통역을 구하는 간단한 일도 신경 쓸 일이 많다. 처음 이메일을 교환할 때는 대부분 분위기가 좋다. 통역 비용, 통역 가능 시간, 업무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그렇다. 그러다가 '인간증발'이라는 주제를 꺼내면 어김없이 모든 것이 멈춘다. 많은 일본이 통역사들이 장례식 같은 피치 못할 사정을 내세우며 거절한다. 드물지만 솔직하게 할 수 없는 사정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실패와 마주해야 하는 두려움, 주변에 이 불편한 문제를 질문해야 하는 곤란함 때문이다. -p.101 9 지옥의 캠프"

 

 인간이 증발한다. 매년 스스로 자신을 감추고 사라져가는 10만명의 일본인들에 대해 왜 프랑스인 저자가 주목하여 글을 썼을까, 하는 부분이 가장 먼저 의아했다. 그리고 어쩌면 일본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현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됐다. 문득 윗세대에게 특히 '진리'처럼 통용되는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약 10년 정도 앞선 사회문화현상을 보인다는 썰이 떠올랐으므로. 같은 동양 문화권이기 때문에 특히 유사성을 보이는 면도 있겠지만, 저탄생, 고령화 같은 사회문제들이 그러하듯 비슷한 생활수준을 가진 국가들의 사회문화적 변화 양상 또한 유사한 흐름을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증발'은 생각 이상으로 집요했다.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관람하는 것 같은 현장감을 주는 이 르포르타주는 한 존재가 사라지는 이유에 대해 넓고도 깊게 따라붙어 보여준다. 처음 책을 접했을 때는 막연히 스스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이전'시킨 사람들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떠나 노숙인으로 산다던지, 자신의 생활 기반을 전부 버리고 연락 두절한 채 무연고의 지역에 흘러들어간다던지 하는 자체적 증발이 떠올랐다. 하지만 '인간증발'안에는 자살자, 귀농인, 히키고모리, 가출자, 납북자, 실종자 등등 여러 이유로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카에가 보기에 일본 열도는 '압력솥'같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마치 약한 불 위에 올라간 압력솥 같은 사회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러다 압력을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린다. 증발 문제는 터부시되고 있지만 연간 자살자 수 3만 3,000명, 즉 매일 집계되는 자살자 수가 90명에 이른다는 말이다. 일본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간이라면 새어나가지 않는다. 새어나가는 것은 수도꼭지나 하는 일이다." 재즈 연주자이자 작가였던 보리스 비앙이 했던 농담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보리스 비앙의 철학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인간이기 때문에 사라진다. -p.128 11 실종자를 찾는 사람들 "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증발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게 되었던 것에는 자신의 내면에도 관계라는 사회망 안에서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고립되고 싶다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최근의 관심사가 미니멀 라이프와 연관되어 삶을 더욱 단순화하는 것에 있는데, 그 중 한가지 압박이 인간관계에 포함되어 있다. '인간증발'에서도 불현듯 느껴지는 타인과 관계의 무게를 자각한 순간 모든 것을 놓아두고 사라져버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있게 읽은 부분이었다. 아마 이 제목을 통해 자신이 어떤 것을 연상했는지에 따라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불안-욕망이 무엇인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판단에는 객관적인 사실 뿐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자신의 관점도 포함되니까.

 

 관심을 가지기엔 내용이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한번쯤 읽어두면 좋을 내용이다. 사회 현상과 인터뷰, 사진 등의 구성이 감각적으로 배치되어 부담스럽지 않고, 읽기 편한 글로 쓰여졌기 때문에 생각보다 진입장벽이 높지 않다. 고령화, 고독사와 같은 문제들이 일본의 신간에서 우리의 사회문제로 다가온 것이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처럼 '인간증발'에 대해서도 미리 읽어둔다면 좋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