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히말라야 씨
스티븐 얼터 지음, 허형은 옮김 / 책세상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시작점은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했다. 과거의 그에게 일어났던 매우 불운했던 어느 날의 한 지점을 내밀하면서도 관조적인 시선으로 보여준다. 그가 그날에 겪었던 일이 실재적이지 않게 느껴질만큼 비현실적인 폭력성이 드러났기도 하며, 그의 기억 속에서도 채 다 끼워맞춰지지 않은 부분들이 전달된 상태로 재구성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때문에 그와 그의 아내가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던 그날의 일을 읽으며 '시계태엽 오렌지'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한무리의 괴한들에게 불시에 습격당한 노부부가 나오던 장면, 그들이 아무런 이유없이 폭행을 당하던 무차별적이고 가학적이었던 씬을 떠올리며 저자에게 일어났을 고통을 짐작해봤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욱 가혹했을 것이다. 그곳엔 어떤 연출도 의도도 없이 오롯이 살의에 찬 끔찍한 폭력이 날 것으로 그의 생명을 위협했을테니.

 

 "악을 대면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금도 악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마냥 편치는 않다. 그날 우리를 공격한 놈들이 사악한 인간들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인데도 말이다. 종교나 철학적 맥락 안에서 벌어지는 모호한 윤리 논쟁과는 달리, 내가 경험한 악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악귀의 빙의 같은 형태가 아니었다. 실재하고 현존하는 악이었다. 나를 짓누르고 질식시키려 했던 인간은 사악한 존재다. 아미타를 사정없이 발로 차고 칼로 찌른 녀석들도 똑같이 사악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기도 하다.  59-60p"

 

 폭행을 당한다는 것이 단지 신체적인 상처만으로 그친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아주 큰 확률로 피해자의 정신- 심리적인 부분도 손상시킨다. 몇 번이고 자신이 노출되었던 당혹스럽고 무자비했던 야만적인 순간을 되새기며 그때 나는 어떻게 대처했던가, 혹은 이렇게 행동했다면 좋았을 걸, 아니면 그때 만약 내가 이랬더라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텐데 하고 자책이나 후회와 비슷한 감정을 곱씹는다. 무엇이 되었든 폭력을 휘두른 자의 잘못이고 야만인데도 불구하고, 어느새 자기 자신을 검열하고 비슷한 공간이나 분위기가 느껴지는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긴장하고 패닉하게 된다. 비참한 일이다. 그들도 그랬다.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뒤로 그는 산을 오른다. 처음에는 근처의 낮은 산책로부터 시작했다. 전에 가볍게 오가던 길을 지팡이를 구해 짚고 힘겹게 오르면서, 그래도 이 길을 다 걸어내면 자신 안에서도 뭔가 새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갖는다. 

 

 그가 산을 오르려 하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삶의 어떤 시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길을 걷는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매우 유사하게 느껴졌다. 읽는 내내 나에게 처음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과, "순례길"이란 것을 알려주었던 책이 떠올랐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은 두 여자의 이야기였는데 약 십년쯤 전에 처음 읽고 나름의 놀라움을 담아 단단히 기억해두었었다. 순례길에 대한 글들을 읽어보면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저 종교적인 신념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길고 긴 길을 며칠동안이나 묵묵히 자신의 두발로 걷다보면 그 안에서 혹은 길 위에서, 걸어낸 자들은 무언가를 얻어왔다. 걷고 걸었을 뿐인데도 그 안에서 무언갈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저자에게 있어 히말라야를 오른다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저 가장 높은 고지에 다다르기 위해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는 산과 교감하고 자신안에 있던 감정과 상념의 찌끄러기들을 때때로 정리하고 환기시키기를 반복한다.

 

 "성스러운 산에 닿기 위해 여행하는 우리 같은 순례자들이 밟는 길들은 이 세상 너머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땅, 마법의 비기와 무시무시한 장애물, 대답 없는 질문들을 품은 신비로운 땅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이런 여정에서 경험하는 고난과 의구심을 통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다다른다. 진정한 순례는 얼마나 먼 길을 걸었는가 혹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가가 아니라 오직 마음이 가리키는 길을 걸었는가로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242-243p"

 

 처음엔 산의 꼭대를 향해 오르거나, 길의 끝까지 걷겠다는 목표가 나를 '무언가'로 만들어주거나, 변화시켜 줄 것만 같다고 여기며 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그들은 길 위에서 깨닫는다. 혹은 가장 높은 봉우리 위에서, 그들이 바라본 꼭지점이 무언가를 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두발로 디뎌낸 땅이 버텨낸 중력이 주는 카타르시스와 함께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마주한 자기 자신이 그 이전의 나와 후의 나를 구분토록 만드는 것이라고. 길을 떠나고 싶게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상처받았든 무기력하든 혹은 지금이 아니면 더는 기회가 없을 것 같든 무엇이든 이유를 붙여서 걷다가, 왜 걷고싶었는지라도 깨닫고 싶어진다. 읽다가 문득 나는 아미타가 걱정되었다. 그가 산을 오르는 동안 또 다른 피해자인 그녀는 어떤 식으로 자신의 내면을 정리하였을까, 하고. 히말라야와 그가 걸었던 길들이 그를 치유하고 성장시켜 주었다면, 그녀에게도 자신만의 히말라야가 존재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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