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묻는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30
이영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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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석하게도 큰 감흥이 없었다. 시보다는 책 날개에서 먼저 보았던 그의 부음이 더 오래도록 남는 시집이었다. 이상도하지. 이영유 시인은 이제서야 시집 '나는 나를 묻는다'를 찾아읽게 되면서 알게 된 이름 석자인데, 존재를 깨닫는 동시에 시인의 부재에 대한 확인을 하고 또 그것이 꽤 오랜 시간을 지나 내게 전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어디선가 본듯하다. 까만 활자의 구절로 오래 전 부음이 지금에서야 내게 닿았다는 것을. 언제고 전해지기 위해 하염없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메아리치며 떠들던 부음에 조의를 표한다. 아주 늦었지만 그래도 서둘러.

 

 다만 생각이 닿은 부분은 아래의 시이다.

 

[ 品格에 대하여 - 품격, 그리고 한문을 쓴다

 

나, 스스로가 품격의 기준이므로

품격은 나이다

혀에 모터를 달고 끝없이 굴려보라

무슨 소리가 나는지,

 

하여간 품격은

나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하고

내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한다

漢文이 또 하나, 나의 국어임을 알게 된다

 

격이 없으므로 격이 있고

격이 있으므로 격이 없다

아직도 혀에 모터가 붙어 있는지?

그렇다면, 모터를 떼든가

혀를 뗄 일이다 ]

 

때때로 나 자신은 무엇으로 보여지는가, 나타내는가, 증명하는가,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생각하곤 한다. 사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은 잘 안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존감이나 자존심의 차이를 구분하려 하고 나를 나에게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 생각하게 되면서 나에 대해 정의하고픈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잘 지켜지진 않지만 내가 받고 싶지 않은 대접을 남에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일들도 그 일환이다. 그러다보니 좀 더 관계에 있어서 냉담해지는 부분도 있지만 말이다. 쨌든 이 '품격에 대하여'란 시를 읽다보니 그 모든 시도가 결국은 나라는 사람의 품격을 높이고 싶다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말은 적을 수록 좋다는 부분에 있어선 정말 가슴깊이 동감하지만, - 지금 이렇게 쉼없이 타자를 쳐내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것처럼 속에 든 것을 쏟아내지 못해 안달인 성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 한문을 쓰는 일이 곧 품격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나의 국어임을 인지한다는 부분은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다. 시간이 지나면 혹은, 한문을 더 배우고 익힌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 있으나 - 사실대로 말하자면 한문이 섞인 부분을 읽기 어려워서 그렇다는 것도 있고,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가급적 우리말을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면서도 한 문장에 얼마나 많은 한문이 들어있는지. 비록 나는 달리 쓸 길을 찾지 못해서 이렇게 한자표현을 잔뜩 끌어다 쓰지만 할 수 있다면 쉽고 정확한 우리말로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연작들인 '나는 암이다' 는 제목 만으로도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강렬함이 있었다. '지병의 악화로 영면하였다'는 시인의 지병이 무엇이었는지- 이름 만으로도 끔찍한 병명을 곳곳에서 발견하면서 몸서리쳤다. 마치 일상인양 시집 안에 툭툭 끼워져있는 병의 그림자가 기울 때마다 피해가며 읽었다. 이상하게도 질긴 암세포가 그 안에 엉겨있는 양 제목만 봐도 지긋한 느낌이었다. 대신 눈에 들어온 다른 시 한편은,

 

 [ 光化門에서

 

 모처럼 광화문 네거리를 다녀왔다

참, 오랜만이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철 지난 과거,

거기 광화문이 있다

이제는 누구도 보살피지 않는 오래된 상처,

열을 맞춰 달리는 차들의 행렬,

순간 모든 게 정지되고,

피 흘리던 역사의 흔적들은

아우성으로만 멀리서 달려온다

갑자기 파란 불이 켜지고,

그만!

 

뒤를 돌아보니 모르는 것들 투성이다

그랬다, 예전부터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은

없었다

그냥,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던 것뿐이다

아득한 곳에서 달려오고,

또 아득하게 사라지는 것들,

한 세기의 흔적이,

한 인생의 아우성이,

흩뿌리는 눈 속으로 사라진다

사라지고, 사라지는 눈 먼 사이사이로

신기루처럼 광화문이 다가선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 ]

 

 시의 전문이다. 나와 세계가 정말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믿고 살아가는데 - 사실 내 세계야 어떻든 세상은 태평하리만큼 틀을 잃지 않고 계속된다. 금방 내 세계가 끝난대도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은 채 무심하게 모든 것들이 그대로일 것이라 생각하면 그 자체로도 어떠한 절망이 엄습한다. 존재의 무상함을 느끼는 가장 일반적인 때가 아닐까 싶다. 이 '광화문에서'가 그런 순간 또한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내가 그 곳에 존재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았던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공간과 시간. 사실 내가 없이는 그 공간과 시간의 존재조차 인지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 '있게 함'을 만드는 인지의 주체조차 사실은 공간과 시간에 의해 인지되지 않으면 무상하기만 한 것이라는 틈새가 현실감있게 다가왔다. 얼마 전에 볼일이 있어 그 앞을 다녀와서 더 그럴지도.

 

 감흥이 없었다고 하면서도 할 말은 조금 있었던 것 같다. 확 들어와 꽂히진 않았어도 이래저래 되새겨 떠올릴 시들이 있었던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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