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의 나라
김나영 지음 / 네오픽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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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모습에 속지 말자. 는 말은 사람이나 책이나 마찬가지로 통한다. 내용에 비해 책의 표지가 지나치게 동화적이다. 그래, 어떤 일면에서는 '도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사지가 멀쩡히 살아나오는 인물이 생긴다면 그야말로 동화같은 이야기이겠고, 그렇게 따지면 동화적인 요소가 충분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살벌한 도박판 얘기를 저런 상큼한 색감에 예쁜 일러스트로 포장해놓으면 처음부터 겉과 속이 너무 다르다고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름 역시 일명 '선수'들로 불리는 도박꾼들의 포커페이스와 뻥카에 속은 호구-혹은 피시- 독자 양산이라는 걸까. 처음 책을 봤을 땐 제목도 그렇고 표지도, 좀 더 메르헨적인 이야기를 예상했다. 옷장 안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세계로 떨어지게 되는 '나니아 연대기'같은, 혹은 토끼굴에 빠져서 트럼프 여왕을 만나게 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같은. 하지만 '야수의 나라'는 지독히도 현실적이다. 밑바닥까지 한 세계를 통틀어보여주면서 그 현실성 앞에서 동화적인 결말을 꿈꾸게 만드는 작품이다.

 

 [ 재휘는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아, 뭐. 그래, 내 확률이 얼마인지 계산한 건 그렇다고 치자. 그건 쉬우니까. 하지만 플러시 확률은 테이블에 있는 하트 카드를 모두 세지 않는 이상 어려워. 그런데 그걸 모두 셈했단 말이야? 네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지?"

 "음...... 숫자가 보여요. 그게...... 하늘에 둥둥 떠다니거든요. 둥둥."

순간 용팔은 말을 뚝 멈췄다. 그는 설마설마하면서 물었다. "숫자가 공중에 떠다닌다는 말이야?" "네." 그는 입을 딱 벌렸다. 숫자가 떠다닌다고 말한 사람이 예전에 한 명 더 있었다. 재휘의 아버지, 이정연. 용팔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하, 하지만 너 아까 그 양반이 플러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 "그 아저씨 눈을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눈?"

 "네, 눈동자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거든요. 아저씨도 아시죠? 고양이가 쥐 잡기 전에 동공이 커지는 거." ]

 

 처음엔 좀 식상했다. 선영의 아빠가 도박에 빠지게 되는 모습이 전개가 좀 빠른 듯 해서 딸까지 도박판 담보로 팔아버릴 정도로 광기어렸던가 의구심도 들었고, 천재 도박사의 아들이 그대로 자신의 아버지가 가진 카운팅 재능을 보이는 부분도 작위적이라고 여겨졌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했던 말을 그대로 주워삼기는 아들이라니. 하우스를 만들어놓고 선수들을 기용해 판을 벌리기만 할 뿐 자신은 직접 플레이를 하지 않는 강회장이란 인물 설정은 영화 '신의 한 수'를 떠올리게 한다. 거기서 이범수가 분한 '살수'라는 역이 딱 이 책의 강회장과 같았다. 그러고보니 여러모로 영화 '신의 한 수'와 비슷하다. 천재적 도박사인 재휘는 나중에 강회장 밑에 들어가서 선수로 뛰는 것까지 이시영이 맡은 '배꼽' 역과 비슷했고, 살수에게 원한을 가지고 복수를 꿈꾸면서도 '배꼽'의 안전까지 생각해야 하는 정우성 분의 '태석' 역은 전쟁의 여신 선영과 비슷했다. 딱히 멀리 바둑 영화까지 가지 않아도 '타짜 2'의 인물 구조에서도 비슷한 점은 보인다. '대길'이 자신의 삼촌과 같이 다녔던 '고광렬'과 함께 소규모 하우스 등을 돌며 판을 벌이는 내용도 재휘와 용팔의 관계랑 비슷하고 책에 나오는 '나비'라는 선수는 이하늬가 분했던 '우사장' 캐릭터와 비슷했다. 그렇게보면 일정 이상의 재미를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전형성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감이 붙는다. 벌어져야 할 사건은 다 벌어졌고 강회장에게 복수를 해야 할 때가 왔음을 인물들뿐 아니라 독자도 느끼게 되는 시점이 온다. 거기에서 한 번 더 좌절을 겪게 되고 마치 정해진 수순인 것 처럼 과거의 모든 열쇠까지 판 위에 올라섰을때 선영은 새롭게 태어나는 존재가 되어 자신의 복수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다시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도박판 위에 뛰어든다. 실제로 레이스를 보는 것처럼 긴장감과 속도감을 느끼며 읽을 수 있었는데 우리는 등장인물들의 고군분투 속에 안전하게 빅게임을 관전하게 된다. 그게 바로 야수의 나라에 빠져드는 이유가 된다. 엄두내기도 어려운 빅게임을 지켜보고 그 승리감과 패배감을 내것처럼 느낄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승자도 패자도- 선한 자도 악한 자도 없는 결국은 모두가 돈의 노예인 도박꾼에 다름 없는 사람들이라고 여겨지는 인물들과 마주하게 된다.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인물들이 자신의 전형성에서 얼핏 느껴지는 이중적인 면모도 함께 드러내는 것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가족을 잃고 원흉인 강 회장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강단있는 인물로 선영이 등장한다. 가장 의지가 강력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관철해나가려는 그녀의 행보를 자신도 모르게 응원하며 읽게 된다. 누군가는 강 회장을 꺾어야 하니까. 그런데, 천천히 반추해보면 여기서 선영이란 인물이 가장 탐욕스럽다고 여겨진다. 어쩌면, 강 회장 만큼이나. 그녀가 결국은 용팔과 재휘의 삶마저도 불안정하게 망가뜨리면서도 자신의 복수심을 이기지 못해 해선 안 될 선택을 했던 일과 그 와중에도 다시 도박판을 찾아들어 위험한 내기에 몸 담그는 행보는 그녀의 아버지라는 인물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이 여겨졌다. 그래서 주인공임에도 무조건 좋아하게 되지도 않고, 오히려 떨어져서 관찰하며 바라보게 되는 그런 인물이었다.

 

 [ "승부는 단 한 번. 저는 10억을 걸겠습니다."

 그 말에 모두 입을 딱 벌렸다. 한 판에 10억이라니. 이건 카운팅이고 뭐고, 순수 운에 맡기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돈 가지고 와." 수하는 강 회장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옆방에서 지폐무더기가 든 가방을 여러 개 들고 왔다. 오 사장은 예상치도 못했던 10억의 생생한 출현에 머리가 멍해졌다. "대신 오 사장님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돈 1억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그에게 10억에 준하는 뭔가가 있을 리가. 순간 선영은 섬뜩한 강 회장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기겁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빠! 안 돼요!" ] 

 

 반면 강회장은 무서운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꼼꼼하지 못하거나 적당주의자인가 싶기도 할 만큼 사람을 잘 놓쳤다. 어린 선영이 필사적으로 도망친 탓도 있지만, 방금 공사쳐서 제 손에 떨어진 사람 목숨을 제대로 간수 못해서 번번이 놓치는 일도 많고 선영에게 공사를 쳐서 재휘를 손에 넣었다는 것으로 홍루나 종루를 놓아주었다는 것도 의외다. 너무나 잔인하다고 일컬어지면서도 추마담이 가진 총에 와해되는 수하들을 부리고, 수십억이 오가는 판을 벌이면서 총 한자루없이 칼만 들고 다닌다는 것을 보면... 그보다 더 잔악하고 인정사정 없는 인물들이 얼마나 많이 스크린 위에서 등장했다 파멸했는지 떠올려보면 강회장은 생각보다 관대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약속을 얼마나 칼같이 지키는 사람인지! 살리에리의 편에 선 전형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조금 비틀어보면 유일하게 행복한 번 제대로 손에 쥐어본 적 없는 배금주의의 노예였다- 결국은 몰락해버린 가장 불운한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가장 큰 장점은 재미였다. 저도 모르게 빠져들어가서 결말을 궁금하게 만들 정도의 몰입력과. 상당히 빠른 전개 때문에 다소 거친 부분도 있고, 용팔이 선영과 재휘를 엮어주려고 하는 시도는 좀 촌스럽게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시대적인 배경이 언제인지 좀 애매하게 여겨졌는데, 요즘은 아니겠지 싶었다. 그런데, 그런대로 거칠어서 재밌고 또 좀 촌스러워서 재밌게 느껴질만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타짜', '신의 한 수', '21' 등의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면 이 책도 비슷한 느낌의 즐거움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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