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황제
김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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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아홉개의 단편으로 되어 있는 책은, SF라고 불러도 될지 의아했다. 워낙 현실성을 바탕으로 둔 탓에 뭔가 좀 설득력이 있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에 대해 설명해보라면 복잡하겠지만, 그래도 자꾸만 장르소설이라고 묶어두기엔 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 어쩌면 뭐 그런 것을 구분짓겠다고 하는 것 자체도 의미없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그 둘 사이에서 어느 곳에 끼워넣기 애매하단 생각을 떠올리는 것을 보니 SF라고 하는 것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가보다. 뭔가 더 우주적이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스케일에 대한 고정관념같은 것. 물론 소설집 '라면의 황제' 역시 그런 면모가 있다. 조금 소소하긴 하지만 충분히 기발하고 미래적인 상상력의 산물들이 이 안에 담겨 있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나, 우주전쟁 그리고 유에프오에 대한 이야기들. 근데도 묘하게 집요한 이 소설의 현실성 때문에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다. 진지한 얼굴로 얼토당토 않은 얘기를 몇 시간씩이나 떠들어대는 허풍선이의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듯이 읽게 되는 책이었다.

 

 인상적인 단편들도 있고, 어쩐지 진도가 안나간다고 여겨지는 단편들도 있었다. 첫 단편에서는 어쩐지 김중혁 작가의 '미스터 모노레일'이란 책이 떠올랐다. 좋아하는 작가 중 한명인데 생각해보니 분위기가 좀 비슷한 것도 같다. 거기서도 '볼스 무브먼트'같은 읽으면서도 난감한데 어딘지 묘하게 설득당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요소들이 등장하니까. 한국과 이란 친선 외교의 상징인 페르시안 카펫의 존재가 마치 기정사실인양 여겨지도록 말이다. 좋아하는 책과 비슷한 분위기니 '페르시아 양탄자 흥망사'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나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표제작 '라면의 황제'도 좋았다. 안타깝게도 나는 거진 달리는 지하철 위나 12시간 넘은 야심밤에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라면을 먹으며 '라면의 황제'를 읽을 수는 없었다.  '한 겨울에도 라면 한그릇이면 거뜬하다'는 말에 현혹되어 표지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라면 한그릇을 끓이는 대신 부셔서 먹었다. 다행이도 덕분에 책은 라면 받침이 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원래 안 쓴다. 진짜.

 

 시쳇말로 '약을 빨'고 써내려간 듯한 느낌이 나기도 한다. 후안 곤잘레스와 전 시청 공무원 김씨의 만남이 주는 위화감도 그렇고, 어디서 갑자기 한국 속담으로 '아프니까 청춘'이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 거기다가 김범식 군의 심신미약 상태를 증명하는 동시에 지적능력에 대한 판단도 가능하게 만드는 파괴적인 노트의 제목, '개들의 死生活'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덕분에 다 읽고 나면 '와, 재밌네요, 각 단편마다 하나같이 재기가 넘칩니다.'하고 말문을 열 것 같았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워낙 주거니 받거니 읽어가던 책이라서인지 책한테 읽은 감상을 주저리주저리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싶었다. 당연하게도. 문체에도 유행하는 방식이랄까 하는 것이 있는지 요즘 좀 읽힌다 싶은 책들은 이런 느낌이 든다. 실제와 허구를 교묘히 섞어서 말장난하듯이 슬쩍, 진지하게 눙을 치는 듯한 문체다. 계속 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꽉 진 오른손을 바라보라고 해서 보고 있었는데 막상 기다리던 구슬은 오른손 주변에서 정신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던 왼손 소맷자락에서 굴러나온, 그런 마술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지한 어조에 저도 모르게 귀도 기울이고 시선을 꼭 붙들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또 그런 게 재미있다. 엉뚱하고 발랄하여 그래서? 하고 그 다음으로 자꾸 마음을 빼앗기게 만드는 문체로 독자에게 인사한다. 당신이 아는 세상을 비틀고 꼬아내어 만든 이 새로운 세계로 헤라트 카펫 자락을 따라 온 당신을 환영한다고, 라면 먹고 가실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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