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마이너스
손아람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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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머리가 그것이었다. [서울대학교. 내가 입학하고 졸업한 학교다. 으스댈 뜻은 없다. 굳이 그 이름을 피하고 싶지 않을 뿐.] 책 날개에 붙어 있었던 작가의 사진이나 약력같은 것은 무심결에 넘긴 뒤였다. 그런데 묘하게 사람 뒷머리를 잡아채는 현실성이 있었다. 장편'소설'이라며? 그런데 왠지 소설이 아닌 것 같은 시작이었다. 다시 책 날개로 장을 돌렸다.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내 감이 맞았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굳이 [으스댈 뜻은 없다.]는 말이 꼬아 보인다. 아니 그럼 혹시 곱창전문대 돼지막창학과를 졸업했어도 이렇게 자신을 바탕으로 책 한 권 펼쳐내며 으스댈 뜻 없다고 썼을까. 하는 생각을 불현듯 떠올렸다가 고개를 휘저었다. 흔한 말로 갑자기 책 한 바닥 읽기도 전에 왠 열등감 폭발이세요, 할 것 같다. 그냥, 뭐. 자랑할 만한 건 자랑하는게 차라리 보는 입장에서 인정하기 쉽다는 거죠. 하는 회피와 더불어 그 건조한 어조조차 뭔가 있어 보여서 반 장난식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는데, 하는 변명이 머릿속을 오간다.

 

 뭐 이런 조잡한 사고가 독자의 머릿속에서 한바탕 그려지다 사그러들 것을 예상했는지, [굳이 그 이름을 피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그랬다. 이야기의 이해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그가 피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낸 바람에 오는 소설과 현실의 묘한 설킴이 독자들에게 혼동을 주고 있다는 점을 생각했다. 한두장 분량으로 자잘히 쪼개진 단락들은 읽다보면 생생하고 실제적인데 결국 이거 '소설'이었지 하고 머릿속으로 쌓아놓은 현실적인 공간을 휙 세트로 바꾸어버린다. 보통 다른 글들을 읽었을 때 소설의 세계를 허구로 구상하며 실제적인 요소를 넣으려 노력한다면, 이 글은 실제적인 세계를 바탕으로 읽다가 문득 만들어진 진짜 세계를 착각하기 전에 허구적인 공간이라고 인지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한거다. 거짓말을 잘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거짓된 판을 짜는 것이 아니라, 전부 진짜로 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살짝만 거짓을 끼워넣어야 한다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손아람의 '디 마이너스'는 독자를 현혹시키는 잘 짜여진 소설을 내놓은 셈이다.  

 

 사람들의 집중력이 글 읽는데에 한해서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어떤 논문이라도 읽은 것일까, 장으로 나뉘지 않고 한두장 될 법한 분량들로 나누어진 내용들은 끊기지만 불편하지 않은 흐름으로 연이어 읽힌다. 매일이 자잘한 사건이고 사고인 젊은 시절의 일기장을 돌아보는 것 같은 소소함도 있고 소소한 속에 황당할 정도로 웃픈 사연도 껴들어 있다. 거기에 시위와 사회문제들, 화염병, 쇠파이프, 전경 같은 단어들이 무섭도록 실제적으로 마치 그런 일상들 중에 하나인 게 자연스러운 일처럼 놓여있다는 점도 웃펐다. 예를 들면 축제 공연을 온 가수가 여학생들 호응을 얻겠다며 가슴 크기 운운하다 냉랭해진 분위기 속에서 무대를 내려와야 했단 부분은 가련하면서도 웃긴다. 대공분실에 갔다온 선배는 그와 그의 여자친구를 위해 기꺼이 기숙사 방을 빌려주었던 후배의 이름을 설렁탕 그릇 앞에서 불었고, 후배도 그 설렁탕 그릇 옆 깍두기 비닐을 떠올리며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을 불었다는 꼬리물기도 웃펐다. 그런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유쾌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음울했던 디 마이너스는 사실 그 제목 그대로였다. 어쨌든 에프는 아니니까 실패는 아닌데 그래도 성공적이라는 둘레의 축에도 낄 수 없는 학점. 디가 나온 과목의 학점은 일부러 삭제 신청을 하고 재수강을 해서 어떻게든 안좋은 학점을 세탁하려고 시도했던 때가 벌써 십년 전 쯤 되는 나는- 이제 생각해보니 삭제했던 디 학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게 남아있으면 먹구름만 가득 차버릴 것 같았던 내 인생이 사실, 그것들이 남아있었어도 결국은 이렇게 평탄하게 다른 평행우주에서도 오늘같은 밤에 똑같이 거실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디 마이너스를 떠올리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 그래서 끝까지 남아있는 의문은- 미학과에서 배우는 건 도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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