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엔 솔직한 마음으로 실망스럽기도 했다.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는 채로 읽기 시작했지만, 건조한 시각으로 정물화에 그려진 물상들을 하나하나 나열하듯이 설명하는 도입부도 그렇고- 이내 이 책의 주인공이 노인이라는 점도 '아.'하고 한풀 꺾이는 요소가 되었다. 그렇지만 책의 마지막까지 다 읽어낸 지금. 이 책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혹은 강력한 추천의 평을 남겨야 할 것인지 엄두가 나지 않을만큼 만족스러운, 애정이 넘치는 마음을 안고 갈피를 잡지 못해 서성이고 있다. '읽으시라.'는 말이 가장 알맞는 것 같은데, 그 짧은 한 마디로 혹여 누군가 이 책을 그저 지나칠까 걱정되기까지 한다.

 

정말 재미있었다. 단순히 재미라는 말로 끝맺을 수 없긴 하지만, 점차 책에 빠져들게 되어 결국엔 길을 걸으면서도 -이상해 보일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손에 들고 읽으며 걸어가는 모험을 감수하게 만들 정도였다. 설명하자면 이런 느낌이다. 내 앞에 넓은 미로 정원이 놓여져 있는데, 지도를 들고 그 길을 나선다. 처음엔 어떨떨하기만 하고 혼자 가기엔 약간 심심한 것도 같다. 그런데 코너를 돌고 막다른 길에 부딪혀 다시 나오는 동안 미로 구석구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물들이 하나씩 등장해 내 곁에서 같이 미로를 걷는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복잡해보였던 미로의 실마리가 점점 다 풀려나가며 끝내는 함께 미로의 끝에 다다랐다는 환희와 만족감, 미로를 함께 걸어나온 인물들과 나눌 수 있는 약간의 동료의식까지도 그러안은 채 끝을 낸다.

 

주인공이 노인이라는 언급을 가장 먼저 했는데, 읽다보면 주인공 '손톱/조각'이 노인인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알 수 없어지는 경계에 이른다. 그녀의 신체적 노화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들에서 퍼뜩 정신을 차리게 된다. 하지만 업무를 수행할 때 보이는 빠른 계산법이나 '류'라는 인물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는 애정의 조각들을 느낄 때면, 나도 모르게 그녀의 나이를 잊고 젊은 여성 혹은 그녀 나이보다는 얼마가 되었든 한참 젊게 그녀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노인에게 갖고 있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런 부분들에서 나도 모르게 노인이라는 흔적을 지워서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모습 자체에서 그런 느낌이 나오도록 인물이 만들어진 것인지 약간 아리송하다. 그런데 그런 부분들마저도 인물에게 공감하고 또 그로인해서 절망하기도 하며 파과를 읽게 되는 요소로 훌륭히 작용했다.

 

또 조각이 자신 주변을 늘 깨끗이 정리해두는 습관이나 냉장고 속을 제외한 다른 부분들에 대한 정밀함은, 자신이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필요한 것을 차곡차곡 준비하며 자신을 완벽히 지우고 살아가는 히어로 배트맨을 떠올리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게다가 이 소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리암 니슨의 '테이큰'과 비슷했다. 아, 배트맨과 테이큰이라니. 너무 마음에 들어서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일까. 염려도 된다. 그런데 정말이지, 그녀의 삶이 소녀에서 손톱, 조각에 이르기 까지의 여정을 보고 있자면 그 우울하고 카리스마 있는 히어로의 모습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불운한 삶으로 인한 존재의 자각이라던지, 자신이 걷게 되는 길을 위한 과정이 얻은만큼 잃은 것들로 빼곡하다던지, 특히 무용을 위해 언제라도 만약을 대비해놓은 치밀한 장치도 그랬다. 이런 부분들이 처음의 실망에서 빠져나와 점점 더 파과 안으로 나를 빠져들게 만드는데 기여했다.

 

여자 노인을 두고 이렇게 긴박하고도 또 흥미진진한 내용을 이끌어가는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시도 또한 과감했고 색달랐던만큼 성공적이었다. 저자 구병모는 정말 대단한 작가라고 다시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책을 다 읽기 전에 대형 서점에 들릴 일이 있었는데, 매대에 놓인 파과를 보고 지금 읽고 있는 책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 떠오른다. 지금같아선 그 옆에서 재미있으니 읽어보시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지만. 책의 마지막까지 정성스럽게 독자를 위한 즐거움을 남겨두어,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던 복잡한 감정들이 길게 남아 아쉽게 책장을 덮는 여운까지도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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