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 시인선 359
송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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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올해의 시작을 알리게 될 시집으로 송찬호 시인의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을 골랐다. 지인들이 알았다면, 아마 취향이 마음껏 드러나는 선택이라 고개를 저었을 것 같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한껏 담아 제목으로 먼저 고르고 서가에서 살짝 살펴본 내용이 또 나쁘지 않아 정했다. 참, 마음에 든다. 어떤 공간의 어떤 시간의 어떤 느낌인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제목이, 제목을 떠올리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도록 만든다. 그러니까, 내가 고양이를 좋아해서 특히 더 그런건 아니고, 시집에 실려있는 시들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좋다.

 

송찬호 시인의 시집은 처음 읽는데 부드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앞으로 시인의 다른 시집을 찾는다면 또 읽게 될 것 같다. 가장 먼저 전문을 소개하는 시는 표제작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이다. 가장 마음에 드는 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나름의 정경이 눈에 그려지는 좋은 시였다. 읽는 이에게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는 시.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찔레꽃

 

 

그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 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 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수 년, 삶이 그렇데 징 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얬어라 벙어리처럼 하얬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 나무 덤불 아래에서 오월의 뱀이 울고 있다

 

 

마치 한 편의 사랑이야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요즘 읽은 몇 편의 소설들이 이런 분위기를 띄고 있었던 것 같다. 스티븐 킹의 신작 11/22/63에서도 이런 애조를 띄는 사랑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었고, -원했던 것은 좀 더 드라이하고 스릴이 넘치는 서스펜스였지만 - 일본 소설이었던 리턴이라는 소설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그 두 소설 모두 재미있게 읽었으니 찔레꽃과 비슷한 느낌의 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읽어도 좋겠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스티븐 킹의 소설이 더 좋았다. 리턴은 2차 대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정서상 맞지 않는 내용도 있었다.

 

다른 시를 보면,

 

 

코스모스의 [이제 가까스로 궁티의 한때를 벗어났다 생각되는

인생의 오후, 돌아보면 젊은 날은 아름답다]

 

 

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이 구절에 머물렀을때, 나는 다른 시는 모르겠고, 이 구절만큼은 나의 친구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인생의 오후라는 지점까지도 아직, 다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우리에게도 그런 날은 분명 올테고 그때 돌아보는 젊은 날이 지금이 되겠다. 지금, 지금. 지금이 비록 아름답게 여겨지지 않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른 뒤에 지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시에서 인생을 만난다는 것, 그래서 마음이 울린다는 것,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접어놓았다. 물론, 마음으로.

 

 

초원의 빛

 

 

그때가 유월이었던가요

당신이 나를 슬쩍 밀었던가요

그래서 풀밭에 덜렁 누웠던 것인데

초록이 나를 때렸죠

등짝에 찰싹, 초록 풀물이 들었죠

 

나는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아

벌떡 일어나, 그 너른

풀밭은 마구 달렸죠

초록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몰랐죠

숨은 가쁘고 바람에 멀는 헝클어졌죠

나는 그때, 거의, 사랑에 붙잡힐 뻔했죠

 

언덕에서 느릅나무는 이 모든 걸 보고 있었죠

한낮의 열기 속에서

초록은 꽁지 짧은 새들을 때렸죠

키 작은 제비꽃들도 때렸죠

더 짙고 아득한 곳으로 질주하는

한줄기 어떤 청춘의 빛이 있었죠

 

 

이 시를 읽으면서 동백꽃을 떠올렸다. 당신이 나를 슬쩍 밀어 풀밭에 덜렁 누웠던 것인데, 초록이 나를 때렸다는 표현이, 무엇엔가 떠밀린 것처럼 동백꽃밭 속으로 넘어진, 그 알싸한 향기에 취하게 되었던 그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이야기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때, 거의, 사랑에 붙잡힐 뻔했'다는 구절만 봐도 얼마나 마음에 와 닿는지. 동백꽃을 떠올리게 된 것도 그렇지만, 바로 그 구절 때문에라도 이 시를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것으로 꼽아 놓았다. 사랑에 빠진다는 표현을 흔히 쓰지만, 어쩌면 우리는 도망쳐야 하는 그것에 붙잡혔기 때문에 늘 사랑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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