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고 있습니까 - 영화감독 김종관의 60가지 순간들
김종관 지음 / 우듬지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표지와 제목에서부터 감성적인 느낌이 묻어난다. 사라지고 있는가를 묻는 제목. 무엇이 사라지고 있다는 뜻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삶의 한순간들이 하루가 저물어가듯 시간이 흘러 오늘이 어제가 되듯 사라짐을 말하는 것인지, 기록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결국 잊혀지고 옅어져 사라짐을 말하는 것인지, 결국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사라짐은 그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책 안에 담겨있는 수많은 순간들은 사라지고 다시 쓰여지고, 흐려지고 기억되고, 옅어지고 읽히는 일들을 반복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와 같은 아름다움을 봤다고, 그때 나는 생각했다.'

 

사진과 아름다운 문구가 들어간 책에 대한 불신을, 당신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을까? 감성의 과잉, 넘쳐나는 미사여구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이것은 마치 애증과도 같다. 좋아하나 싫은, 싫지 않으나 피하고 싶은. 눈물이 점점 없어지게 된 이후로 나는 말랑거리고 달콤하고 부드럽게 달라붙는 이야기들이 싫어졌다. 좀 더 단도직입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는 것들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그런 것들을 가까이하고 있으면 간지러움을 느끼거나, 싸구려 감성에 취하거나, 애써 아무 동요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태연자약한 모습을 위장할 필요가 없었다. 냉소적인 느낌의 블랙유머에 가끔 웃을지언정, 유치한 설정에 사사로이 마음 쓰는 일이 불필요하다 여겨졌던 것이다.

 

이 책에 대해 기대를 걸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신을 지울수가 없었다. 결국은 그렇고 그런 책처럼 여겨지게 될까봐 혹은 내가 너무 쉽게 부드러운 감성에 푹 빠져 동화되어 버릴까봐. 책을 읽으면서 몇번이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저 이 글을 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불현듯 궁금해져서였다. 처음에 이름만 보고 남자라고 생각했다가, 중간에 날개에 실린 사진을 언뜻 보고 여자라고 생각했다가, 좋아했던 여자아이 이야기가 나와서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남자였다. 그라면, 그녀라면 하고 몇번이나 이 글을 쓴 사람에 대해 떠올리면서 글을 읽었는데 그의 문체에 빠져들게 되어 좋았다. 감성적인 노름에 휩쓸려버렸다고 해도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문체의 글을 쓰는 점이 좋았다.

 

어떤 부분은 비약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있었지만, 작은 단어에서부터 풀려나오는 이야기를 보고 있자면, 같은 빛깔의 유년과 닮아있는 도시의 한 켠을 걸어본 적 있는 것 같아 낯설지 않아 좋았다. 솔직한 부분도 있고 마치 프리즘이라도 거친 양 아름답게 재탄생한 것 같은 부분도 있었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사실 그대로의 모습일 수가 있을까 결국은 내 필터로 묘사되는 것인데. 하고 이해되는 정도였다. 애정을 바탕으로 한 유년에 대한 아름다움이 녹아들어가서 더 좋았을 거란 생각도 한다. 지금, 한 계절이 사라지고 길었던 낮이 밤으로 사라지는 이 때에 읽으면 좋을 책이다. 추운 거리에서 벗어나 어디고 노란 불빛을 밝힌 커피숍이 눈에 띈다면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 안에 들어앉아 밖의 성마름과 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특히 공감했던 구절은,

"어쩌면 그 후로도 내게 사랑의 방식은 같다.

아름다움을 보고, 부러진 날개를 보았을 때 사랑이 시작된다."

결국 이 에세이의 모든 시작은 사랑할 만한 대상의 가장 연약한 부분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랑의 시작 중 절반은, 바로 그 지점일지도 모른다. 혹은 내 부러진 날개를 보았을 때 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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