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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박완서라는 작가에 대한 경의는 표하지만, 작품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 생생함에서 오는 깐깐한 느낌, 길게 늘어지는 수다스러운 이야기가 때로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좋고 나쁨을 가리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나의 취향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만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매번 찾아읽고 기다리고 남은 장의 두께가 얇아질수록 아쉬워하게 되는 작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기회가 되면 읽고, 몇몇 책들은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이런 내용이구나 하고 감상하는 정도일 뿐. 그런데 이번 책은 나에게도 좀 의미있게 다가왔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세련된 말솜씨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마치 서울 깍쟁이같은 태도로 퉁박을 주던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겪어온 삶의 발자취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새삼.
이 책은 고인의 마지막 소설집이라는 말이 붙어있는데, 그래서 더욱 내가 그런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여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총 여섯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처음 세 편의 글은 별다른 소개없이 담겨있고 나머지 세 편의 글은 김윤식, 신경숙, 김애란 작가들의 선정, 그리고 짧은 글이 덧붙여져 있는 식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첫번째 단편인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 기억에 남는다.
"세상도 나도 그때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를 다독이고 가난을 딛고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현실에만 충실했다. 6.25 때 얘기만 나오면 아이들까지도 궁상떨지 말라고 핀잔을 줄 정도로 잊고 싶은 과거가 된 지 오래였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황폐함과 피폐함, 정신의 충격을 육체의 문제로 덮고 살아나가기를 목표로 삼았던 강함이 있어 정신력이나 의지의 근본부터 다르다'라는 말을 가끔 들었다. 아마 같이 살았던 조부와 조모의 모습에서 그런 말이 저절로 나왔지 싶다. 그들의 은혜를 입고 자라났던 만큼 세월의 나이테를 켜켜이 쌓아 뿌리부터 굳센 노목처럼 느껴지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 저절로 이 근성의 차이는 바로 그 이겨냄에서 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더불어 옛시절 이야기라도 나올라치면,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며 굳이 말을 자르려던 내 모습도 함께 떠오르고.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어떤 대목, 대목에 이르러서는 개인적인 생각들이 떠올라 예전의 어떤 지점으로 플래시백하게 되는 책이었다.
또하나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은 손숙 씨가 연극 무대에 올랐던 작품으로 연극의 제목으로 먼저 그 이름을 알았던 편이다. 소개를 보면서 박완서의 글을 무대에 올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읽기로는 지금이 처음이었다. 생각과는 다른 흐름으로 진행되는 내용이지만 내용만큼은, 괜찮게 다가왔다. 혼자서 쏘아내듯이 계속 이어지는 대사가 처음에는 다소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이어서 이게 연극 무대에서 어떻게 펼쳐졌을까 하는 궁금함도 생겼고, 기회가 있었을 때 봤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도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