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읽은 소설인 것 같다. 그동안 비소설 장르의 책을 연달아 읽어왔던 터라, 이런 흐름이 있는 이야기를 읽은 것이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져 반가웠다.

 

 

 

정한아 작가의 책은 처음 읽어본다. 82년생의 정한아 작가도 젊은 작가 축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이 책을 선택하기 까지 어떤 머뭇거림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용이 좀 가볍거나 젊은 작가들이 추구하는 어떤 흐름에 함께 속해있는 느낌을 주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새로운 작가와 새롭게 만나는 일은 그런 우려를 넘어선 어느 정도의 신선함과 즐거움, 아쉬움, 그리고 그 다음에 대한 기대감을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다채로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녀가 보여준 달, 그 안의 차갑고, 고요하고 생경한 풍경 역시 그만의 독특한 씨실과 날실의 엵임으로 하나의 새로운 의미를 간직한 인상을 남겼다.

 

 

 

책을 읽으면서 은미를 통해 전해지는 할머니-고모-은미로 이어지는 태생적 순환, 꿈꾸는 삶을 사는 이들의 계보가 끊이지 않고 은밀히 이어지는 흐름을 보는 일이 즐겁고, 흥미로웠다. 할머니에서 고모로 이어지는 환상과 꿈, 아름다움, 비극, 무지개에 대한 믿음은 고모에게서 나로 내려오는 책을 읽는 법, 친구를 사귀는 법, 일기를 쓰는 법, 노래를 부르는 법으로 연결된다. 어쩌면 이 연결고리는 상당히 한국적인 면모를 띄고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부분이면서, 동시에 작품에 대한 공감대를 이루는 가족의 역사이기도 했다. 우리는 결국 어느 시작 부분에서부터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온 일부분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니까.

 

 

 

이야기 안에 나오는 인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들은 개성적이면서도, 그 개성을 사회속에 빼앗긴 몰개성화되어버린 인물이기도 했다. 사회속에 스며들기를 실패하는 은미, 어릴적부터 거짓말에 소질을 보인, 그래서 인생이 더욱 풍요로워질 가능성을 보였던 그녀는 결국 어떤 무엇으로도 사회속에 규정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쉽게 말하면 취업 실패가 계속된, 눈치밥을 먹다가 먹다가 결국 스트레스로 탈모증세까지 오게되는 취업준비생이다. 그리고 그녀의 단짝인 민 역시 사회에서 용인되지 못하는 인물, 자신의 성정체성을 끝없이 의심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자신의 성이 아닌 이성이 되길 갈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민은 트렌스젠더였다.

 

 

"십대가 된 후에도 우리는 다른 이성친구들처럼 어색해지지 않았다. 여름이면 봉숭아물을 들이고, 같이 드라마를 보고, 머리에 헤어롤을 말면서 밤새도록 전화통화를 했다. 우리는 만화에 나오는 한 쌍의 초능력 마법사, 종횡무진 활약하는 혼성 탐정단, 둘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환상의 듀엣이었다." - "고모는 할머니가 움찔, 물러섰다가 이내 다시 굳게 입을 다무는 것을 바라보았다. 고모는 그 자그마한 머리통을 할머니 쪽으로 가져가서 조용히 말했다. "엄마, 그럼 나중에 우린 달에 가서 살아요." "......그래. 꼭 그러자." "

 

 

어떤 의미에서 은미와 민의 조합은 매우 개성적인 존재들의 긍정적인 조화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미 수많은 은미와 민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그들 인물 유형이 끼치는 -자극적인- 영향력으로 인해 이미 사회에 집중적으로 노출되어 버린 이 개성적인 인물들의 조합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느 사이엔가 낯설지만 익숙한 존재들로 몰개성화 되었다. 이 독특한 인물들은 사실 자신만의 색을 분명히 드러내는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사회속에 적용하였을 때 그들의 매력이 반감 혹은 평가 절하된다는 점을 갖고 있다. 은미의 고모 역시 마찬가지로 그녀가 구현해 낸 아름답고 독특한 우주 안에서 빛나고 자유롭지만, 현실 속에서는 작은 가게 안에서 바쁘게 샌드위치를 만들어내는 일을 반복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매력은 바로 그 현실과 비현실의 공간이 서로 교차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잃은-몰개성화 된 일상적 인물들의 내면에서 빛나는 가치를 발견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결함과 부족을 찾아내어 실망하고 값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취급되지 않을 장점을 발견하고 끌어들여 그들을 새로운 의미를 가진 인물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거짓으로 창조된 비현실에서 결국은 현실로 이어지는 진실한 희망을 끈을 찾음으로써 감동과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라고 말하고 있지만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야기는 정교해지고 또 아름다워졌다.

 

"일주일간의 궤도비행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저는 깨달았죠. 아무리 오랫동안 이 일을 하더라도 결코 질리거나 싫증이 날 리는 없을 거라는 걸요. 비행을 마치고 지구로 돌아올 땐 섭섭해서 눈물이 날 정도였어요. 상공에서 낙하산이 펴졌을 때도 안도감이 들지 않더군요. 저는 다시 그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 " "은미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할머니는 블라우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이 얘길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말을 못 하고 한참 동안 헛기침만 하던 할머니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네가...... 네 고모를 좀 만나러 갔다 와야겠다." "

 

 

이 인물들이 자신을 찾는 방법으로 사용된 것이 바로 '여행'이다. 우주비행사로 우주로의 기약없는 여행을 앞둔 고모와, 그런 고모를 만나고 오라는 할머니의 특명하에 미국 여행길을 떠난 은미와 민. 그들은 이 여행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고모가 죽음 앞에서 만들어낸 달로의 여행은 고모를 어머니가 되길 원했던, 어머니 앞에서 되길 바랐던 진정한 자신으로 완성한다. 비록 거짓일지라도 고모가 만들어낸 세계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삶속에서 진짜가 되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더불어 민에게는 여행이 갈망하는 한편 의심하고 고민했던 자신의 성정체성을 확고히하는 여정이었으며, 약속없는 삶과 의미없는 죽음 사이에서 부질없이 흔들리던 은미를 현실과 꿈의 중간쯤 어딘가로 내려놓는 길이 되었다.

 

 

 

마치 나와 어딘가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즐거움과 깊은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달의 바다'를 읽으며 가장 좋았던 점은, 거짓이 주는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빠져들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일견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거짓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 무한한 긍정을 상징하는 거짓으로 바뀌고, 바로 그 순간 작가가 들려주는 진짜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이다. 조곤한 편지글에 담긴 드넓은 우주가 이 책에서 펼쳐졌다. 색다른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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