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북극여행자
최명애 / 작가정신 / 2012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따로 더 관심이 있어서인지 혹은 더위가 시작되어서인지, 북쪽 공간에 대한 책이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다고 느낀다. 최근들어서도 두세권은 읽은 것 같고, 펭귄에 관한 영화도 곧 3D로 개봉을 앞두고 있다. 펭귄은 남극의 신사였나. 어쨌든. 이 추운 극지방에 대한 관심이 전에 없이 더욱 높아진 것인지 어쩐지 또 하나의 극지방 여행기가 찾아왔다. 책은 한 권 분량이지만, 십 년간의 여행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북극여행자"라는 책도 나의 관심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게 옳겠다. 당연하게도 저자가 여행한 바로 그 추운 지방이 너무나 매력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있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고 장점이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책 구석구석에 그리고 너무나도 빈번히 등장하는 저자의 유머러스함은 이 책에 대한 만족도를 훨씬 높여주었다. 그녀가 여행한 곳들이 지나치게 춥고 딱딱한, -지역적 특색 뿐 아니라 사람들까지도- 느낌을 주는데, 오로지 그녀의 유머러스함이 이 책에 온기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부분에 갈피를 꼽는데, 온통 그녀만의 농담이 드러난 부분에 꼽으려다가 몇 번이나 손을 거두었다. 이 책을 여행서가 아닌 다른 책으로 보게 될 것만 같아서. 그녀는 북극곰이라 불리는 동반자와 여행을 함께 했는데, 그녀는 아마 아주 좋은 여행 파트너였을거라 생각된다. 재미있는 사람은 어디서나 그 가치가 빛나는 법이니까.

 

 "식당 '아 네스투 그뢰섬'에서 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맥주 대신 콜라를 시켰다. 이곳은 칠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채식 식당이었다. 감동한 나는 나중에 꼭 이 집을 벤치마킹해 '채식 북카페'를 만들겠다고 씩씩하게 사업 구상을 설명했다. 북극곰은 걱정 어린 눈으로, 꼭 나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홍대 앞에 채식 식당 겸 카페 겸 헌책방을 냈다가 쫄딱 망했다고 알려주었다."

 

 카페나 그 비슷한 무엇을 판매하는 개인 사업을 연다는 것은 우리가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 중 하나라고 고인이 된 로맨틱코미디의 여왕 노라 애프런이 말했다. 여기에서도 그녀가 등장한다. 카페를 연다는 것, 식당을 연다는 것은 진짜, 이제는 들으면 웃음부터 날 어른의 전형적인 판타지 중 하나로 믿게 될 것 같다. 수많은 책들에서 이런 꿈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런 꿈이 나오지 않는 유일한 책은 아마, 자기계발서 뿐인 것 같다. 농담이다. 어쨌든 여기서도 이런 말을 발견하게 되어 우습고 또 반가운 마음에 꼽은 문장이다.

 

 더불어 조금 아까 전에도 채식"에 관한 문제로 지인과 농담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여러가지 이유로 -아마 체중?- 이제 곧 채식을 해야겠다"고 얘기하기에 인생이 길어봤자 얼마나 길다고 즐거움을 포기하고 살 건가요?"하고 물었더니 그녀는 앞으로 50년쯤은 살지 않겠냐"고 답했다. 그래서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인데 오늘 하루하루를 마지막인것처럼 소중히 살라는 명언을 받들면 그래도 그 하루동안 자신에게 고기를 주지 않고 살건가요?"하고 얘기해주었었다. 물론 채식에 대한 어떤 편견도 없고 그저 내가 고기를 좋아할 뿐이지만, 방금 있었던 일과 약간의 상관이 있는 부분이라 같이 떠올랐다.

 

 "다시 육천만 년이 흐른 뒤에도 이 인류의 모자이크는 그대로 여기, 살아남아 있을까. 나 같은 누군가가 쪼그리고 앉아 빙퇴석 더미를 뒤지며 까마득한 시절의 흔적을 뒤적이게 될까. 그때의 후손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두 팔과 두 눈을 가졌을까. 아니면 공상과학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눈과 머리만 커다랗게 진화했을까. 시간을 거꾸로 돌려 육천만 년 전의 인류는, 이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지금처럼 눈과 얼음의 땅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헤아릴 수 없이 까마득한 시대를 머릿속으로 여행하는데 이탈리아 꼬마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은행잎이 선명하게 새겨진 화석이었다."

 

 이 부분, 저자가 육천만을 단위로 인류라고 해얄지, 이 행성이라고 해얄지 모를 것의 과거와 미래를 가늠하고 있는 부분을 읽으면서 - 이미 과거의 축에 선 그녀의 손에 미래의 편에 있는 꼬마가 그들을 관통하고 있는 은행잎 화석을 쥐어주는 장면을 떠올리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극치점을 발견하였다면 과장이고, 묘한 느낌을 받았다. 육천만 년 전의 인류와 지금 인류 사이의 차이만큼이 육천만 년 후에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그 후라는 것이 희망차게도 존재한다면 말이다. 설마 인류가 그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바꾸지는 않겠지 하는 희망을 갖고서, 생각해본다.

 

 "낮도 밤도 아닌 시간대에서, 눈앞에선 빙하와 구름이, 귓전에선 바람 소리 같은 음악이 영원처럼 들렸다. 머리를 기대는데, 북극곰이 어깨를 툭툭 치더니 창밖을 가리켰다. 저 멀리, 까마득한 끝에, 세 개의 점이 보였다. 그것들은 우리의 배와 같은 속도로 천천히 바다를 유영해오고 있었다. 바다사자나 바다 새가 아니다. 저 정도 크기면 고래다. 창에 눈을 갖다 댔더니 검은 지느러미가 우뚝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이 범고래였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세계의 끝에서 내가, 고래를 본 이야기다."

 

 책의 말미에 나오는 부분이고, 저자의 어깨를 툭툭 친 것은 진짜 북극곰이 아니라 그녀의 동반자를 칭하는 말임을 다시 한 번 밝힌다. 이 부분만 읽었을 때 마치 판타지 소설의 한 부분을 옮겨온 것처럼 느낄까봐, 그리고 진짜 북극곰이 어깨를 쳤다면, 아마 이 책은 존재할 수 없었을테니까, 이 책을 읽고 북극에 가면 북극곰이 내 어깨를 쳐주지 않을까, 누군가 기대하지 않도록 밝혀둔다. 북극곰이 어깨를 치는 일이 생긴다면,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또 어느 신의 가호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행운이 따른다면 어깨만 없어지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의 표현이 꽤 멋있게 느껴졌다. 저자의 여행에서, 세계의 끝에서 무언가를 남기게 된다면 유영하고 있는 세 마리의 범고래를 본 일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밤하늘에 드리워진 초록빛의 아름다운 오로라를 본 일은 빼놓을 수는 없겠지만. 분명 쉽지 않은 여행이었을텐데, 무겁지 않은 어조로 시종일관 여행담을 풀어놓는 통에, 가볼만한 곳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려, 저긴 여행 초보가 함부로 발을 들이밀 곳이 아니야 하고 다시 자신을 다독이게 만든다. 극지방의 세이렌이 읊어내는 노래같은 책이다. 세이렌에겐 춥겠지만 그만큼 유혹적이다. 즐거운 대리만족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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