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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흔아홉 ㅣ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2
김도연 지음 / 작가정신 / 2012년 6월
평점 :
작가의 전작 목록을 보다가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눈에 띄었었다. 내가 읽은 책은 후지사와 슈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오전 0시'였다. 탱고를 추는 장님여자와 온천 호텔의 종업원에 대한 얘기였는데 왜 헷갈렸는지도 모를 묘한 착각이었다. 책 '아흔아홉'은 세 남녀의 이야기다. 남자와 그의 부인, 그리고 그의 애인이 함께 아흔아홉 대관령 고갯길로 소풍을 떠난다는 얘기다. 판타지 소설같지만 판타지 소설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하나 아흔 아홉번째 고개 밑으로 떠밀려 떨어지는 치정 얽힌 이야기도 아니다. 오히려 생각 외로 드라이하고 산뜻한 이야기다. 생각 외로.
"시트와 바닥을 배설물로 더럽히는 히치 하이커들에게 고함을 내질렀을 때 그때까지 조수석에서 얌전히 있던 고라니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아저씨 와이프 사라진 거 알아요?" "......집사람이 왜 사라져?" "그건 저도 모르죠." "근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대관령이 우리 운동장인데 그걸 모르겠어요." 고라니의 윤기 흐르는 까만 코와 동그란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소설 '운수 좋은 날'이 떠올랐다. 아내의 죽음을 예감한 김첨지가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술집에서 오기를 부리는 장면이 겹쳐 보였다. 그도 마찬가지로 이미 집을 떠나버린 아내를 두고 고라니와 대거리를 한다. 고라니와의 대화라니 좀 이상하지만, 또 생각 이상으로 자연스럽다. 그는 아내에게 답문이 왔다고 아내의 실종, 혹은 가출을 부인하려 한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텅 빈 집에는 그만이 남았다.
아내가 집을 떠난 뒤로 그는 아내를 찾으려고 하는 한 편, 애인인 Y를 부른다. 그녀와 아내가 없는 대관령 일대를 돌며 날선 대화를 나눈다. Y는 그와의 잠자리를 거부한다. 아내가 있을 때는 아내의 눈을 피해 몇 번이고 가졌을 일인데 아내가 사라지고 나자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치 두 사람의 관계가 아내를 통해 성립된다는 것 같이 느껴진다. 한 사람이 두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준다는 건 두 사람 모두를 채워줄 수 없다는 것과 같다. 그는 정작 두 사람 분의 몫을 충분히 받고 있으면서도.
"길고 깊은 겨울을 대관령 골짜기 외딴 집에서 홀로 보내는 동안 그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내는 선택권을 그에게 떠넘기고 떠난 거였다. 그런데...... 그 간단한 게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그의 마음을 휘감아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다. 아내의 메시지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글쎄,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모르지만 남자에게 경멸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어디까지나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한 미성숙을 보았다.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은 종종 자기 몫의 선택을, 스스로 짊어져야 할 잔인함을 남의 손에 떠넘긴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사람이라 잘 알고 있다. 나쁜 역을 하고 싶지 않고 가능하면 좋은 입장에 서서 좋은 사람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 내 행동을 이해받는 위치에만 머물고 싶어하는 어림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니 도리어 그 위선으로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
아내가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저 그만의 추측으로 아내가 집을 나간 이유를 짐작해볼 뿐이다. 아내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돌아와서 진저리를 치며 집안을 청소하고 낯선 이의 흔적을 찾으려는지, 지우려는지 알 수 없는 모습을 보인다. 그녀는 그저 잠시 떠나있었을 뿐이지만 그 전까지 괴로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아내가 자신에게 선택권을 떠넘겼다는 표현을 쓰고, 그럼에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남자는 이렇게 나약할지도 모른다. 그를 경멸하거나 역겨워하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로 사실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렇게 계속 살 수 있을까......" "이렇게라니?" 그는 서둘러 침을 삼켰다. "......마음 없이." 그녀는 뒤늦게 시린 기운이 몰려온 듯 눈을 찡그렸다. 사랑이나 정이 없다는 말을 그 덕에 간신히 바꿔놓은 것처럼. "......어쩌면 다들 그렇게 사는 게 아닐까. 영원한 건 없잖아." "믿음 없이." "......아기를 갖는 건 어떨까." "아기." 그녀가 밭은 기침을 토해냈다."
이런 대화를 나누고 난 뒤 아내는 그에게 Y를 불러 함께 소풍을 떠나자고 제의한다. 심지어 먹을거리를 마련하겠다고도 한다. 그 제의에 Y는 응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는 자연스럽게, 때로는 친근하게 주거니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는다. 이 기묘한 동행이 어떻게 성립되는 것일까. 그녀들은 왜 도로에 그어진 선 이편에도 저편에도 서지 못한 채 가운데 흰 선만 밟으며 길을 가려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걸까. 사랑이란 것이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목처럼 다 채워지지 않아 불안정해도 그로도 충분하게 느껴지는.
책을 다 읽고 나면 제목이 더 인상깊게 생각된다. 꼭 채워진 백이라는 수를 떠올리게 만드는데, 아흔아홉으로도 충분하고 꼭 맞는 것처럼 생각된다. 하나가 모자라 더 제것처럼 걸맞는 느낌이다. 겹겹이 싸인 골짜기들 사이사이로 사람의 옆모습을 본 딴 골짜기가 숨어있는 표지도 재미있다. 대관령의 아흔아홉 골짜기 마다 사람이 숨어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만한 거리에 서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존재한다. 사람들의 삶은, 인생은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 흩어져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