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문 이후 밀리언셀러 클럽 126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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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보다 작가의 이름이 더 크고 분명하게 자리잡는 책이 얼마나 될 것인가. 작가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한눈에 들어온다. 제목으로 책을 알아보고 선택하는 일이 보통이라지만 아무래도 이 작가 스티븐 킹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만만치 않게 많을 것이다. 나 역시 스티븐 킹은 그 이름만으로도 믿고 보는 작가 중 하나다. 비록 책보다 영화를 더 먼저 본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그의 작품에서 시작된 재미와 감동은 그의 이름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제목 역시 괜찮으나 독자에게는 그보다 그의 이름이 더욱 믿음직스럽게 다가온다.

 

 다양한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14편 정도인데 분량은 중단편정도 되어 보이는 것도 서너개 있고 열장 정도로 보이는 짧은 단편도 몇 편 있다. 제목이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역할을 어느 정도 담당하고 있는데, 말 그대로 해가 저물고 밤이 어스름하게 찾아오는 시간, 사물이 점점 짙은 빛을 띄고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공기에 서늘한 기운이 스며드는 때 즈음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이야기들이 많다. 약간 환상적이거나, 섬뜩하고, 밝은 낮동안에는 숨어있던 악의가 어둠의 틈새를 타 슬쩍 비어져 나오는 듯한 이야기다.

 

 "헨리에게 뻥을 치는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이미가 죽어도 그건 그대로였다. 또 하나 낳지, 뭐. 그의 옆에 앉아 그런 얘기도 했다. 헨리를 무릎을 잔뜩 웅크리고 누워 있었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그의 얼굴을 타고 내렸다. 그 말은 그에게 위안이 되었다. 그건 좋지만 에밀리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다. 침대에서 창백하게 질려 있는 아이를 보게 될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은 절대 아니다."

 

 인상깊었던 단편 중 첫번째, '진저브레드 걸'의 한 대목이다. 부부인 헨리와 에이미의 아이가 죽었다. 그들은 아이를 잃은 상처로 괴로워한다. 어찌보면 에이미는 무심한 태도로 이 상황을 넘기는 것 같지만 헨리보다 더 큰 상처를 갖고 있다. 아이를 하나 더 낳아 키우려는 희망을 갖게 된 헨리, 하지만 전혀 희망을 보지 못하는 에이미의 상처를 극복하는 다른 태도가 눈에 띄는 부분이다. 진저브레드 걸이 인상깊었던 것은 두사람의 상처 극복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서는 아니다.

 

 진저브레드를 두고 장식이 기교적이고 야한, 다소 천박한 예술작품를 지칭하는 말. 생강이 든 과자가 허울만 좋고 실속이 없음을 비유한다는 뜻이 있는데, 내용과 어떤 부분을 연상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녀가 난데없이 처하게 된 고립되고, 위협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필사의 저항이 정말 잘 묘사되어 있어 스티븐 킹만의 '유혹적인 글쓰기'를 잘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재미있었던 단편으로 꼽는다.

 

 "아니, 무서운 얘기 싫어. 그녀가 싱크대 옆에 서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하지만 동시에 듣고 싶기도 하다. 누구나 섬뜩한 얘기를 원한다. 다들 미쳤으니까, 게다가 꿈을 발설하면 정말로 실현되지 않는다고 어머니가 얘기하신 적이 있다. 말하자면 악모을 얘기해 스스로 길몽을 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빨을 베개 밑에 숨기면 대신 선물이 나타난다는 미신처럼 말이다."

 

 단편 '하비의 꿈' 중 한 부분이다. 우리가 스티븐 킹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이런 심리가 약간은 발현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서운 것은 싫지만 중간에 그만두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떻게 될까 조마조마해서 그만보고 싶으면서도 자신의 눈으로 끝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그의 글을 계속 읽게 만드는 밑바탕이 되지 않을까. 그의 입으로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이 마치 독자를 향해 혹시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이 이렇지 않는지 묻고 있는 것 같아 인상깊다.

 

 "모하메트 아타(9.11때 여객기를 납치했던 테러범-옮긴이)와 그의 자살특공대가 뉴욕 시에게는(보험 사업은 말할 것도 없고) 무척 악당이었을지 몰라도, 오후 내내 전화와 무의미한 싸움을 벌여 보니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대박 손님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2002년 여름, 전문 정신과 의사의 소파에 눕고 싶다면 번호표를 받고 줄을 서야 했다." 

 

 다른 단편들도 있지만 또 하나 주목할만한 것은 911 테러의 뒷이야기를 그려냈다는 점이다.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던 없던 테러는 그 자체만으로 모든 미국인에게 상처를 남긴 일이었음을 보여준다. 단편 '그들이 남긴 것들'은 911 당시 우연한 행운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느끼는 '생존자 죄책감'이라는 고통과 상실감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 약간의 환상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쓸쓸한 여운을 주는 결말로 마무리한다. 또다른 단편 '<뉴욕타임스>특별 구독 이벤트'는 좀 더 로맨틱한 느낌을 주는 단편이라 개인적으로 그 편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 외에도 '벙어리', '아주 비좁은 곳', '지옥에서 온 고양이'와 같은 단편들이 흥미로웠다. 특히 지옥에서 온 고양이같은 경우는 에드거 앨런 포우를 떠올리게 하면서 작년 이맘때 즈음해서 개봉했던 한국영화 고양이도 생각나게 만드는 문제적 단편이다. 다른 단편들도 그렇지만 일상에서 너무나 평범하게 마주할 수 있는 고양이를 무서운 대상으로 여겨지게 만들다니. 벙어리는 근거없는 괴담, 소문같은 이야기와 비슷한 구조인데 그 나름의 독특한 재미가 있었다. 스티븐 킹의 이름을 믿고 한 번 읽어봄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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