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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말하지 않는 것들
임우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6년 10월
평점 :
도서전을 찾았을 때 가장 인상깊었던 책 중 하나는 하늘에서부터 아래로 시선을 내리며 도시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경험을 선사해주는 그림책*이었다. 책을 직접 길게 펼쳐가며 볼 수 있다는 체험적 재미도 좋았지만,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는 것이 익숙한 도시를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도록 변주를 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시선을 바꾼다는 것, 그래서 달리 보인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여행지에서 객인 우리가 담아내는 여행지의 풍경은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뒷골목, 정돈되지 않은 담벼락, 깨진 블럭 틈의 풀, 낡고 촌스러운 간판을 건 가게처럼 지나치게 사소하고 일상적이라 생활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일 때가 있다. 시선을 달리하면 배경이었던 것들도 포커스 안으로 들어온다. '도시가 말하지 않는 것들' 역시 나의 시선과 감각으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을 낯설게 볼 수 있도록 안내해주지 않을까 기대되었다.
'도시가 말하지 않는 것들'은 꽤 재밌다. 도시를 이야기하기 위해 인류의 발전과 종교, 사회, 문화, 정치, 학문, 전쟁, 예술 등 다양한 분야와 긴 시간을 아우르고 있어도 부담스럽다는 느낌이 없이 다가온다. 저자가 심약한 독자들에게, 수많은 입문/교양서에게 상처입고 강제로 병렬독서가가 된 사람들에게 '이 책은 쉽습니다, 얼마나 쉽냐면 제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 질문한 건축 양식 구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통해 검증된 쉬운 안내서이니 안심하십시오.(19)' 하고 단언한 것처럼 확실히 잘 읽힌다. 그러나 잘 읽힌다고 했지 내용이 쉬운 것은 아니다. 읽을 때 이해가 잘 되는 것 같아서 가볍게 이 부분은 기억해두면 좋겠다,하고 적어두기 시작한 내용이 매 페이지마다 있다. 밑줄을 긋다보면 밑줄이 없는 부분이 없고, 테이프를 붙여두다 보면 책 옆면이 빼곡하게 알록달록 해지는 그런 책이 바로 '도시가 말하지 않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재밌다니, 대단하다.
이 책이 주목하는 포인트는 눈에 보이는 결과 뒤에는 반드시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점(49 걸작에는 예술가의 순수한 영감보다 배후에 숨은 자의 지극히 세속적인 필요가 존재)이다. 주류에 대한 저항, 문화적 경쟁 구도가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내왔다는 것, 워싱턴의 흰 대리석 건물들은 신생 국가의 정체성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거대한 방어 기제(51)이고, 조선총독부 청사가 서양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이유는 서양식 '석조전'을 완공하려 한 대한제국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는 일제의 증명(65)이자 일본 전통 양식을 사용해 노골적인 침략을 드러내고 민족적 반발을 일으키는 대신 '보편적 근대'의 언어 뒤로 숨어 침략자가 아니라 근대 문명을 전파하는 시혜자 프레임을 가지려 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처럼 책을 읽는 동안 왜 이렇게 지어졌을까? 왜 어떤 의도로 건축했을까? 좀처럼 의문을 품지 못하거나 너무 많은 의도를 품고 있는 도시의 풍경에서 이야기를 끌어내 호기심을 채워주고 상식을 쌓아가는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 미국이 국가간의 경쟁을 위해 박람회 용 임시 건물을 지었다는 것은 놀라웠다. 수평적 장엄함을 느끼게 하는 영국의 수정궁에 맞서 프랑스는 에펠탑으로 수직적 경이(82)를, 미국은 패리스 휠로 기계 문명의 정수이자 거대한 역동성(85)을 드러내 경쟁하고자 했는데 오늘날 각 도시를 상징하는 얼굴이 된 건축물들이 경쟁을 이유로 지어졌단 사실도 재밌지만 이런 투자를 일회용(?)으로 하려고 했던 그 시대의 과감함에 더욱 놀랐다.
사실 '도시'라는 단어 때문에 단순히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떠올리며 책을 읽었다가 그리스 로마 신전에서 시작하는 유서깊음에 당황하기도 했다. 게다가 도시를 알기 위해서 이렇게 넓고 다양한 분야까지 살펴봐야 한다니. 회화, 조각 등의 비율과 배합이 수학과 화학으로 연결되고, 인체에 대한 탐구는 의학과 닿아있다. 자연과 천문학, 기하학 등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많은 분야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함께 발전해 나간 것이다. 거기에 사람이 더해지니 도시의 이야기를 들으려다 예술, 종교, 전쟁, 사회를 두루 만나게 될 수 밖에. 다만 현대적 건축물들의 흐름을 따르다보니 서구의 건축과 도시를 중심으로 살피게 되고, 한국의 건축, 도시에 대한 내용은 3부에 가서야 등장한다는 것, 서구열강들 사이에 오직 일본만이 근대 건축에 유의미한 지표를 드러낸 것은 아쉽기도 하고 조바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 나처럼 우리가 사는 도시의 평범함에 대해 궁금했던 독자나, 한국의 건축은 어떤 의미와 시기를 보내왔는가 관심과 기대를 품고 있던 독자는 3부가 특히 재미있을 것이다. 이 재밌고도 슬픈 내용은 기술과 자본이 부족한 비서구 국가의 한계에 머물렀던 한국 건축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1세대들의 등장으로 시작하는데, 한국 현대 건축의 1세대로 김수근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공교롭게도 최근 다녀온 아라리오 미술관에서 군사정권 시절 프로파간다 건축을 한 결과물인 남영동 대공분실의 차갑고 비인간적인 분위기를 한껏 맛보고 온 탓에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별개로 건축가의 의도 위에 관료주의가 끼얹어져 좌절되는 관습이 광범위한 분야에서 아직까지 이어져 고통받는 상황은 웃지 못할 문제점이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도로가 새로 닦이는 것만이 눈에 띄는 변화라고 생각했는데, 도시가 사람들 모르게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걸 어느새 사라져가는 전깃줄과 합류식에서 분류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하수처리관으로 알게 되었다.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만들기 위해 건축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읽기 시작한 책은 도시가 어떤 길을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내 앞에 펼쳐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눈앞의 도시를 배경처럼 소모해왔던 것 같아 낯설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도리어 제대로 보기부터 할 수 있도록 길을 잡아준 것이 좋았다. 책을 읽고 나니 모두가 한번쯤은 자신의 집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건축가들이 내가 누군지 알고 싶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품고 근원적인 질문(299)을 던져왔던 것처럼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정리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것 같다. 재미와 의미 모두 챙길 수 있는 책이었다.
* <수직으로 펼쳐 보는 거대도시>
* 그랜드 머큐어 임피리어 팰리스의 독특한 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