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예술, 가짜 예술 - 우리를 조종하는 것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
장 프랑수아 마르텔 지음, 김기상 옮김 / 서스테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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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정말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을 품고 읽었다. 책에서 주장한 작가와 예술의 분리, "예술이 뿜어내는 신비로운 광채는 작가의 도덕적 흠결은 물론이고, 보는 사람의 삐딱한 편견마저 모조리 녹여버린다. 45"는 문장에서, "인공물이 지배하는 사회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작가만을 요구하기에 진정한 예술은 더욱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다. 44"는 문장에서 저자가 대체 예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세상의 그 모든 규율과 도덕, 양심, 정신의 뿌리 같은 것들 위에 예술이 존재할 수 있을까? 결과물이 좋다면 배경은 흐린 눈으로 지워내고 그 가치에 집중해 수용해도 되는 것일까? 도덕성 요구하는 것과 진정한 예술 사이에는 어떤 반비례가 존재한다는 것일까? 고대 그리스적(112) 사고방식이겠지만 예술의 이름으로 희생되는 것이 있다면, 선을 넘어 자행되는 행위가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마땅히 거부와 배척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 '사람다움'보다 상회하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지난 6월에 종료한 국립현대미술관의 <데이미언 허스트>전시가 감당해야 했던 논란과 비판은 이에 대한 응답이라 여겨진다. 

읽는 동안 이것은 가짜 예술이다,하고 고발할 수 있는 범위의 결과물은 어떤 기준을 두어야 할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바타>를 가짜 예술(93)로 드는 것은 얄팍하지 않은가. 일반 관객마저 이런 오락 영화를 예술의 범주로 두지 않는다. 다만 로만 폴란스키나 김기덕 같은 감독들의 영화가 그 '모호함'을 품고 있다고 해도 이를 진짜 예술로, 또 찾아볼 가치가 있는 영화로 목록 위에 남겨두고 싶은 생각은 없다. 솔직히 남성의 사고를 거쳐 내놓은 영화에 남성이 올려놓은 평가로 추앙받는 과거의 산물들에 재평가가 필요하지 않는가 싶다. 마찬가지로 왜 인공물, 특히 교훈적 인공물, 공익광고 같은 것들에서 '진짜 예술의 경지'를 논하는지 알 수 없다. 메시지와 함께 누구의 이목이라도 집중시킬만한 의미와 상징이 내포되어 있다면 좋겠지만, 아바타와 마찬가지로 마약, 술, 음주운전을 규제하는 인공물에서 누구도 모호한, 왜 안되는가/나쁜가에 대해 논쟁적으로 사고할 여백을 원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직관적으로 메세지를 전달하고 인식하고 싶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주입되지 못하는 판에 '진짜 예술'이 되어 개개인에게 직접 사고하고 판단할 여지를 둘 필요가 있을까 싶다. 

아름다움에 대해 숨을 헐떡이게 만드는 면(126)이 있다 했는데, 전에 사람은 어떤 것에 경이로움/압도감을 느끼는지에 대해 생각했을때 오래된 것, 거대한 것, 아름다운 것 앞에서 품게 되는 경외/두려움(116)을 꼽은 적이 있어 공감됐다. 다만 생각이 갈리는 부분은 마치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재해와 같은 폭발, 압도적인 위력의 파괴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원자폭탄 투하를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강력한 충격을 남긴 '미적 사건'(241)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자행되어 온 식민지배, 말살 정책의 치밀하고 집요한 파괴와 죽음을 두고도 같은 감상을 가지고 있을까? 오히려 이런 의문에 대해 <아바타>처럼 선과 악으로 구분 지어 도덕적 정답을 향해 질주(94)하게 만든다고 여기지 않을까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원자폭탄이라는 사건이 '인간을 이전보다 더욱 소외(251)'되게 만드는 인류에게 더 깊은 상처일지, 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 저지른 전쟁범죄들이 더 치명적이고 깊은 상처일지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 그렇다면 우리가 창의성이라고 부르는 성질이 사실 인간의 뇌에 담긴 고유한 능력이라기보다는 어떤 목적을 지닌 거대한 힘이 인간을 통로로 삼아 발현되는 특성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창의성은 우리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188" 

예술을 행하는 주체자가 일종의 통로(186)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특히 작가들이 많은 후기로 언급하고 있다. 작품에 몰입하게 되었을 때, 어느 순간 인물들이 작가의 의도나 정해놓은 흐름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현상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작품의 흐름과 결말은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에게로 넘어가게 되는데 이 경험의 순간들이 '통로'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인지, 겸손의 표현일 뿐인지 궁금해졌다. 이 통로의 개념이 연결되어 예술이 가진 예언적인 힘을 이야기할 때 그 안에 내포된 보편적 가치를 통해 시대를 초월해 사회 현상을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꿰뚫어보는 메세지를 전달한다는 것(<지하 생활자의 수기>가 20세기 허무주의를 예견 200)은 동의하지만-그런 것들이 결국 걸작이 되고 고전이 되는 것이고-, 영화 속 출입 금지 구역이 10년도 안되어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해 현실이 되었다거나(201) 한 록밴드의 파멸적 노래 가사가 911테러로 재현되었다(202)는 류의 신탁설로 예언적인 힘을 강조하는 방식은 전체적인 내용까지 의심하게 만들만큼 아쉬웠다. 

책의 내용에 의문을 품으며 읽는 동안 나의 의식을 조종하고 있는 것들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인지 계속해서 물어보게 되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나의 판단일까, 이런 의문이 필요한 영역이 맞을까, 예술이 작가로부터 독립된 고유한 존재(45)라면, 예술은 도덕적 잣대의 평가에서 벗어날 수 있어도 통로일 뿐인 예술가는 마땅한 판결을 받아야 하는게 아닌가, 그 과정에서 작품만 남고 통로는 지워져 아무런 기록도 영광도 얻지 못한다면 '진짜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남아있을까도 궁금했다. 왜 도덕적 흠결에 대하여 이렇게 집요하게 의문을 가지게 될까 생각해보니, 사회 전반에서 추구하는 다른 가치를 위해 도덕을 버렸을 때 그 사회와 문화는 천박하게 무너져내렸다. 예술은 '도덕적 가치로 판단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가치를 무시하면 결국 천박해지고 마는 아이러니 앞에서 막혀 방황했던 것 같다. 아쉬움도 품고 있었지만 이 '투박한 흠집이 결국 균열(173)'을 품고 있었으니 괜찮은 도발 아니었나 싶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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