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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
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이렇게 감성적인 이름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어쩌면 조금 신랄한 내용이나 냉소적일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었다.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라는 부제를 보며 반년쯤 전에 읽었던 [양양]이란 책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양양]은 가족 안에서 지워진 존재인 고모의 자취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에세이로 가족들의 이름이 모두 새겨진 비석에 오직 고모의 이름만이 없음을, 그리고 아무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이름없는 여자'가 존재했음을 알리는 추적기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름의 빈자리에'를 앞에 두고 상실과 소외 같은 것들을 먼저 이어붙여 나갔던 것 같다.
하지만 '이름의 빈자리에'에서 만난 이름들은 대체로 감성적이고 조금은 애틋한 존재들이다. 때로는 불행하기도 하지만 그를 돌아보는 시선에는 온기가 맺혀 있다. 대상을 감싸안는 연민에서 가끔은 멀어지기도 하고 결국은 함께 머물며 기대기도 했다. 남다른 이름으로, 그리고 종종 불리고 싶은 이름을 붙여서 살아온 저자가 모아놓은 이름들은 사랑하는 이의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달라는 일치의 고백(94)이자,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의 첫 마디(84)이기도 하고, 영원히 떠나가는 이를 붙잡는 마지막 울림(132), 끝내 미결로 남아버릴 사랑의 이름(186), 오래된 필름 속에 박제된 젊음의 초상(234)이다.
" 서래와 동점. 서쪽에서 와서, 동쪽으로 점점. 불교의 전래 경로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하셨다. 190" 저자가 <헤어질 결심> 속의 서래보다 십여년은 더 먼저 서래라는 이름을 선점했음을 또렷하게 밝힐 때마다 얼마나 큰 애착을 가졌던 이름이었는지 느껴졌다. 사실 보는 입장에서야 누가 먼저이건 큰 상관은 없는데, 가끔 우리는 이런 사소한 것들을 확실히 인정받고 싶을 때가 있다는 점에선 공감이 됐다. 다만 살면서 어떤 언어로든 쉽게 쓰여지기 어렵고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이름을 가진 저자는 왜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려 했을까는 궁금해졌다. 이 '다른 이름으로 살아보기'는 다른 옷을 입는 것 같을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을까?
'다른 이름으로 살아보기'는 낯설수록 쉽고 가까울수록 어렵다. 이름을 바꾼 사람들의 오랜 주변인들은 버릇처럼 원래의 이름을 먼저 찾는다. '처음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가 다가와 하나의 의미가 되었'*던 순간이 전부인양, 때로는 악의적이리만큼 꿋꿋하게 본명을 부르곤 한다. 하지만 낯선 이에게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이름 바꾸기'가 유행처럼 번진 때도 있다. 택배나 배달음식을 받을 때 주문자에 곽두칠, 문근철, 조덕출 같은 이름을 붙이는 꿀팁이 여성들 사이에서 퍼져나간 것이다.* 여성임이 드러나 혹시 모를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키기 쉬운 이름 대신 쎄보이는 남성적인 이름으로 불편한 상황을 피해보려는 시도였다. 이름이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정보와 공유하는 느낌이 있음이 새삼 와닿았다.
저자와 비슷한 세대이긴 하지만 조금은 차이가 있다고 느꼈던 부분이 '리버 피닉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였다. 90년대 학번 정도의 세대가 가진 리버 피닉스에 대한 탐닉, 예찬, 감탄, 갈망의 정서(234)를 어렴풋이 엿본 것 같았다. 리버 피닉스보다는 호아킨 피닉스의 영화가 더 익숙하고, 리버 피닉스의 동생이라는 수식이 아닌 호아킨 피닉스의 형으로 소개되는 쪽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남매들이 리버, 레인, 섬머 일때 혼자만 호아킨이었다면 좀 섭섭하긴 했을 것 같다. "다들 보라, 노을인데 왜 나만 덕선이야!"* 하고 울부짖던 성덕선이 떠오른다.
책에서도 소개된 [프랑켄슈타인](32)을 작년 처음 읽어보았는데, 그에 대한 감상이 저자의 딸과 같았다. 우선씨일지 민진씨일지 모르겠지만, 그들과 같이 젊지 않아도 감상은 같을 수 있으니 피조물에게 느끼는 바가 갈리는 것은 온전히 나이탓은 아닐테다. 피조물의 마음이 악으로 채워진 원인이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아서,라는 온통 원망과 불평, 증오로 가득찬 태도에서 지긋지긋함을 느꼈다. 날 사랑해주지 않으니 널 고통과 불행 속에 빠뜨리겠다는 공격적인 대응을 우린 뉴스, 사회면에서 너무나 자주 만나게 되지 않는가.
이름이 가진 의미와 기능들을 찬찬히 음미해보는 시간이었다. 평생을 흔한 이름으로 무감히 지내왔는데 가끔은 내가 불리고 싶은데로 이름 붙여보고 싶어졌다. 나에게 달라붙은, 이제는 나와 구분되지 않는 익숙한 이름을 벗어내면 좀 더 가볍게 살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넌 착하고, 똑똑하고, 중요한 사람이야.* 넌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응원해주는 것처럼 그 '이름의 빈자리에' 넌 어떤 이름으로든 불릴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특별한 책이었다.
* 시 [꽃] - 김춘수
*'쎄 보이는 곽두팔 씨'가 필요한 세상 [아시아경제 20190404]
*드라마 <응답하라 1988> 2015
*영화 <헬프>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