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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업(生業) - 그 징하고도 찡한 노동의 표정들
은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평점 :
노동이란 뭘까, 아니 그 전에 나에게 노동이란 뭘까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나마 어린 시절에는 소원이 뭐냐하면 통일과 세계평화를 주입받은 대로 출력해냈지만, 로또라는 일확천금의 꿈이 세상에 퍼진 이후로는 로또 당첨을 통한 노동해방을 떠올렸다. 나만 이렇게 세속적인가, 하면 요즘은 덕담도 적게 일하고 많이 벌라는 말로 하듯이 노동, 일한다, '생업'이란 것이 전과는 확실히 다른 세태이긴 하다. 이 변화가 굳이 요즘만을 뜻하냐 하면, 우리 아버지 세대조차 자의는 아니었겠지만 '평생직장'이란 말을 실현하기엔 너무 험난한 시대를 살아오지 않았던가. 어찌되었든 생에서 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좀 덜 벌더라도 원하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선택이 유연히 받아들여 지기도 하고, AI와 로봇 기술의 발전과 함께 노동하지 않는 삶이 보편화 될 것을 기대하게도 되었다. 실제로 AI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을 국민에게 환원해야 한다는 취지로 '국민배당금제'가 논의되기도 했다. 노동의 현장에서 인력이 배제되어 가는 이 변화의 흐름이 과연 축복이 될까. 일한다는 것에서 돈벌이 외에 또 어떤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지 '생업'의 눈을 빌려보고 싶었다.
일에 대한 원망과 배척을 쉽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신성성을 담고 있었나보다. '생업'을 읽으며 만나게 되는 직업들을 통해 나도 모르게 마음을 열고 또 어떨 땐 닫으며 평가를 하고 있었다. 모든 생각을 전부 다 동의하게 된 것은 아니더라도 읽다보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선입견이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특히 문신을 업으로 하는 타투이스트 황도(147)의 인터뷰에서는 순간적으로 가장 먼저 문신은 의료인이 하는 게 아니면 불법이 아니었던가 떠올렸다. 지난 25년 9월 문신사법이 통과(154)되었다는 것을 보고는 평소에 관심있게 알아보지 않았던 것을 타인을 판단하는데 끌어다쓰려고 했구나 싶었다. 드러내놓고 타인을 돕는 일, 힘든 일인데도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일, 보통 의지로는 계속 해나가기 어려운 일로 보이는 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대책없이 열린 마음으로 읽고는 젊어보이는 사람들, 술과 문신이 잦은 빈도로 언급되는 내용들은 일 외의 다른 잣대로 꼬아보았다. 요양보호사 일을 하는 강석경(177)의 인터뷰에서 '사람은 노력하면 변한다며 도저히 안 바뀔 듯한 어르신도 달라진다던(185)' 내용이 나오는데 안의 굳은 마음도 이런 깨달음을 통해 달라지겠지, 달라져야지 싶었다.
'생업'에서 노동의 현장을 만나게 될 것이란 기대는 했지만 거기에 자연스럽게 '먹고 사는 일'이 겹쳐지게 될 것은 예상치 못했다. 직업 자체가 사람들을 먹이는 농부, 급식 노동자, 요리사, 배달 노동자 같이 먹는 일에 관련된 것들도 있었지만 다른 일을 하는 인터뷰이들의 이야기 안에도 요즘은 뭘 먹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무슨 음식이 자신을 살렸는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 김치김밥, 치킨, 황도, 요아정, 돼지갈비, 김치찌개, 소주, 막걸리 같은 음식들이 각자의 삶과 얽혀 자연스럽게 먹고 사는 일 이야기가 되고 사람이 사는 일 이야기로 번진다. 처음엔 '먹고 사는 일'이 생과 업에서 각각 겹쳐지는 것이 재밌었는데, 읽다보니 가장 편하고 가까운 방식으로 각자의 삶이 가진 무거움은 줄이고 거리는 좁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 기민하고 탁월하다 여겨졌다. 말을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질문하는 사람이 차린 식탁 위에서 한솥밥 먹는 것처럼 마음 열고 정붙이게 되는 과정이 은근하다. 신간들을 보면 '은유 추천'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는 책들이 종종 있었는데 이래서 그렇구나 싶었다.
" 강석경은 아들에게 고맙다. 엄마로 살았던 20년 세월은 동준이가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고. 그렇게 가면서 던져놓고 간 이별의 상처가 크기도 했지만 일반인들이 결코 다가가지 못하는 삶의 또 다른 영역을 사랑으로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동준이가 만들어주었다. 고통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삶의 진리. 그건 그가 요양 보호사로 일하면서 살아가는 든든한 밑천이 되어주었다. 193"
가장 인상깊게 읽은 것은 요양보호사 강석경(177)의 인터뷰였다. 네이버에서 기부 캠페인을 하는데 기부를 할 수 있는 콩이 모이면 항상 '노인' 기부처를 찾아 기부를 한다. 환경, 동물, 아이들 같은 분류로 나눠져 있는 기부처들 중에 사람의 마음이 닿기 가장 어려운 것이 내 딴에는 노인이었다. 모두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누구의 곁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 가장 어려울까 생각해보니 노인이란 생각이 들어 꼽았는데, 책에서도 노인을 돌보는 일 중 대소변 처리는 가장 쉬운 일 중 하나라며 잘 대해 드려도 느닷없이 니까짓 것들이, 하고 고약한 말들, 어이없는 무례(181)를 분출하는 사례들이 나온다. 그렇지만 가장 징하면서도 찡한 마음을 갖게 한 것도 그의 이야기였다. 단순히 일이 힘들겠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이해, 삶의 굴곡이 품은 진리를 포용한 사람들이 서로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순간이 따뜻하고 빛나게 보였다.
배우, 싱어송라이터, 유튜버처럼 잘 알려진 사람들도 '생업'안에서 만날 수 있다.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알게 모르게 더 관심이 가고 익숙하게 여겨질 법도 한데 반가운 마음도 잠시, 신기하게도 지금도 시청과 광화문 같은 거리에 나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한 사람들에게 더 집중하게 되는 책이었다. 어떤 직업을 가진, 정체성과 사연을 가진 사람이라도 '생업' 안에서는 다양한 직업 중 하나를 가진 인터뷰이로 자연스럽게 묶인다. '생업'의 의미가 먹고 사는 일에서 삶으로, 삶에서 다른 사람 마저도 먹이고 살리는 생의 업으로 확장되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유명하고 힘들고 돈을 많이 벌고 같은 잣대가 사라지고 그저 존중과 배움만 남게 된다. 그저 돈과 노동으로만 '생업'을 바라보았던 처음의 독자도 함께 사라지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자 동지가 된다. 어딘가에서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