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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불운 - 2024 공쿠르 단편소설상 수상작
베로니크 오발데 지음, 이세진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평점 :
" 한 발 한 발 나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의 누군가가, 심지어 내가 나를 믿기 전부터, 나를 믿어준다는 것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그 누군가가 그저 내 엄마일지라도. 74"
언젠가부터 행복하지 않은 결말이 느껴지는 것들은 시작하기 어려워졌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에는 그런 씁쓰레한 느낌을 오히려 좋아했던 것도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해진 불행을 향해 가는 듯한 이야기를 보면 마음이 무거워져 괴로웠다. 우리의 오귀스트에게 쌓여가는 약간의 불운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이어지는 황망한 생의 종착점 같은 것들이 미묘했다. 어쩐지 '오라질, 운수가 좋더라니'*하던 나쁜 결말의 암시같아 불안했다.
그래서 이어지는 에바의 이야기를 볼 때도 자꾸만 머뭇거리던 그 망설임이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될까봐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도 에바의 삶은 그만의 궤적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오귀스트의 삶을 조명하는 데에 에바의 삶이 쓰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한낮의 불운' 안에서의 모든 주인공들은 서로의 궤적이 아주 잠시 겹치거나 때로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 중에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데, 이렇게 한알씩 꿰어지는 구슬처럼 이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줍다보면 내 주변의 사람들도 좀 더 이해하고 싶어진다. 내가 보고 있던 상대방의 단면을 통해 내렸던 판단과 단절이 아쉽고, 타인의 내면에 담겨 있을 깊은 우주를 기대하고 궁금해지게 만든다. 사람에 대한 이해하고 싶어지는 마음, 새삼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를 읽고 보고 쓰고 그려내는 이유가 아니었던가 깨닫게 된다.
" 라셸은 우리 안에 거하는 악이 개인적이면서도 일반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 중 어떤 이들이 원래부터 능숙한 고문관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녀는 이 남자가 괴물로 돌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일순간도 의심하지 않지만 지금은 그도 완전히 무방비 상태다. 91"
책을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미래의 남자와 철조망 소녀' 이야기였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반짝이지 않는 크리스마스트리 꼬마전구(46)'같은 소녀이지만, 그리고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를 끌어안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 이야기 안에서 소녀는 두 사람 몫의 영웅이 될 수 있었다는 경쾌함이 마음에 들었다. 살의를 멈추고 목숨을 구하는 과정에서 어떤 의도도 없었지만 그저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 순간 가장 반짝이는 빛이 되지 않았던가.
'타는 듯한 수치심을 일찌감치 배워야했던(139)' 젤리의 그 날, 잊을 수 없는, 처음 택시를 탔던 날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처음 불행한 결말이 정해져있는 것처럼 암시를 하는 전개를 견디기 어려워한다고 했는데, 젤리의 이야기는 올랭프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던 사람 중 한명이 된 것처럼 그 갑작스러운 동요, 차가운 당황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충격을 받았다. 차라리 미리 알았더라면, 하고 바랄만큼.
" 나는 젤리를 믿는다. 차 안에는 플라스틱 나부랭이들, 아기 카 시트, 뜯어보지도 않은 우편물이 있고 조수석 바닥에는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들이 나뒹군다. 빈 캔과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가 글로브박스 안에 있고, 트렁크 안에는 파란색 크라프트지에 싸인 정체불명의 생일 선물이 있다. 그리고 젤리의 마음은, 왜 아니겠는가, 언제나 파란색 크라프트지에 싸인 그 미지의 생일 선물과 비슷할 것이다. 소중하고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 그렇지만 망가지지 않고 실망스럽지도 않은 그 무엇과. 156"
하지만 이 비정한 불행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아래 깔려있는 작은 다행을 더듬어보게 만든다. 한 사람의 온 생을 관통하는 할퀴어 불거진 끔찍한 상처를 들이밀면서, 친하지도 않은 친구의 생일 파티에 어린 동생까지 떠맡겨 오게 된 변수를 두고, 동시에 이것이 삶이고 어떠한 벌이나 유감 때문이 아니라 때로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이 일어나는 일임을 이해하게 한다. 베로니크 오발데가 탁월한 이야기꾼임을, '한낮의 불운'이 짧지만 깊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즘은 전보다 소설을 적게 읽게 되었는데, 도파민과 짧은 영상에 중독되었다는 핑계를 댔지만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종일 손바닥 안의 화면을 들여다봐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다면, 보고 싶고 기대되는 뭔가를 찾고 싶은데 그게 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면, 우리가 바라고 기다려왔을지도 모르는 삶의 이야기를 '한낮의 불운' 안에서 확인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