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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디자인 - 우리 시대의 프로덕트 디자이너 100
파이돈 편집부.켈시 키스 지음, 최다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1월
평점 :
'좋은 디자인은 아름다움보다 먼저, 삶을 생각한다'
'삶을 위한 디자인'을 만난 것은 마침 세번째로 오른쪽 고무장갑에 구멍이 났던 날이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축축해진 손을 씻어 말리고 찬장을 열어보니 왼손만 남은 고무장갑이 두개나 더 있었다. 새 고무장갑을 사려고 쇼핑앱에 들어가니 한쌍의 고무장갑, 한쪽만 있는 고무장갑 그리고 어느 쪽으로든 사용할 수 있도록 엄지 손가락이 디자인 된 고무장갑이 있었다. 세상에, 방향에 구애받지 않고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는 고무장갑이 있었다니! '삶을 위한 디자인'의 소개를 읽었을 때, 너무도 다르지만 결국 그 가장 깊은 곳에 '고무장갑'과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음을 꿰뚫어 본 기분이었다. 물론 그날 난 오른쪽만 있는 고무장갑 3개 세트를 구매했다.
책에서 만나게 되는 디자인들은 고무장갑의 엄지손가락의 활용도와는 결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고 그저 책을 한장씩 넘기는 것만으로도 시각적인 즐거움이 채워지는 기분이 든다. 주로 영화를 볼 때 저런 소품과 공간 디자인을 어떻게 채워넣는 걸까 궁금할 때가 있는데, 여기 꼽힌 100인의 디자이너들을 살펴보기만 해도 그 답이 나오는 것 같다. 책에서 작품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고 실리는 것들이 의자, 탁자, 조명인데 본질을 흐리지 않으면서 얼마나 더 한계없이 해체되고 자유롭게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그 자신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디자인하라, 당신이 디자인하는 것이 곧 당신이다.*
딱히 미적 감각이랄 것이 없는 탓에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기본형이다. 유행을 따르거나, 어딘지 포인트가 되는 요소가 있다 싶어 고른 것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보면 이게 뭐가 좋았었나 싶게 촌스러워 보인다. 그러다보니 웬만하면 시기를 타지 않을 것들을 고르고, 장식이 될 만한 요소는 가급적 배제했다. '심플 이즈 베스트'란 말을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그 문구가 나의 삶을 덜 복잡하고, 그나마 깨끗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디자인은 결국 생활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좋은 디자인이란 어떤 것일까 물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삶을 위한 디자인'을 보며 꼽은 인상적인 디자인 중에 미셸 샤를로(62)가 가장 가깝게 여겨졌다. 특히 그의 작품의 뿌리가 되는 세가지 원칙 중 첫번째 "산업 디자인 원칙을 지킨다"에 이어 효율성, 체계, 간결한 형태의 강조가 마음에 들었다. 함께 실린 그의 작품들은 확실히 기능과 편의에 중점을 두었다. 만약 사무를 보는 공간을 꾸미거나 현실적으로 사용할 가구를 고른다면 미셸 샤를로의 의자를 고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아름다움이 강조되면, 현실을 조금 지우고 취향을 살짝 더하면 감프라테시(92)의 디자인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정갈한 나무와 직물의 조화로 깔끔하면서 따뜻한 분위기가 좋다.
취향을 떠나서는 하이메 아욘(108) 디자인 다른 무엇보다 편해보여서 좋았다. 보기에 좋지만 막상 사용하라고 하면 망설여지는 작품들이 다수 존재하는데 외출해서 카페라도 가려면 의자가 편하고 탁자 높이가 맞는 곳을 찾기 위해 30분은 예사로 헤매게 되는 요즘 세태에 '편함'이 담겨있는 디자인은 귀하다. 그리고 음포 바키르(272). 그의 홈커밍 컬렉션 사진은 단 한장으로 모든 것을 뛰어넘는 묘한 매력을 뽐낸다. 자연과 그대로 어우러진, 어쩌면 그 자체인듯한 작품은 시선을 사로잡는 그만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주로 가구와 관련된 디자인들을 꼽았는데 그와 별개로 다닐 뤼바켄의 조명(224)은 그 소개글이 너무나 멋져서 작품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소개글을 읽고 나서 다시 작품을 보니 과연 번져나가는 빛무리에 서정과 서사가 더해지는 것 같달까.
기대를 했지만 그 이상으로 좋았다. 단시간에 집약적으로 아름다움을 맛본 느낌이다. 아주 욕심껏. 책을 읽는 일은 어떻든 계속 눈과 머리를 쓰는 것이라 골몰하다보면 피로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삶을 위한 디자인'은 반대로 눈과 머리의 감각을 새로 깨우고 전환시켜주는 묘한 개운함이 남았다. 지인이 분야는 다르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필요로 하는 일을 하고 있어 꼭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어졌다. 누구든지 '삶을 위한 디자인'을 펼쳐본다면 분명 이 안에 담긴 매력과 가치를 알아보게 되지 않을까. 2026년을 여는 흥미롭고 인상적인 책으로 꼽고 싶다.
* you are what you eat. 원 브리야 사바랭(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