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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미영 팬클럽 흥망사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5
박지영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7월
평점 :
"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죄다 쓰레기였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결국엔 쓰레기로 판명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나도. 그러나 상관없었다. 이런 것은 다 맥거핀에 불과하다고, 그때의 복미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40"
솔직하자면,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를 보자마자 읽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보고 웃고 싶었다. 덕질하던 최애의 병크에 현타를 맞고 방황하던 그녀가 결국 스스로 덕질의 대상이 되고자한다는 내용이, 직접 자신의 팬클럽을 만들고 팬이 복미영에게 입덕하는게 아니라 복미영이 팬을 선택해 가입시키는 전례없는 헤드헌팅 방식으로 운영하는 내용이 척 봐도 웃겼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복미영을 '그래도 되는 사람(165)'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며 공감도 하고, 알량한 훈수도 좀 두고, 못내 응원해보고 싶었다. 덕질만 하기엔 너무나 두툼한 두께를 보고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 안에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 1이 아닌 2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을.
" 김지은에게는 아무 관계없는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거나 일방적인 애정을 쏟는 재능이 부족했다. 그런 건 확실히 재능이었다. 52"
복미영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처음, 나는 가볍게 낄낄 댔고 무방비하게 허를 찔렸다. 사실 나는 한번도 누군가의 팬이었던 적이 없다. 적당히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척 했지만 한번도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응원해본 적이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적당히 가장 인기많은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사실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열정이 부족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던 것도 맞고. 음원이 잘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컴백하면 좋고 해체하면 안됐고 흐지부지했다. 늘 모든걸 적당히만 좋아하게 되는데, 열정과 애정을 위장하려 해봐도 남들처럼은 잘 안됐다. 그런 나와 비슷한 지은의 등장에 놀랐다. 이것도 재능이라고 볼 수 있는 영역이구나.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감정이 부족한 것보다는 재능이 없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이 마음 편해짐의 다른 방식으로 미영씨는 침을 뱉었던 것일까. 미영씨의 침뱉기가 볼 때마다 당황스러웠는데,-아마 미영씨와 연인도 친구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은조의 손을 놓은 뒤로 미영씨의 관계맺기가 일그러진 형태, 상처의 모양이라 생각하니, 아니 그래도 이건 안된다. '재능'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미영씨의 침뱉기는 넘어설 수 없는 극복이 되질 않는 입덕할 수 없는 사유였다. 차라리 미영씨가 그냥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더라면 이 요상한 팬클럽 흥망사를 더 가볍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 미영씨를 아낄 수는 없었어도 지은을 바라보며 점점 가까워졌다. 은수이모를 버리려는 지은의 결심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그럴 수 있다'고 마음 속에서 은연 중 동조하는 자신을 깨닫고, 사실 난 재능이 없는게 아니라 감정이 부족한 것이 맞나보다고 생각했다.
" 그렇게 불온하고 위험한 마음은 우리를 미친년으로 만들고야 말 거였다. 복미영은 미치고 싶지 않았다. 195"
베로니카와 은수이모가 만나고 가까워지는 동안 베로니카가 있는 순례 씨의 국수집까지 운전을 해서 은수이모를 데려다주었던 미영씨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침을 뱉어도 피할 수 없던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누군가를 떠넘기려는/버리려는 것이었을까. 책임지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버리기 위해, '돌봄'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아냈던 이모를 돌봐야 할지도 모른다는 지은의 두려움과 같았을까. 미영씨와 지은, 은수이모와 베로니카의 관계를 통해 지난 '2013년 40년 동거한 여고동창의 비극적 죽음[SBS 2013.10.31]'을 다룬 기사의 내용을 책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미영씨의 삶에 지은이 끼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누구의 이야기도 누가 주인공인 것도 아니라 누구나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저 각자의 삶에서 순간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얽혀있었다.
단순한 팬질 분투기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w의 병크와 미영씨의 탈덕은 하나의 사건일 뿐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 안에는 더 큰 흐름이 있었다. 뜬구름 같은 미영씨의 말에 귀 기울이다보니 어느새 입안에 쓴 침이 고여 자꾸만 침을 뱉고 싶어진다.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와 함께 도착한 굿즈들의 의미를 그제서야 다시 본다. 쏠쏠히 마련된 팬클럽을 위한 역조공은 관념적 버리기 아티스트였던 복미영씨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녀가 버렸던 것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처지에, 깜냥에, 네, 안, 못. 미영씨는 병크 터뜨린 최애가 아니라 이렇게 삶에서 하나씩 모나게 튀어나와 마음을 찌르던 것들을 하나씩 버리고 고치며 '그래도 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 다른 사람에게 우습게 보인다는 건 뭔가 다정하고 귀여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스워지고 싶다. 더 우스워지고 싶다. 뜬금없이 그런 마음도 들었다. 97" 미영씨의 팬이 될 수는 없었지만, 잠시나마 그 우스움에 기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