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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책 - 괴테에서 톨킨까지, 26편의 문학이 그린 세상의 정원들
황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평점 :
'정원의 책'은 책과 그 책 안의 정원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냈다. 어느 책에 대해 줄이고 줄여 건조하게 소개하다가도, 그 안에 정원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갑자기 참견하길 좋아하는 이웃처럼 돌변해 땅은 몇 평에 뭐를 어디에 심었고 비료는 뭘 주고 물은 며칠에 한번씩 주는지 캐내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여러분 이 작품을 아시나요? 이 작품은 이런 인물이 나오는 저런 내용인데, 그것보다는 거기에 나오는 아무개라는 인물네 집에 정원이 있습니다. 하고 갑자기 관찰자의 시선을 화면의 중앙에서 바깥으로 옮겨오거나 그 밖으로 유도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읽다보면 정원에 관심이 많고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오타쿠-구나 싶어진다.
책에서는 총 26가지의 정원에 대해 소개하는데, 비슷한 형식이 짧게 반복되다보니 전혀 생소하게 느껴지는 책에 대해서는 [힙네로토마키아 폴리필리(98)] 읽다가 갑자기 눈 앞이 아득해지면서 머리속이 공해지는 체험을 할 때도 있었다. 지금도 저 제목을 다시 쓰느라 세번은 확인했는데, 정말 처음 들어보는 제목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바르와 페퀴셰(33)], [레겐트루데(211)] 같은 작품들도 생소하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이런 작품들은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지고 관심이 가는 면이 있다. 하지만 '힙.폴'은...
괴테에서 톨킨으로 이어지는 문학과 정원의 이야기라는 소개에 처음엔 접하게 되는 작품들이 너무 심각하거나 뒷배경이 크게 다가오지 않을까 염려했었다. 책의 초반부에 나오는 [부바르와 페퀴셰-19세기 리틀 포레스트] 를 만나고 나니 부담감이 줄어들고 웃음이 나왔다. 읽으면서 귀농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중장년층의 '자연인'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떠오르고, 얼마 전 읽었던 '사이보그 가족의 밭농사/황승희'라는 책도 떠올랐다. 전원생활이 참 좋아보이는데 사실 그 모든 좋아보이는 모습에는 비용과 배움, 노동력이 든다.
환상 위에 엉터리로 심어놓은 그들의 정원은 매번 엉망으로 망쳐지고 만다. "모든 것에 실패하고 인생에 대해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된 이들이 다시 필경을 시작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39)"나는데, 이들의 도전을 웃으며 지켜보다 문득 사람은 왜 낯선 환경에 도전하는 것으로 성취를 이루려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많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힘과 명성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처럼, 성공과 이상향은 외부 세계로 향한다. 마치 '길가메시가 불멸의 명성을 얻고자 신들의 영역인 삼나무 산으로 모험을 떠나듯이(200)' 세상이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라는 조언을 해주는(혹은 종용을 하는) 것만 같다.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사람들 중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성취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도시/귀농 생활에 시달린 이들은 다시 자신이 떠나왔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는 이야기에서 주인공 되기와 현실에서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과 극복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타낸다. 더불어 이 '회귀'는 모든 '떠남'이 성공/주인공을 만드는 수단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무를 심는 사람-도토리 100개를 매일 심는 마음(204)]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꾸준한 성실함으로 이야기와 삶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도 있다.
또한 '회귀'는 도시와 전원 둘 중 어느 한 곳에서의 삶이 절대적으로 더 낫지 않음을 보여준다. 가져보지 못한 장점이 있는 새로운 환경보다 안정과 만족을 주는 것은 익숙함이 큰 것일까. 정서와 성향과 같은 내면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특히 어린시절 겪어왔던 환경과 체험이 그 사람의 토대가 되어 이를 변화시키려면 큰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 우리가 독서를 하는 이유 중 하나도 적은 품을 들여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떠남'의 한 갈래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재밌게 살펴 본 정원 중 하나는 [캔디 캔디-스위트 캔디, 근대의 향기(112)]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하는 만화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저자에게 큰 감탄을 했는데 그저 북실한 머리를 한 소녀가 괴롭힘 당하면서 울다가 안운다고 노래하는 인상만 남아있었던 '캔디 캔디'의 전반부 복잡다단한 줄거리를 아주 짧고 간결하게 설명해놓은 덕분이다. 덕분에 이 만화의 배경과 내용을 새로 알게 되었다. '울지 않는' 새로운 여성상의 제시라는 의미와 함께 끝부분에 살짝 언급되는 또다른 강한 여성상 오스칼 덕분에 뒤에 나오는 [베르사유 정원을 보여주는 법-왕의 산책을 따라가기(170)]도 관심있게 읽었다.
아쉽게도 [베르사유의 장미]와 오스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는 않지만 이 안내서가 저자가 아는 한에서는 "조원가나 정원을 방문한 이의 기록이 아니라 정원의 주인인 왕이 작성한 정원 안내서로는 유일무이하다(173)"는 점이 흥미로웠다. 다만 왕의 흥미로 만들어진 안내서란 특수성은 있어도, 보편성과 활용성의 측면에서는 그리 세심한 배려심이 없이 제작되었기 때문에 유용하지 않다는 점도 재밌다.
앞선 두 작품은 익숙함을 바탕으로 관심이 갔다면, [레겐트루데-일어나세요, 비 공주님(211)]은 낯선 내용이어서 궁금했다. 나름 이런저런 책들을 많이 접해보았던 것 같은데 '비 공주'라는 동화는 처음 보았다. 종종 절판 도서를 구하거나 헌책방을 다녀와 어린시절 보았던 책들에 대한 향수가 어린 글들을 만난 적 있는데, '비 공주'의 이야기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책이 넘치게 쌓인 오래된 헌책방을 지나게 되면 한번씩 둘러보게 될 것 같다.
책에서 "정원은 자아의 확장이요, 내면의 반영(42)"이라는 말을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식물과 관련된 책들을 반기며 살펴보고 있지만 사실 내 집에는 살아있는 식물이 하나도 없다. 식물을 돌보는데에 전혀 재주가 없어 아까운 생명을 없애느니 아예 들이지 않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가지지 못한 탓에 더욱 식물과 관련된 책들을 반기게 된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스스로의 정원을 돌보기 포기한 사람의 자아와 내면은 게으르고 메마른 것 이상의 황폐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만든 문장이었다. 하지만 정말 더는 살아있는 식물을 죽이고 싶지는 않아 이렇게 식물을 담은 책을 하나씩 책장에 올려두고 나만의 정원으로 삼는다.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정원을, 정원을 가꾸는 사람에게는 책을 꿈꾸게 만드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