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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아무것도
최제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평점 :
더위를 피해 카페로 책을 가져가 읽는 동안 카페 어디선가에선 알람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렸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공간 음향, 요란하게 돌아가며 원두를 갈고, 프라푸치노를 말아대는 소음들 사이로 알람 소리만 유난히도 신경이 쓰였다. 열대야에 뒤척였던 지난 밤 모자랐던 잠이 카페의 시원한 실내 온도 덕분에 그제서야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때마침 그 알람 소리가 나와 같은 핸드폰 기종의 공통 알람 소리여서 아침마다 듣던 그 지긋지긋한 소리이기도 해서였다. 짧게 쓰여지긴 했지만 소설 두 편 정도는 충분히 다 읽을 시간 동안 소음들 사이에서 은은히 울려퍼진 알람 소리는 대체 누구의 것이었을까. 환청처럼 이어지는 소리에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진 핸드폰에 몇번이고 귀를 붙여보기도 했다. 설마 이 빌런이 나는 아니겠지.
'아뇨, 아무것도' 안에 있는 단편들은 바로 이런 느낌이었다. 다른 소음들 사이에서 충분히 묻혀 지나갈수도 있을만한 어떤 특정한 소리가 계속해서 신경을 거스르는 느낌, 살짝 어긋난 타일이나 삐져나온 선, 혼자만 엇박으로 들어가는 동작 같이 눈길에 튀는 것들. 어떨 땐 무심히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치지만 한번 눈에 들어오면 자꾸 마음에 걸리고 가끔은 그 모남이 웃음을 주기도 하는 소설들이다. 어떤 결말은 이게 뭐야, 싶기도 하고 어떤 결말은 이래서 그랬구만. 고개를 끄덕이게도 만든다. 그리고 종종 이런 웃음 코드에 웃고마는 내가 싫어지게 웃기기도 하다. 가게의 '게' 자만 나와도 성호를 긋는다(108)는 말에 낄낄 거리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누구겠는가.) 110"
[날지 않는 새들의 모임]은 읽고 난 뒤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이다. 어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 '날지 않는/못하는 새'들이 등장해서 심각하게 토론을 한다. 펭귄이니 칠면조니 하는 새들이 나오자 새삼 이 책이 이런 소설집이었어? 싶어졌다. 새들은 심각한데 보는 나는 귀엽게 느껴졌다. 닭이 이 모임에 들어와도 되는가 아닌가를 주제로 토론이 치열해질수록, 날기는 커녕 요즘은 걷기도 힘든 인간도 덩달아 심각하게 읽다가 결국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웃긴다. 사실 이런 내용과 개그가 취향이기도 하다. 표지나 제목만 보고 뭔가 더 심각한 내용이 주를 이루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덕분에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빠졌다. 그 다음을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읽어나갈 수 있었다.
묘하거나 오싹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 단편들도 마치 책에서 언급된 '전설의 고향'이나 '토요미스테리'를 보는 것 같기도 했는데 전체적으로는 '이야기속으로'나 '테마게임', '드라마 스페셜'같은 짧은 단막극들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 나열된 프로그램들 다 아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때의 감성이 되살아나는 기분도 들테니 '아뇨, 아무것도'도 만나보시라.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단편이 [하이델베르크의 동물원]인데, '젊은 사람들은 서로의 시간을 서로 좀 뺏고 뺏겨도 된다(185)'는 말도 인상적이고 은근히 몽글몽글한 결말이 재밌었다. 등을 밀어주는 어느 한 순간, 작은 계기 없이는 달라지기 어려운 굳어진 관계가 점차 풀려나가는 변화를 지켜보는 게 좋았다. 다양한 글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여러맛을 맛보듯 글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무심하고 적당한 완급 조절이 참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제목과 표지가 진입 장벽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그냥 겉만 봤을 때는 사회문제를 다룬 책인줄 알았다. 노동자나 난민, 그도 아니면 청소년과 관련된 내용이 있을 것만 같았다. 표지에 그려진 인물은 울거나 땀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고, 띠지에 있는 문구도 오해를 부추긴다.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숨을 안 쉬고 있는 거지?" 세상사에 쪼이고 쪼여서 숨 막힌단 표현 같았다. 나만 이런 오해를 하는걸까. 막상 읽어보면 제목도, 띠지의 문구도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닌데 이게 이렇게 모여서 이런 오해가 생기니 아쉽다 싶었다. 가끔 요즘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읽을만한 책을 추천해달라는 사람이 있는데 소설이란 단어에 알러지가 있지만 않다면, 2025 하반기 동안은 추천 목록에 꼭 '아뇨, 아무것도'를 넣을 것이다. 읽어보세요.
감상을 쓰면서 '어긋남'이란 표현을 썼는데 책 뒷편에 바로 그 키워드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웠다. 책 한복판에 가나다 순서대로 후기나 다름없는 '작가의 말'을 또다른 단편들 중 하나처럼 넣어둔 작가가 어이없는데도 그러려니 하게 된다. 어긋남을 그대로 보여준 것 같아서. 1이라고 입력해서 1이 출력되었구나. 재밌게, 읽는다는 부담은 전혀 없이, 신선하게 읽었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주지 않을까봐 안타까워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유하고 싶어졌다. 특히 여름볕이 지나치게 쨍하고 밤마저 무더워서 어디 가기도 싫어지고 시원한 실내에서 심심함을 달래고 싶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책을 안 읽어서 갑자기 길고 깊은 책들은 집중도 안되고 부담스러울 것 같아 망설이는 사람에게, 가벼운 웃음코드나 어이없는 말장난에 여지없이 웃음을 터뜨리고는 자괴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묘하고 낯선 느낌을 주는 가벼운 미스터리물을 은근히 선호하던 사람에게 좋은 시간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