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야나 렌조바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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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에서 신체 부상은 고통스럽다고 지각된다. 어떤 행동에 고통이 뒤따르면, 그 행동을 되풀이할 확률은 줄어든다. 그것은 우리가 처벌을 정의하는 방식일 뿐 아니라, 다윈주의적 의미에서 고통이 무엇을 위해 있는지도 설명한다. 부상은 종종 죽음, 따라서 번식 실패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신경계는 신체 부상을 고통스럽다고 정의한다. 207"

 해가 높이 떠올랐다. 그림자마저 짧아진 길에 서서 들어갈 곳을 찾는다. 어제 날이 흐려서였을까 좁은 화단과 붙은 도보 위로 말라버린 작은 지렁이들이 보인다. 어떤 것들은 언뜻 나뭇가지처럼 보인다. 횡단보도를 앞둔 삼거리 코너에서 아직은 죽지 않은, 그러나 고통스럽게 햇볕 아래에 꿈틀거리고 있는 지렁이를 발견한다. 15센치는 되어보인다. 근처에 떨어진 진짜 나뭇가지를 하나 찾는다.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나뭇가지가 닿을때마다 더 몸부림치는 지렁이를 들어올려 화단 풀숲에 던져 옮긴다. 지렁이와 나 사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은 알지 못한다. 저 지렁이는 살 수 있을까. 

 뜨겁게 달궈지고 있는 길 위에 느닷없이 놓여진 지렁이를 발견하고 문득 읽고 있던 '불멸의 유전자'를 떠올렸다. 지렁이에게 새겨진 "유전적 예측*"에 분명 햇빛은 피하고 습기와 양질의 토양을 좇으라는 본능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어떤 변수가 생겼던 것이기에 수많은 지렁이들이 본능에 반한 움직임을 보였을까. 길 위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이 환형동물의 오늘, 펠림프세스트+에 죽음 직전 다가온 나뭇가지와 초고속 이동에 대해서도 기록될 것인가.

 '불멸의 유전자'는 흥미롭지만 정말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책의 두께만큼이나 많은 분량도 분량이지만, 정보들을 읽어내는 일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생물에게서 발견되는 연결이 그 모든 인과가 진심으로 즐겁고 흥미로운 사람이 펴낸 책은 일반인에게 비슷한 흥미와 약간의 당황스러움도 전달한다. 고슴도치, 참돌고래, 가비알, 익티오사우루스, 작은개미핥기, 큰개미핥기, 천산갑, 아르마딜로, 가시두더지(106-110)에 이르기까지 머리뼈골격을 비교해보게 되리라 예상치 못했다. 물론 날다람쥐 친구들은(137) 귀여웠다. 

 읽는동안 사람에게서는 어떤 진화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혁신**'이 각기 다른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나타났듯이(125) 근래 각기 다른 나라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반목의 세계정세가 인류의 유전자에 새겨진 또다른 반복의 흔적이 아닐까. 비록 우리가 지난 두번의 세계적인 전쟁 이후 얻어진 교훈과 그 사이 더 발전했다고 믿은 문명과 교양에도 불구하고 세번째 세계적인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예상치 못했더라도 말이다.  

 또 하나는 하렘을 가지고 있는 일부 동물들의 비대칭(329)을 살펴보면서 시작되었다. 많은 수의 수컷들이 짝을 이루지 못하고 일부 선택된 수컷만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수 있다는 내용에서 현대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음을 떠올렸다. 심지어 이 현상의 바탕은 앞에서 언급한 갈등 양상과 '계획 경제 유전***'의 일부 선택 방식을 여성에게 적용하는 것에서 그 영향을 미쳤다. 이 은밀한 반복이 어쩌면 재생산의 단절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미래와 인류에 대해 생각하면 회의적이지만, '불멸의 유전자'를 읽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우리의 유전자들은 다음 세대에 무엇을 남기기 위한 선택을 하고 있을까,였다. 어쩌면 생존과 유전자의 전달에는 인간이 지닌 인지 관점에서의 납득 여부보다 뻐꾸기(317-325) 새끼의 벌어진 입에도 먹이를 떨구도록 프로그래밍 된 새의 경우가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저자에게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면 오늘날 이 '불멸성'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시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흥미로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충실한 시간이었다. 

 *"알에서 깨어날 때 이 도마뱀은 태양에 바짝 달궈진 모래와 돌의 세계에 있을 것이라는 유전적 예측을 하고 있었다. 그 유전적 예측에 어긋난다면 예를 들어 길을 잃어서 사막에서 골프장으로 들어간다면 지나가던 맹금류가 곧바로 낚아챌 것이다. 또는 세계 자체가 바뀌어서 그 유전적 예측이 틀렸음이 드러날 때에도 같은 운명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다. 모든 유용한 예측은 적어도 통계적인 의미에서 미래가 과거와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18"

**마찬가지로 인상적인 점은 한 동물이 유연관계가 없는 다른 동물을 세세한 부분까지 닮는다는 것이다. 양쪽이 같은 생활 방식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이다. 매트 리들리는 [혁신에 대한 모든 것]에서 인류의 가장 위대한 혁신 중에는 각기 다른 나라의 창안자들이 서로가 한 일을 모른 채 독자적으로 중복해서 해낸 사례가 많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도 마찬가지다. 125 

***사려 깊은 계획 경제가 다윈주의적 수단을 통해서 출현하려면, 성비를 제어하는 유전자들의 자연 선택을 거쳐야 할 것이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어떤 유전자가 수컷이 생산하는 X 정자 대 Y 정자의 수를 편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어떤 수컷 태아를 선택적으로 유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갓 태어난 수컷 새끼들을 굶겨 죽이고 선호하는 소수만을 키우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개의치 말자. 그냥 이 가상의 유전자를 계획 경제 유전자라고 하자. 흔히 생각하는 하향식 체계다. 332

+펠림프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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