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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평점 :
" 다시 마리의 시선이 유진의 얼굴을 향했다. 유진은 긴 이야기를 하는 편이 아니었다. 지금의 유진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마리는 알 수 있었다. 항상 유진이 먼저 다가오기를, 원해서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마리는 기대와 함께 긴장과 두려움도 느꼈다. 무언가가 달랐다. 일상 속에서 많은 말을 주고받는 것과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많은 말을 주고받는 건 분명 다르니까. 그래도 마리는 좋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변화하면서 깊어진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경험 속에서 배운 것이었다. 158"
간만에 읽어보는 소설집이라 부담없이 손에 들었다가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정신을 잃었던 것은 라미(검은 절벽)였지만 우주 공간과 행성 왕복선, 다이버전스, '1G로 가속을 하는 상황에선 중력과 관성이 정확히 같은 역할을 하니까(26)' 같은 말들 속에서 기억이 끊긴 라미보다 더 상황 파악이 안되는 것은 나였다. 갑자기 책을 놔두고 영화 그래비티(2013)라도 복습하고 와야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됐다. 계속해서 읽다보니 단어들 사이에서 상황과 관계가 읽히고 그 뒤로는 재미가 느껴졌다. 그래서 감상 정리가 끝나고 나면 그래비티를 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중이다.
'진공 붕괴'가 마음에 든 이유 중 하나는 자연스럽게 만약을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주변 사람들도 지칠만큼 만약을 물어보기 좋아하는 편인데 나에게 새로운 만약을 던져준다. 만약 나라면 티나, 교수, 러브조이, 혜나 중 누구를 믿을까? 만약 나라면 유토피아에 남을 것인가 기생선으로 떠날 것인가? 누군가의 기억을 이식 받은 사람은 기억의 주인과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시간을 되돌린다면 이전의 나와 되돌아간 나는 같은 사람일까? 그 밖에도 읽는 이의 눈에 들어올 수 많은 만약들이 있다. 어떤 만약은 우리의 상상일 뿐일 것 같고 어떤 만약은 꽤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 과학의 틀을 가져왔지만 만약들에는 인간이 있다.
평소 선택하는 주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재밌게 봤던 영화들이 떠올랐다. 콘택트(1997), 컨택트(2017)같은 작품도 좋아했고, 인터스텔라(2014)도 재밌게 봤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7)나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꽤 유명한 어바웃 타임(2013), 최근 개봉한 첫번째 키스(2025), 죽음이 반복된다는 점이 닮은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 책에서도 작품들의 모티브로 나오는 사랑의 블랙홀(1993)도 빼놓을 순 없다. 다 좋아하는 내용들이었다.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이 없겠지만 장르에 낯선 독자라도 저런 영화들을 흥미롭게 봤다면 익숙한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진공 붕괴'를 소개하자니 묘하고 안타깝다. 재밌다. 재미있기는 한데 세세한 설명이 나오는 부분은 흐린 눈을 하고 읽어나가서 어떻게 재밌는지 알려줄 수가 없어서 안타깝다. 실험이나 복잡한 배경지식, 우주를 배경으로 한 장면들을 상상하는데 한계가 있어 넷0릭스에서 기0한 이야기 같은 것처럼 시리즈로 만들어주면 안되나? 읽는 것보다 보는 게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은데,하고 바라게 된다. 실제로 영상화 계약이 진행되었다가 코로나를 지나며 무산된 작품도 있다고 하는데 언젠가 영상물로도 만나게 되면 반가울 것 같다. 나중에 00의 원작소설!로 찾아읽게되기 전에 먼저 읽어두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