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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고전의 숲 - 삶이 풍요로워지는 여덟 번의 동양 고전 수업
강경희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5년 3월
평점 :
요즘 필사를 시작했는데, 정말 이제 막 시작했는데 '어른을 위한 고전의 숲' 출간 소식을 봤을 때 지금 딱 필요했던 책이라 여겨졌다. 아무래도 고전은 필사하기 좋은 문구들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는데 다르긴 했다. 읽다보니 필사하기 좋은 문구들이 지나치게 많았다. 예전에는 뻔한 소리라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을 내용도 이것도 내 마음 같고, 저것도 내 마음 같아졌다. 그동안 나이만 헛먹었나 싶었는데 드디어 어른이 된 것일까 고전이 지루하거나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고 흥미롭고 재미있다니 좋으면서도 어떤지 씁쓸하다. 어쩌면 이 책이 사회초년생, 이제 막 성인이 된 이들에게 더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야 공자님 말씀을 좀 알겠구나 싶은 중년만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연령층에게 공감과 의지가 될만한 내용이 많다. 더불어 저자가 글을 잘 써서 받아들이기 쉬웠던 점도 있다.
티비 프로그램 중에 일반인이 나오는 연애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서 서로의 감정을 주고 받는 프로그램은 매번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놀라움과 재미를 준다. 굉장히 자극적이다. 방송이란 것에 준비되지 않은 일반인 출연자들이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던 말과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고스란히 보여진다는 것은 물론이고, 천천한 흐름에서라면 이해가 될 만한 면도 빠르게 편집되어 오해를 유발한다. 대체 왜 저런 언행을 하는 것일까 상대방을 어리석게 여기는 마음이 들 때면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고서는 판단하면 안된다는 말을 떠올린다. 누군가의 언행을 보고 그를 평가하고 비난하고 싶어질 때 쉽지는 않지만 "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사태의 일부라는 것, 입장이나 관점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다른 면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시비판단이나 독선, 아집 등으로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p120 " 는 내용을 떠올릴 것이다. 어떤 사건들이 시간이 지난 뒤에 다른 국면을 제시하여 놀라움과 반성을 야기하는 것처럼 남보다 자신을 우선하여 되돌아보기를 또다시 다짐한다.
" 동파는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해하거나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므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손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냥 놓아두는 것 이야말로 마음의 짐을 가볍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p114 "
첫 직장을 다닐 적 일이다. 금요일 퇴근 전에 내가 했던 일에 큰 실수가 있었음을 발견했다. 퇴근시간 이후엔 프로그램이 막히기 때문에 일이 어찌되었든 집에는 갔고, 그 주말 내내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어떡하지' 걱정하느라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입맛도 없었다. 월요일이 되면 문제를 발견한 누군가 나를 혼낼 것 같고, 큰일이 난 것만 같고, 어찌됐든 다 망해버린 것만 같았다. 늘 그렇지만 그때는 더욱더 월요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세상이 망해서 출근을 안해도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커다란 불안과 공포를 안고 회사에 갔더니 주말 내내 나를 괴롭혔던 문제는 사실 내 업무 과정에서의 실수가 아니라 회사 시스템 내에서의 오류로 야기된 것이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때 나는 뭔가를 깨달았었다. 내가 그토록 걱정하고 불안해했던 문제들은 생각보다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없었다. 내 인생은 그런 문제 한두가지를 이유로 내가 걱정하는 것만큼 망가지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시간을 낭비하고 괴롭게 만드는 것은 나의 불안이었다. 한때 너무나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 이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지나고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 뒤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278), 실수는 날 어떻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난 실수를 어떻게 할 수 있다, 어쩌라고' 같은 직장인 마음가짐을 얻었다.
그럼에도 " 실패라는 말은 언제나 두렵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는 동안 가능한 한 실패를 경험하지 않기를 바란다. 실패로 인해 겪는 마음의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아프다. 그처럼 자신이 초라하고 쓸모없고 무능해 보이는 때가 없다. 때론 남 탓, 부모 탓, 세상 탓 등 문제를 외부로 돌리기도 하지만, 실패가 가져다주는 쓰라림의 가장 밑바닥에는 결국 자기 자신의 무능함을 마주해야 하는 고통이 똬리를 틀고 있다. 특히 능력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는 그 쓰라림이 더 클 수 밖에 없다. p177 " 과거의 나를 불안에 떨게 했던 것도 실패가 두려웠기 때문 아닐까. 그때의 나는 실패가 부끄러웠다. 아마 요즘의 실패는 그보다 더 할 것이다. 실패 후에 회복이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하기가 어려운 사회에서 실패의 리스크는 치명적이다. 실패하는 것이 스스로의 무능을 드러내는 수치와 고통뿐이라면 차라리 낫다. 지금의 실패는 생존에의 위협에 닿아있다. 실패를 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고? 실패를 하면 길이 막힌다. 요즘 세대는 앞에 놓여진 길이 최대한 막히지 않도록 가장 안전한 길을 찾아 나아갈 수 밖에 없다. 막힌 길 앞에서 뛰어넘을 계단을 만들기도, 뚫을 구멍을 내기도 시간을 너무 많이 소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창한 뜻을 세우기보다 그저 남들만큼만 되고 싶은 세대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노력을 믿으란 말을 할 수 없다. 대신, " 실패의 모든 원인이 자신의 능력하고만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실패를 전적으로 자기 무능의 탓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많은 다른 요인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열어놓는 것이다. p203 " 탓을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실패는 복합적인 요인과 상황의 산물이라는 점을 기억하라고 해두고 싶다.
앞서, 필사를 시작하면서 '어른을 위한 고전의 숲'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말을 했는데 책 안에서도 글로 쓰기에 대한 내용이 나와 반가웠다. " 그런데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바로 글쓰기다. 글로 적는다는 것은 모호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을 종이 위에 문자로 옮기는 행위다. 종이에 적힌 것은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므로 직관적인 관찰 대상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머릿속에서 어지럽고 복잡한 실타래처럼 엉클어진 것을 종이 위에 문자 형태로 고정시켜 놓는 것은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이나 감정을 구체적으로 실체화시키는 일이다. p213 - 그리고 적은 것을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면 현재 자신의 감정이 어떠한지, 사건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어떠한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고통 사이에 틈이 생기면 그 고통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마침내 자신의 삶에 닥친 고통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때 비로소 치유와 성장이 시작된다. p225 " 전자책의 등장으로 종이책의 입지마저 흔들리는 때에 직접 종이 위에 손으로 글을 적는 필사는 또 얼마나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필사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항상성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글로 적는다는 행위 안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내용을 보니 좀 더 의지가 다져졌다.
기대보다 재미있게 읽었고 얻어가는 것이 많았다. 선입견을 버리고 고전에 발을 들여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