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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위태로운 천년의 거인들 - 개발과 손익에 갇힌 아름드리나무 이야기
김양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평점 :
" 어느 나무가 더 좋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그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은 흐린 날, 잎을 모두 떨군 채 염주 같은 콩깍지를 매단 회화나무를 만난다면 울컥하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어쩌면 펑펑 울어버릴지도 모릅니다. p47"
책을 읽기 시작할 때쯤 사는 곳 뒤편으로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공사가 시작됐다. 그동안 흉물이었던 넓은 부지가 정리되어 마침내 아파트와 공공시설에 들어온다고 하니 반가운 소식이었다. 새로 아파트가 들어올 부지 옆으로는 오래된 이차선 도로가 길게 뻗어 있는데, 그 도로 옆에 난 좁은 인도에는 그만큼이나 오래된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가로수로 서 있었다. 공사가 시작되는 건 반가운 소식이었으나 공사가 시작된 것을 체감하게 됐던 것은 바로 그 오래된 가로수들이 어느 날 갑자기 전부 사라져 버린 일 때문이었다. 사라진 수십 그루의 가로수. 가로수라고 하지만 아주 오래 되어 그 아름이 사람 혼자 양팔로 감을 수 없이 크게 잘 자란 나무였다. 가로수들이 있던 자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어설프게 시멘트로 메워져 있었다. 아까운 나무를 어디 옮겨심었길 바라지만 전에 비용 문제로 사람들이 옮겨심기보다 잘라내고 다시 심는 방법을 더 선호한다는 얘길 들었던 터라, 수년간 지나왔던 플라타너스 우거진 불편하고 좁은 길이 사라진 것을 혼자 아쉽게 여겼었다.
" 플라타너스는 매일 이산화탄소 3.6킬로그램을 흡수하고 산소 2.6킬로그램을 방출하는 등 대기 정화 능력이 은행나무의 5.5배, 느티나무의 3.5배에 이른다. 또 활발한 증산작용으로 도심 열섬을 누그러뜨린다. 이런 효용성 때문에 플라타너스는 전 세계 주요 대도시의 숲조성에 널리 쓰이는 나무 중 하나다. 하지만 한국 등 일부 나라에선 자동차 위주의 도시계획으로 인해 플라타너스가 가로수로 오래 살지 못하고 사라졌다. 찻길을 넓히려면 큰 나무는 방해만 된다. p79 "
책에서도 길을 넓히기 위해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사라져가는 플라타너스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깊이 공감됐다. 수미터는 됨직히 크고, 잎마저 넓직해 여름이면 우산없이도 비를 피해 걸을 수 있고, 가을에는 떨어져 내리는 큰 잎에 머리며 어깨를 맞기도 했는데 이제는 다시 걸을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전에 반겼던 뒷편의 공사도 함께 들어올 새로운 편의시설도 처음처럼 기껍지 않아졌다.
사지가 절단된 채 쫓겨난 500살 나무 부산 회화나무(P37)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일명 가로수 독살사건이라 불리는 기가 막힌 일이 떠올랐다. 서울 서대문에 있는 한 커피 체인과 관련된 이야기다. 이 커피 체인 가게 앞에는 죽어서 썩어가는 가로수가 제거되거나 새로 교체되지 않고 그대로 서 있는데, 그 이유가 참 어이없다. 커피가게가 들어오면서 건물 앞에 있던 가로수를 없애고 싶었으나 가로수 다섯 그루 중 두 그루만 제거 허가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허가가 떨어진 두 그루 뿐만 아니라 나머지 나무들도 연이어 죽어버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구청에서 경찰에 수사를 맡기니, 건물주가 나머지 나무도 없애고 싶어 몰래 제초제를 뿌려 죽였음이 드러났다. 범인도 자수를 한 이 사건을 검찰-또!...-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서대문구에서는 개인이 사욕을 위해 가로수에 해를 입힌 "이 안타까운 사실을 기억하고 사회적 교훈으로 남기기 위해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단다. 그대로 두었다면 커피 가게 2층 창밖으로 나무가 우거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을, 얕은 생각과 부끄러운 이기심만 그대로 드러낸 표지판이 세워진 죽은 나무만 남아있게 된 것이다. 우습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이다.
"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릅니다. 10여 년 전부터 천연기념물에 대한 '외과수술'은 더 이상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가로수나 공원 나무, 보호수 등에 대해선 여전히 '외과수술'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가까운 이웃 생명체인 나무의 생리에 대해 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무를 사람인 양 '속을 채웠으면...'하고 어긋난 관심을 투영합니다. 참고로 '외과수술'은 조경업체가 하는 일 중에서 이익이 많이 남는 일 중 하나라고 합니다. 건강한 나무를 오래 지키고 싶다면, 차라리 건드리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p72 "
나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훼손되는데, 주로 개발의 이유로 잘리거나 옮겨가게 되기도 하지만 종종 볼 수 있는 나무 안에 속을 채운 '외과수술'들도 보호가 아닌 훼손에 해당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은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외에도 드러난 뿌리 부분에 흙을 덮는 복토(P63)도 나무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니 몰랐다. 특히 오래된 나무들, 보호수들이 사람들의 시선으로 주는 어긋난 관심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도 안타깝다. 그동안 '몰랐다'는 이유로 파괴인줄 인식 못했던 것이 또 있는데 제주 비자림 숲길이다. 몇 번 다녀온 적도 있는데 그 사이를 난 도로를 통해 다녀왔으면서도 그 아름다웠던 길 자체가 숲에는 문제가 되었단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p115) 더불어 제주의 환경을 파괴하는 요인으로 수많은 골프장 문제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서울과 가까운 고양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p203 고양 산황산 : 산 깎고 골프장 지어 자연을 살리겠다는 모순) 골프라는 운동을 긍정할 수 없는 개인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영화 같은 것을 보다보면 잔인한 장면을 거리낌없이 잘 보는데 책을 읽다 마주친 잘라진 나무 사진이 그보다 더 잔인하게 여겨져 눈살이 찌푸려졌다. p144에는 잘라져 밑동만 남은 전주의 버드나무들 사진이 실려 있는데 멀리 다리가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안에서도 참혹함을 느낀다. " 전주시는 무슨 명분으로 이 버드나무들을 벌목했을까. 전주시 하천관리과 담당자는 최근 치수 패러다임이 '환경(보호)보다는 인명,재산이 더 중요하다'로 바뀌었다며, 나무는 비가 오면 쓰러질 수 있어 제방 등 하천 시설을 손상할 수 있기에 벌목이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p146 " 나무가 훼손되는 대부분의 상황에는 늘 이렇게 사람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여가활동인 등산도 숲을 망치는 주범 중 하나였는데, 답압(*사람들이 밟아 땅이 단단해지면서 황폐해지는 현상 p224)이란 말과 문제점을 배우게 되었다. 건강을 위한 좋은 취미 쯤으로 생각했던 등산이 자연의 건강은 오히려 위협하는 문제였다. 생각해보니 제주도에 갔을 때 일부 오름들은 쉬는 기간을 갖고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 일정 기간동안은 자연이 회복할 시간을 주기 위해 방문을 금하는 것이다. 또 한라산은 등반을 위한 예약을 한다. 그마저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굳이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사람 길(P213)'이 더 줄어야겠지만, 다른 산들도 입장객 수 제한과 안식년을 두고 회복 기간을 가진다면 장기적으로 더 좋은 보호 효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산을 타고 있고, 그만큼 '이용압력'은 커지고, 생물다양성은 위협받는다. 특히 오랫동안 인간의 교란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높은 산의 생물들은 위협의 수위가 절멸 수준으로 치솟는다. p225"
등산 뿐 아니라 이용 목적에 따라 심어졌다가 잘리고, 그나마 운이 좋아 뿌리와 가지가 이리저리 잘린 채로 옮겨지고 다시 심기는 등 수백년을 사는 나무들은 백년도 채 살지 못하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시달린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란 책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면서 이런 인간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정말 책을 읽다보면 '아낌없이 빼앗기는 나무'가 더 맞지 않나 싶어진다. 언제 나무가 주고 싶다고 했나? 주겠다고 한 적이 없는 나무에게서 우리가 얻어낸 것들은 받아온 것이 아니라 빼앗아 온 것이나 다름없다. " 나무는 이용할 대상이고, 그것이 나무의 존재 이유라는 생각이지요. 정말 나무는 인간에게 이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걸까요? p99" 서울 봉산의 편백 인공림에 대한 부분에서는 깨어진 생태계 균형에 대한 주먹구구식 행정처리 문제와 함께 최근 공공의 적으로 떠오른 러브버그 이야기가 등장한다. 너무 많은 개체수의 벌레가 갑자기 온갖 곳에 나타나기 시작해 심지어 사람에게도 붙어서 나도 참 끔찍하게 생각했는데 " 사실 러브버그도 1~2주면 사라진다. 하지만 사람은 기다리지 않는다. p194 "의 문장을 읽으며 내가 그랬구나 깨달았다. 편의를 우선으로 하고 잠시의 불편이나 지체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던 태도를 돌아보았다. 이제 곧 날이 풀리고 한동안 러브버그가 나타나 괴롭겠지만 해충도 아니라던 그 벌레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안의 불편을 이제는 좀 여유롭게 지나보내게 되겠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나무의 모양을 세세히 보여주는 사진이나 그림이 적어서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 자세한 모양은 저와 여러분의 숙제로 남겨두겠습니다. 뒷산에 올라 식물도감을 펴놓고 잎 모양을 비교해보고, 털이 있는지 없는지 만져보고, 수피가 갈라진 걸 느껴보면 어떨까요. 봄에는 고양이 꼬리처럼 폭신한 연노랑 수꽃도 관찰해보고요. 참, 신갈나무는 잎자루 아래쪽에 사람 귀처럼 생긴 작은 잎이 돋아있습니다. 꼭 확인해보세요. 가을에 도토리를 주워다가 키를 재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요. 우리는 참나무의 나라에 살고 있잖아요. P257 " 뒷부분에서 이런 아쉬움을 꼬집은 내용을 만났다. 몇 해 전부터 길을 다닐때 보이는 식물들과 새에 관심이 가서 가능한 사진도 찍고 검색도 해서 이름을 찾아보곤 했는데 아무래도 잘 외워지진 않았다. 특히 보기에 낯설거나 예쁜 것은 여러번 찾아보곤 했는데 익숙하게 보이는 나무의 이름은 알아볼 생각을 못했다.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나무가 참나무 종이라는데 어떻게 생겼는지 도통 머리속으로 그려지지 않아 민망했다.
이제 와 덧붙이건데, 나의 말 못 할 비밀 중 하나는 내가 은행나무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별히 다른 나무들보다 더 아끼는 것도 아닌데 어느새부터 은행나무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은, 특히 가을에는 더더욱 꺼내기도 힘든 말이 되었다. 가을이면 길 여기저기 떨어져 밟히고 냄새를 풍기는 은행 열매가 공공의 적이 된 뒤로 사람들은 은행나무를 싫어한다, 냄새난다, 다 베어버려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 무시무시한 말을 공감하는 척 듣다가 슬쩍 근데 난 은행나무 괜찮던데 하고 두둔한다. 병충해에 강하고 계절마다 예쁘고 달리 가꾸지 않아도 잘자라고 열매도 맛있다고 주절거릴 때면 분위기가 떨떠름 해진다.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 좋아하는 편에 가까운데 별다른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고 예전에 어느 홍보문에서 은행나무의 장점을 알리는 글을 보고 그렇구나, 하고 납득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바닥에 떨어져 으깨진 은행냄새도 그리 싫지 않아졌다. 나같은 무비판수용러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나처럼 또 그렇구나, 하고 이해해서 나무와 자연에 대해 더 가깝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