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삼킨 소년
트렌트 돌턴 지음, 이영아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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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림 할아버지는 내가 아이의 몸에 어른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겨우 열두 살이지만, 할아버지는 내가 어려운 이야기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14) "


 처음 엘리의 이야기를 받아들었을때 익히 잘 알고 있는 어린아이 제제를 떠올렸다. 어쩔 수 없었다. 책을 둘러싼 띠지에 담긴 소개글에 제제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사롭지 않은 성숙함을 가진 이 열두 살 소년에게서는 과연 모든이의 애틋함을 한몸에 받았던 제제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주변 환경과 소년에게 의지가 되는 친구인 슬림 할아버지의 존재, 그리고 빨긴 전화기의 목소리 같은 미묘한 환상들이 엘리가 과연 제제 이상의 감명을 줄 수 있을지 가늠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겹쳐보이던 엘리와 제제는 서서히 분리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엘리의 이야기에 몰입한다. 유별난 소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애정으로 엄마를 찾아 교도소에 숨어들어가려 할 때, 엄마를 위해 동거남이자 배신자인 테드에게 달려들 때, 범죄부 기자가 되기 위해 편집장 브라이언과 협상하려 할 때 엘리만의 빛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엘리 안에 빛나는 독특함들은 과연 소년 안의 빛나는 우주를 엿보게 해준다.


 " "내 이름은 캐럴라인 브레넌이야." 그녀가 말한다. "그리고 넌 용감한 엘리겠구나. 특별한 손가락을 잃어버린 소년." "그 손가락이 특별한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야 오른손 검지는 원래 특별하니까. 별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손가락이잖아. 학급 사진에서 네가 몰래 짝사랑하는 여자아이를 가리킬 때, 좋아하는 책에서 정말 긴 단어를 읽을 때, 코를 후비고 엉덩이를 긁을 때 사용하는 손가락이지. 안 그래?"(227) "


 거의 700쪽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엘리가 성장해가는 이 처절하지만 희망적인 이야기는 전혀 지루함이 없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엘리의 거친 입담과 별난 사고, 그리고 매번 등장하는 새로운 문제거리들이 이 소년이 무사히 살아남아 '좋은 사람'(223)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집중하게 만든다. 제발 그럴 일 없기를 바라지만 결국에는 잘려나가 버린 채 '남성, 13, 우검지(625)'의 라벨이 붙어버린 소년의 특별한 손가락처럼, 소년이 버텨내야 하는 환경은 그악하다. 위기의 순간마다 이 위태로운 소년이 어떻게 될 것인가 염려하고 응원하게 한다.


 " 나는 계속 천장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의문이 하나 생긴다.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에요?" 슬림 할아버지는 얼떨떨한 표정이다. "그건 왜 물어?" 내 눈에 눈물이 차올라 관자놀이로 흘러내린다.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 나는 할아버지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할아버지는 병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푸른 하늘과 구름. "난 좋은 사람이야." 슬림 할아버지가 말한다. "하지만 나쁜 사람이기도 하지. 누구나 다 그래, 꼬마야. 우리 안에는 좋은 면도 나쁜 면도 다 조금씩 있거든. 항상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어려워.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안 그렇지."(223) "


 지나치게 성숙해보였던 엘리가, 그래서 어떤 말도 가감없이 들을 자격이 있던 소년(14)이 제 나이로 보이던 장면이었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좋은 사람이 맞는지 질문이라도 해서 확인을 받고 싶은 절박함과 외로움이 느껴졌다. 엘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엘리를 포함해서 여러 면을 가지고 있다. 똑똑하지만 마약에 중독되어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한 채 남자들에 휘둘리는 엄마, 알콜 중독에 공황장애이지만 지독한 독서가인 아빠, 엄마와 엘리, 오거스트를 책임졌지만 마약거래로 끌어들인 라일 아저씨, 살인자였던 베이비시터 슬림 할아버지, 지역 사회 원로 유공자이자 마약상 타이터스. 그리고 그 모든 개인들의 본질에 대한 답을 슬림 할아버지의 입을 통해 전한다.


 " "그날 병원에서 네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에 대해 물었지, 엘리. 나도 그 생각을 해봤다. 아주 많이. 그저 선택의 문제라고, 그때 말해줬어야 하는데. 네 과거도, 엄마도, 아빠도, 네 출신도 상관없어. 그저 선택일 뿐이야.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되는 건 말이다. 그게 다야."(351) "  


 곧 다가올 설 연휴 동안 거리두기를 하면서 이 매력적인 소년의 이야기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지난 1월 1일에 세웠던 독서라는 새해 목표가 잠시 흐려졌다면 넉넉한 분량과 높은 몰입도로 21년을 새롭게 열어줄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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