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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로봇 - 우리가 지금껏 상상하지 못한 신화 이야기
에이드리엔 메이어 지음, 안인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한눈에 어려울 것이 분명한 '신과 로봇'을 읽고 싶었던 것은 얼마전 '바그다드 배터리'라 불리는 가설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내부를 장식한 그림과 조각들이 어떻게 제작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이 가설은 꽤 흥미로웠다. 피라미드 자체도 신비스러운 건축물이지만, 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 내부에서 불을 사용하여 안을 밝힌 흔적들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거울을 통한 빛 반사를 이용해서 내부를 밝혔을 것이라는 가설도 있지만, 고대인들이 어쩌면 전기를 이용한 조명을 사용했던 것은 아닐까 의심되는 그림과 비슷한 시기의 다른 지역에서도 전력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출토물이 발견되어 과거의 기술력이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발달해 있었음을 예상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신과 로봇'을 읽어보고 싶도록 만든 이 가설에 대한 내용은 책에도 나온다(317). 책 안에는 이처럼 신화 속의 사건들을 소재로 그린 그림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출토물들을 통해 흥미로운 내용들을 소개한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각 장이 물 흐르듯 연결되어 있어 재밌게 읽힌다. 특히 역사와 과학이 신화를 만나 조화를 이루는 독특한 시선을 통해 21세기와 과거의 묘한 일치감을 느끼게 만드는 점이 매력적이다. 신화라하면 신들이 하프 연주를 즐기며 사랑 싸움을 하는 내용이라 치부했는데(...), 현대 과학기술 아래에서 스케치되고 있는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모든 요소들(노화, 생명의 연장, 오토마타, 로봇, 안드로이드, 사이보그, 불쾌한 골짜기와 복제 생명체)이 신화 안에 다양한 모습으로 담겨있음을 알게 되었다.
요즘 새로 생겼다는 '현대식 나이계산법'이란 걸 들어본 적 있는지 모르겠다. 120살까지 산다는 전제하에, 전에 비해 노화가 천천히 진행되는 요즘 세태를 반영하여 나온 계산법인데, 자신의 나이에 0.8을 곱해 나온 숫자가 현대식 나이라는 것이다. 계산해보고 나면 마음이 흡족하고 절로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이십대가 지나고 나니 120도 아니고 현실적으로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때에 그 절반도 안되는 약 30년 정도의 시간만 젊음을 유지하고 그 뒤부터는 오로지 노화만이 남은 인간의 삶이 참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더 오래산들 노년의 시간만이 길어질 뿐 아닌가. 때문에 '신과 로봇'에서도 수명의 연장과 유한한 젊음에 대해 다룬 내용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특히 늙어가는 육체를 가지고 영원한 삶을 살아야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 에오스와 티토노스(98)에 대한 내용이 그랬다.
의술의 발전으로 인해, 또 앞으로 발전한 기술에 기대어 더 늘어나게 될 인간의 수명과 대조되는 신체의 유한함이 우리의 티토노스 적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들었던 얘기 중 가장 마음이 안 좋았던 것이 지인이 일하는 회사에서 퇴사를 하게 된 삼십대초반의 직원 이야기였다. 글이 제대로 읽히지 않고 자꾸 업무를 깜박해서 성과가 떨어지는 걸 고민하던 그가 병원에서 청천병력같은 말을 듣게됐다.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것이다. 그 직원은 병이 진행되면 더 이상 근무하는 것이 어려워지니 치료 겸 휴식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에 더이상의 활동이 어려워질만한 무거운 병을 얻게 된 사람의 소식을 전해들으니 영화에서나 보았던 얘기가 단순 '소재거리'가 아닌 현실임을 새삼 무겁게 느꼈다.
'너무 오랜 삶'과 '폐기 가능한' 소모품인 육체의 부조화를 극복하는 날이 올까.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인공장기와 로봇신체를 떠올리게 된다. 사람을 규정짓는 조건은 어디까지일까. 사람의 팔을 기계로 대신하면 그는 사람인가 로봇인가. 그의 심장이 인공장기로 대체되어 있다면? 일부만 대체되었다면 사람으로 인정해야 할까? 전부 대체되었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있다면 사람으로 인정해도 될까? 혹은 노인의 뇌를 뇌사 판정을 받은 젊은 사람의 몸에 성공적으로 이식하였다면, 새롭게 눈을 뜬 젊은 사람은 몸의 주인 그 자신일까 혹은 노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노인으로 인정해야 할까. 이 질문은 '고대부터 보철물을 이용해 인간의 신체 능력을 확대하거나 강화하는 행위(123)'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많은 신화와 전설들이 영생불사를 구하는 일의 어리석음(107)'을 말하지만 우리 유한한 삶과 젊음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오랜 꿈과 목표는 항상 변함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과거에는 불노불사의 존재인 신을 이야기했고, 그들에게서 불과 암브로시아를 훔쳐내기를 소망하고, 기계장치와 판도라를 만들어 낸다. 이는 유전자와 세포 연구, 인공장기와 로봇 기술로 이어진다. 간혹 SF에서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등장하며 그들의 실험을 신의 권능에 도전하는 행위로 묘사하는데, 이는 더이상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앞에 다가온 현실이 아닌가. "과거 신화에 등장하는 몇몇 기적적인 인공 생명들이 발명가들에게 도전의식과 영감을 주었던 것처럼, 현대의 SF 작품들이 미래의 과학적 발견을 예견하고 때로는 기술 혁신에 영감을 주었다(354)" 는 내용에 공감했다.
알파고의 등장은 확실히 우리를 놀라게 만들고 좌절시켰다. 인공지능이 얻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직관과 창의성은 그 능력 앞에서 무력했다. 영화 '터미네이터'가 각인시킨 인공지능과 로봇의 공포를 아주 정적인 바둑 대회에서 실감한 것이다. 이 공공연한 충격도 우리에게 깊은 각인을 남겼지만, 밖으로 알려지지 않은 비공식 기술들이 음지에서 실험되고 있을 것임을 추측하는 것은 그리 음모론적인 상상만이 아니다. 이미 중국에서 유전자 변형 인간 배아 세포 실험을 하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지 오래다. 신의 영역까지 뻗어나간 과학을 제어할 방법을 찾지 못한 현 상황에서 신화가 들려주는 결말은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듯하다. 서로 접접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역사, 과학, 신화' 키워드를 인상적으로 조합한 책이었다. 이들의 조합이 시너지를 일으켜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재미있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