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해주려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올까 - 남의 불행에 느끼는 은밀한 기쁨 샤덴프로이데
티파니 와트 스미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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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동안 큰 인기를 끌었던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막을 내렸다. 수십년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던 프로그램들이 더이상 안 먹히게 된 이유가 뭘까. 공중파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개그 형식에 점차 한계가 생겼다는 점이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때리거나, 외모를 비하하며 웃음을 유도하거나, 인종과 국가적 갈등을 초래할 수 있는 요소, 성별 차이를 담은 내용들을 담은 '개그'를 더이상 웃음거리로 삼아선 안된다. 위험천만한 사고 영상들에 방청객의 웃음소리를 덧입힌 '아메리카 퍼니스트 홈 비디오(41)'식의 영상을 보며 웃던 시대, 사람이 다쳤거나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그걸 보고 웃느냐는 지적이 나오는 시대를 모두 겪고 있다. '샤덴프로이데'에 대해 읽으면서 사라진 코미디 프로그램들을 떠올렸다. 과거 우리가 웃었던 상황과 대사들을, 그리고 이제 더이상 웃을 수 없는 현시대를. 우리의 샤덴 프로이데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정말 '남의 불행에 느끼는 은밀한 기쁨'은 정상일까?

 

 책에는 다양한 갈래의 샤덴프로이데 경험이 등장한다. 외국인이 쓴 책이기 때문에 몇몇 예시들은 좀 낯설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도 한번쯤은 다 느껴봤을만한 사례들이다. 이를테면 길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넘어진 사람 때문에 슬며시 나온 웃음, 개인 SNS 비공개계정에 올릴 글을 공개된 계정에 잘못 올려 검색어 1위를 차지한 연예인의 실수, 끔찍한 사건 사고의 현장 사진을 기사에 실은 기레기를 욕하면서도 클릭하게 되는 일, 열심히 노력한 친구가 성적이 낮게 나와 속상해하고 있을때 잘나온 내 성적표를 떠올리는 것. 부정하려 해봐도 샤덴프로이데의 순간들은 일상적이고, 치졸하며, 잔인한데다, 추악하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공감한 것이 자신이 경험한 샤덴프로이데를 공유한 사람들이 "자신이 인정한 모든 샤덴프로이데가 조금 꺼림칙하게 느껴진다(135)"고 인정하고 심지어는 이 대화를 둘만의 비밀로 붙이자고 했다는 사실이다. 문득 그 순간 누군가와 진정으로 친해지는 방법 중 하나로 드러내기 어려운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샤덴프로이데의 존재 의의에 어쩌면 부도덕함을 즐기는 속된 마음과 타인과 이를 공유했을때 나누게 되는 친밀함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긍정을 공감한 사람들보다 같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부정을 공감한 사람들이 더 끈끈하게 친해지는 법이다. 저자와 대화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를 나누는 것을 숨기고 싶어하지만,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인정하고 공유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낸 듯한 태도를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타인 앞에서 내가 느끼는 샤덴프로이데를 부정은 해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주변인들이 나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에, 때로 그런 악한 마음이 들면 '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지?'하고 죄책감이 생겼었다. 그동안은 주변인의 선의를 고맙게 생각하고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자책했는데, 문득 혹시 내가 그것을 숨기듯이 타인들도 열심히 숨기고 있었던걸까 의심이 들었다. 내 마음의 불편함을 좀 덜어보려고 읽었는데 오히려 그동안 믿어왔던 주변 사람들에 대해 의심이 더해져서 찝찝해졌다. 그래서 더욱 주변의 타인들에게 이를 당연한 본성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적용하고 싶지 않다.

 

 사실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면 오히려 내 마음이 더 괴로워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이를테면 방금 일어난 나의 사소한 불행, 아끼던 테이블 매트가 책상과 벽사이의 좁은 틈에 빠져 꺼낼 수가 없게 된 것,을 하소연 할 곳이 없어지질 않겠는가. 이 작은 불행을 보고 즉각적으로 혹시 '헐, 어떡해ㅋ'하고 생각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20여분간의 난투끝에 책상 다리판이 조금 휘고 나는 녹초가 된 채 테이블 매트를 꺼냈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더는 기운이 남아있지 않아 잠시 리뷰쓰기를 접어두었다 다시 이어쓴다. 어찌되었든 이런 일-사소한 불행-이 생기면 어디든지 얘기하고 위로받거나 털어넘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샤덴프로이데 못지 않은 본능같다. 인터넷에는 카펫 위에 엎은 라면, 떨어뜨려 깨진 고가 전자기기의 액정, 부주의로 분쇄기에 갈아버린 현금 사진 같은 불행의 공유처럼, 멘탈의 붕괴가 오는 불행의 순간들을 누군가에게 알리려는 사람들이 흔적이 가득하다. 나의 불행을 공유/전시하려는 본능과, 타인의 불행을 기쁨/위안 삼으려는 본능. 사람의 마음 안에서 이 두 본능이 공존하며 교묘하게 작용하도록 되어 있다니 마음이 복잡하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철저히 악한 마음과 하찮은 도덕성의 확실한 징후(15)"를 가지고 있다. 타인의 실패에 안심하기도 하고, 나의 상황과 비교하여 위로 삼기도 한다. 때로 우스꽝스럽게 넘어지는 사고 장면을 보면 걱정에 앞서 웃기도 한다. 웃음은 참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면, 걱정은 웃음을 참고 건네야 하는 것을 보면 본성이 악한 곳에 기울어져 있는가 싶다. 어린아이들의 반응에 대한 실험(45)에서도 나오지만, 아주 아기일때부터 아이의 주의를 돌리기위해 보호자가 큰소리를 내며 부딪혀 넘어지는 시늉 혹은 맞아서 우는 시늉을 하면 아이는 울고 있다가도 멈추고 이를 바라보며 웃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비록 이것이 아기의 것처럼 악의없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해도, 성장하며 학습하고 관계를 맺으며 지내온 사람이라면 이 자연스러움을 억제해야 함도 옳은 것 같다.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해서도 안된다는 간단한 원칙, 다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내 입장으로 생각해본다면 이를 어떻게 해야할지 답이 나올 것이다. 샤덴프로이데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그래도 우리 착하게 살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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