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마음
이두온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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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인사건으로 돈을 버는 마을이 있다?' 얼핏 서프라이즈나 생생정보통의 성우 톤으로 읽게 되는 단 한줄의 문구가 '타오르는 마음'의 거의 유일한 단서였다. 살인사건으로 돈을 버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하나, 청부를 받아서 진짜 사람을 죽인다. 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꾸며내 관광객을 끌어모은다. 셋, 살인사건으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대신 처리해서 돈을 번다. 이 세 가지 정도가 한줄의 단서를 가지고 내가 예상해 본 빈약한 마을의 비밀들이었다. 예상은 어느 정도는 맞았고 대부분은 틀렸다. 생각 이상으로 복잡한 인물과 사건들 탓에 저 세가지 추측 정도로는 이 이야기의 어떤 축도 세우지 못했다. 책을 읽기 전 당신은 어떤 예상을 할 수 있을까?

 

"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오기와 내 조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누구 하나 상황을 진정시키거나 멈춰 세우는 법이 없었다. 우리는 달릴 줄만 아는 수레바퀴였고, 그 질주는 꼭 바퀴가 망가지거나 수레가 똥더미에 처박혀야 끝이 났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태져 똥더미를 향해가는 그런 사이. 하지만 마음만은 기가 막히게 잘 맞았던 걸로 기억한다. (98) (413)" 

 

 밴나는 8년 전 있었던 살인 사건의 목격자다. 작고 쇠락한 마을인 비말의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살인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그들은 목격자이기도 하고, 용의자이기도 하고, 유가족이기도 하고, 추격자이기도 하고, 또 범인이기도 하다. 밴나는 과거의 이상행동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그녀가 하는 말은 대부분 무시당하고, 행동에는 제약이 따른다. 그런 그녀를 유일하게 받아주었던 나조가 살해당하자 밴나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를 둘러싼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밴나 본인도 어리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그녀의 추적은 브레이크가 없이 질주하는 수레처럼 위태롭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숨기는 것 없이 다 보여주는데 왜 이렇게 길이 복잡하지 어리둥절했다. 하나의 그림이 그려져있는 큰 판을 솜씨좋게 오려내 전혀 다른 순서로 끼워맞춰놓은 것을 정리하며 보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뒤집힌 수많은 카드들을 딱 두번씩만 뒤집어가며 같은 패를 찾아내는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먼저 뒤집힌 그림들이 짝이 맞지 않는다면 다시 돌려놓되, 그게 뭐였는지 기억해야 게임에 유리하다. 기회를 놓치면 내가 뒤집어 확인해놨던 패를 저자가 먼저 맞춰 들이미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봐야한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먼저 맞추는 경쟁은 아니지만, 무심결에 지나쳤던 대목이 나중에 결정적으로 다가오면 눈치채지 못했던 게 아쉽다.

 

 읽는 동안에는 흥미진진하게 몰입할 수 있었지만 다 읽고 난 뒤에 차분히 생각해보니 언제나 이유는 참 별 것 아닌데 사건은 크게 벌어진다 싶었다. 소설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사람의 마음이 타오르기 때문에, 분노나 고통이나, 정확히는 욕망에, 그것들이 굴절되어 나타나는 모습이 이럴수도 있구나 싶어진다. 읽을 때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서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건지 파악하기도 어렵고, 다수의 억압이 소수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가 가장 무서워보였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를테면 마피아 게임을 하는데 아무도 내가 시민임을 믿어주지 않고 몇 판 내리 시작만하면 무조건 죽인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좀 이상한 비유같지만 비말의 분위기도, '범인'을 잡는 축제의 게임도 그 이상으로 가혹했다. 가짜 광기와 진짜 광기의 차이점도 실감했다. 결국 살아남는 자는 진짜뿐이었다.

 

 무대는 별 것 없는 쇠락한 마을인데 축제 시기와 겹치면서 너무 복잡하게 많은 일들이 생겨난 것도 난감했지만, 읽으면서 가장 몰입이 어려웠던 부분은 '깡'이란 의성어들이었다. 이쯤되니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집중하고 있다 갑자기 몰입이 확 깨져버렸다. 비운의 망곡이었던 비의 '깡'이 갑자기 밈화되어 이렇게 되살아나지만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도배된 깡들을 바라보며 이게 다 몇깡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모르 파티'라는 말의 뜻이 마음에 들어 문신으로 새겼는데, 갑자기 김연자 선생이 노래로 불러 문신을 볼 때마다 난감해졌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세상은 그렇게 공교로운 일이 생기기도 한다.   

 

 " 산 사람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그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굴절된 자아의 투영이나, 집요한 소유욕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없다고 하지는 않겠지만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만일 이 사실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 우둔함에 축하를 보내고 싶다. 그렇듯 우둔하게 살다가 우둔하게 뒈지는 건 어떤 면에 있어서는 축복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 인간은 인간의 쓰레기통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감정의 배설을 쏟거나, 진짜 배설물을 쏟는다. 그들은 그렇듯 서로에게 똥칠을 해대다 죽는다. (76) "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소설에서 사랑에 대해 말하는, 사랑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사랑과 가장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누구보다도 사랑을 집요하게 해체하려 들었다니. 그런데도 책을 읽으면서 이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고 공감됐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정신없이 끝을 향해서 내달리듯 책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오로지 끝이 궁금하다는 마음에 서둘러 읽어내느라 지나쳐버렸던 것들이 눈에 밟혔다. 자꾸만 그 사람의 행동을 의심해볼걸, 이 사람이 한 말이 뭘 가리키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을텐데! 하며 아쉬웠다.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될까 궁금하더라도 꼼꼼히 살피며 천천히 한번에 읽어내거나, 성격이 급해 달리지 않고는 궁금해 못 견딜 것 같은 사람은 필히 한 번 더 읽어야 만족스러울 것이다. 끝을 알아도 서두르느라 놓쳤던 것들을 다시 찾아내 이걸 왜 놓쳤지?! 하며 곱씹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현실과 환상, 앞이 보이지 않는 자들의 도시에서 눈을 가리고 있는 가림막을 제 스스로 걷어내버린 사람의 '타오르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더해가는 여름의 온도만큼이나 몰입도가 확 올라가는 탄탄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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