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로하, 나의 엄마들 (양장) ㅣ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
이금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평점 :
읽는 동안 마음이 아파서 고단했다. 100년 전이라는 배경과 구수한 사투리가 초반의 몰입을 조금 방해했다. 한동안 가벼운 것들만 읽으려 고집했던 탓이다. 언제는 깊고 어두운 이야기라면 골라서 읽고 싶었는데, 사는게 복잡하고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가볍고 밝은 것만 찾게 되었다. 금방 그만둘 수 있고, 어디서부터 시작해도 어렵지 않은 글들을 소비했다. 핑계가 좋았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읽는게 더딘 것도 일제강점기에 홀어머니가 삼남매를 바듯이 먹여 살리는 형편, 그중에서도 맏딸에게 지워진 의무와 책임같은 것들이 오롯이 느껴지는 시작이 답답해서 였다. 한 며칠, 초반의 몇장을 읽다가 밀어두었다가 다시 집어들기만 했다.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 12시가 넘어서 문득 잠이 깬 밤이었다. 다시 잠은 오지 않고 책을 읽다 잠들어야지, 하고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손에 들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놀라운 흡입력이었다. 어깨가 아파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책의 절반쯤 읽었고, 그 뒤로는 재미있어서 끝까지 읽어버렸다. 버들, 홍주, 송화의 삶이 마음 아프면서도 살다보면 좋은 날도 오겠지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사진만 보고 외국에 있는 신랑과 결혼을 하러 가는 '사진 신부'들의 여정을 순진하게도 같은 마음으로 바라봤다. "삼 년 절은 오이지맨키로 쪼글쪼글한(78)" 신랑이 기다리고 있는 포와는 농장에서 일하다 채찍으로 맞은 상처 흉터가 남은 이주노동자들의 팍팍한 터전이었다. 그제서야 나무에 옷과 신발이 걸려있고 돈을 쓸어담는다는 부산 아지매의 말이 거짓말이었지, 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버들뿐 아니라 홍주, 송화가 마음먹고 떠나온만큼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랐었다.
여자의 삶에서 남자는 무엇일까. 세 소녀가 시집가겠다며 하와이로 떠나 겪은 일들을 보며 더 잘살고 싶어서 떠나왔는데도 마음처럼 살아지지 않는 현실이 갑갑하고, 남편의 존재가 그녀들에게 짐만 더 얹어주는 것 같아 원망스러웠다. 울며 결혼을 거부하고 싶어하는 손녀뻘의 소녀들을 데려다 결국 아들 낳은 첩으로 삼으려는 홍주의 남편과 술마시고 폭력을 휘두른 송화의 남편은 끔찍했고, 나라를 위해 일한다고 집안은 돌보지 않고 떠나버린 버들의 남편은 뭐라 비난하기 어려워 괴로웠다. 남편이 부재할 때 뭉친 세 사람의 삶은 오히려 남편이 있을 때보다 더 나았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열심히도 살았는데, 한편으로는 남편의 빈자리가 그들에게 계속해서 상처로 남아있는 것이 쓸쓸했다. 상처받고 괴로우면서도 사람에게 정을 주고, 사람에게 의지하며, 사람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니.
순순히 소녀에서 엄마로 성숙해져가는 세 여자들의 이야기를 읽다가 진주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달라진다. 옳은 결말이라는 것은 없겠지만 아름답기만한 끝맺음은 아니었어서 마지막까지 쌉싸름하게 읽었다. 결국은 그렇게 되었구나, 좀 더 좋은날이 많았어도 좋았을텐데 싶었다. 400쪽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전개된 내용에 비해 너무 갑자기 결말이 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송화의 이야기가 버들이나 홍주에 비해 적어서 아쉽기도 했다. 송화라는 인물이 가진 사연도 깊어 그녀에게 대한 이야기가 더 나왔어야 덜 채워진 채 서둘러 끝맺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진주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헛헛한 마음이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3시간을 넘게 읽었으면서도 마지막에 더 읽을 내용이 없어 아쉽다는 생각이 들다니, 좋은 책이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멕시코의 유카탄을 배경으로 한 김영하의 '검은꽃'이 떠올랐다. 에네켄 선인장 농장으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은 적 있었다. 그리고 일년 정도 지나지 않아 유카탄 반도의 무지개학교를 방문했다. 검은꽃을 읽을 때에는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스콜이 쏟아지는 변덕스러운 날씨를 뚫고 찾아간 무지개학교는 한산했다. 먼길을 온 우리 일행에 대한 환영은 따뜻했고, 아직도 남아있는 지난 세월의 흔적이 마음에 걸려 나는 위로도 응원도 변변한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한채 기약없을 다음을 나누고 인사를 드렸던 기억이난다. 그게 십년도 지난 일이다. 여유롭고 느긋한 곳답게 아마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겠지. 문득 언젠가 하와이도 가보게 될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검은꽃을 읽고 생각지못하게 유카탄에 갔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인상깊은 것은 검은꽃이지만,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더 재밌게 읽었다. 둘 중 하나만 읽어봤다면 꼭 다른 한 책도 읽어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