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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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악한 자를 위한 휴식은 없다. 그래서 오늘 밤 우리 둘 다 잠을 자지 않았다. (384) "

 

 이 문장을 읽을 때 쯤, 시간은 새벽을 지나 5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사악해졌다. 사실 순식간이라기 보다는 책을 읽는 내내 그랬다. '순수운동' 아래에서 순수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여자는 손에 꼽으리라. 어떤 내용인지 대략적으로는 알고 읽기 시작했지만, 초반에는 읽기 어려웠다. 웬만한 고어물들도 아무렇지 않게 보는데, 단지 문장이 주는 스트레스가 그보다 더 참기 힘들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가족- 남편과 아들마저도 견디기 힘든 존재가 되는 진의 심리를 따라가다보면 그만 읽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는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를 연상시킨다. 오히려 '스텝포드 와이프'가 좀 더 세련된 방식이랄까, 칩을 이식하고 리모컨으로 조종하는 영화에서는 짖음방지기를 찬 사람이 전기자극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으니. '스텝포드 와이프'와 강아지 짖음방지기의 조화로 탄생한 소설같다. 하루에 정해진 단어만큼만 말할 수 있고, 그 이상 말을 하면 카운터를 통해 전기 자극을 받게 된다. 단어 개수가 늘어날수록 자극의 강도도 커진다.는 카운터의 기능은 말을 빼앗는다는 것과 사람을 동물과 같이 취급한다는 -심지어 동물에게도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말을 한다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벌과 고릴라의 언어(412)에 대해, 12년 동안 언어없이 자라난 소녀에 대한 다큐멘터리(451) 등을 꺼낸다. 언어가 인간에게 얼마나 필수적인지, 언어가 있다는 것이 인간이 다른 동물 영장류들과도 어떻게 다른지 보여준다. 그리고 원래 가졌던 것을 빼앗긴 세대와 빼앗긴 채로 자라나는 세대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패트릭과 진의 딸 소니아는 인지 언어학자인 엄마의 재능을 물려받아 하루에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놀라운 성과를 보인다.(145) 어린 소니아에게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상으로 가르쳐온 진의 교육도 강아지를 훈련시키는 방법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언어와 인간존엄의 상실을 꾸준히 연관시킨다.  

 

 로렌조의 등장은 그들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이자 그녀의 권리였던 투표를 포기하던, 무슨 일이 벌어지던 손을 놓고 있던 진이 행동하기 위한 계기가 만들어지는 요소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남성들의 '순수운동'으로 억압받고 있는 상황에서 남편과 아들마저 증오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다잡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던 진이 그만은 특별히 다르게 여길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설명은 부족했던 것 같다. 그가 외국인이고, 순응하는 패트릭과는 달리 용기있어 보인다는 점들도 진이 " 목소리보다 잃을 게 훨씬 많(196) "음에도 불륜을 저지른 것에 이해가 갈만한 부분은 없었다. 게다가 그 난감한 상황에서 네명의 아이들과 새 생명을 함께 아우르기 위한 패트릭의 결말은, 음. 책의 최대 약점이 아닐까싶다.   

 

 세상이 워낙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다보니, '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의 내용도 허무맹랑하다고만 여겨지지 않았다. 책 속의 '현대 기독교 철학 입문'의 내용을 말 그대로 반길 사람들이 현실에도 존재할 것이고, 그 내용을 반대로 바꿔서 남성에게 거는 제약으로 만든다면 그 또한 반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세상이 불안정한 때를 틈타 느닷없이 돌출되는 인간의 광기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휴지공급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이유로 사재기를 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그러니 정보에 휘둘리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일을, 권리의 행사를 꾸준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보니 이 책이 "82년생 김지영"처럼 화제가 되고 도마에 오르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때의 분위기로 봐서는 이 책은 그보다 더할텐데.

 

 초반의 내용들 중에서 스티븐의 언행처럼 읽기에 거북한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물 흐르듯이 쭉 읽혔다. 그래서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가 궁금해서 계속 뒷장으로 넘어갈수밖에 없었다. 설정이 과격했던 것에 비해 후반부의 내용은 생각보다 인도적이고 미온적으로 마무리지어져서 의외였다. 뒷심이 약하다고 해야할까, 저자가 언어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건가 싶어졌다. 이 정도 반항은 몇 나라의 독재정권이 그러하듯 지역을 봉쇄하고 탱크 끌고가서 군부대로 제압해버리면 진압될 일인데. 그랬다면 영원히 고통받는 독자가 되었겠지만, 어쨌든 마무리와 몇몇 부분은 좀 아쉬웠다. 색다른 정신적 고통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신선한 설정이었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통제가 핵심이겠지만 한국 독자들은 일제강점기의 민족말살정책이 떠올라 우리말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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